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48화 (448/917)

1.

오랜만에 마주한 아멜리아의 친우 소피아 아베느가 수석교수는 시우와 마주치자마자 거의 발끝에 이마가 닿을 만큼 깊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아멜리아를 멈춰줘서 정말 고맙다고, 자신의 잘못으로 피해를 받은 부분은 훗날 확실한 보상을 약조하겠다며 거듭거듭 머리를 조아렸다.

따지고 보면 아멜리아가 폭주하게 된 계기에 시우의 행동이 끼어 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적어도 소피아 수석교수는 자신의 책임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재회를 방해할 생각은 없어, 가 봐. 정말 미안하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

“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낸 시우는 성큼 코너 밖으로 발길을 내디뎠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아멜리아.

그녀의 자태는 발목에 매인 족쇄 따위에는 눈길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기억 속 그녀의 모습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시우는 힐끗 아멜리아를 보았다.아멜리아도 힐끗 시우를 보았다.

상호간 감도는 지독한 침묵.

두 사람 사이 멈췄던 시간은 분명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봄을 맞아 녹아내린 계곡도 한동안은 살얼음이 끼어 있듯이 어색함과 낯섦이 남아 있다.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녹아내리는 살얼음처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듯 싶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고 여기 온 건지도 제대로 모르겠다.

서로 겉돌기만을 반복하는 동안 괴로움만을 겪어왔던 아멜리아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위로를 건넬 자격이 있기는 한 것인지.

하지만 이대로는 진전이 없다.

그간의 오해를 풀건, 화해하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모으… ”

= I— .

“모으… ”

= I— .

마침 아멜리아도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일까?

가녀린 어깨를 떨던 아멜리아는 시우와 동시에 같은 말을 꺼냈다.

“머, 먼저 말씀하시죠. 네.”

“머, 먼저 말해요….”

유감스럽게도 그 뒤의 말마저도 같은 말이었다.

어째 기시감이 팍팍 드는 상황이었다.

일전 아멜리아의 전속 조수로 배속된 후 갑작스레 친절해졌던 그녀와도 이런 뻘쭘한 상황이 자주 연출됐던 것 같은데.

아멜리아는 마치 기름칠이 덜 된 구체관절 인형처럼 대뜸 팔을 앞으로 뻗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시우의 왼손을 잡는다.

그것도 교황에게 악수를 청하는 신자처럼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이를 꽉 깨문 아멜리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우, 팔은 괜찮나요?”

그 목소리는 굉장히 차가웠다.

사무적이었으며, 오두막에서 함께하기 전 아멜리아의 음색과 비슷했다.

그리고 제 목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멜리아.

이럴 의도는 아니었다.

자칫하면 가늘게 떨리는 형편 없는 목소리를 들려줄 것만 같아서 최대한 목을 억눌렀던 것인데.

“네, 괜찮습니다. 아멜리아 님은 괜찮으신가요?”

“좋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아멜리아는 쓰윽 시우의 손을 놓았다.

그녀의 행동은 어딘가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뜨거운 재회의 포옹과는 대척점에 있는 태도다.

옛날이었더라면 그녀의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더욱 서먹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시우를 꺼리거나 싫어하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다.

아직 과거의 앙금이 풀렸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시우의 팔을 다치게 해놓고, 마냥 재회에 기뻐할 수 없음에 자중하는 것이리라.

보이지 않았던 아멜리아의 사소한 행동이 이제는 조금 제대로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멜리아 님.”

시우는 의자를 끌어 아멜리아의 앞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휙 숙이고 대각선 아래를 바라보았다.

살짝 가빠진 그녀의 호흡이 시우에게도 느껴졌다.

“죄송해요.”

“제가 더…!”

시우의 사과에 곧장 고개를 들고 외치는 아멜리아.

금실처럼 흐드러진 머리칼 사이 그녀의 눈망울에는 방울방울 이슬이 맺혀있었다.너무 늦었다.

이번에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리숙하게도, 그가 먼저 말을 꺼내주길 기다리고 말았다.

그토록 용기를 내기로 했는데도 말이다.

“…제가 더…. 미안해요. 시우를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억눌려있던 감정이 폭발하듯 아멜리아는 말했다.

“시우… 괴롭혀서, 미안해요….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렇게 시우를 힘들게 할 줄 몰랐어요…. 그리고 잘해주려고 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어요. 팔도, 팔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동안 수없이 고르고 골라왔던 말들.

사과해야 할 일, 하고 싶던 말,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던 말, 새로이 생겨난 사과할 말.막힌 댐이 터진 것처럼 쏟아지는 말들은 그 모든 것이 헝클어져 중구난방이 되었다.

격양된 호흡으로 내뱉는 통에 내용이 드문드문 귀에 들어온다.

솔직히 말해서 잘 이해할 수 없이 휘리릭 지나쳐가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아멜리아에겐 지금의 감정을 포장할 근사한 말재주가 없을 뿐이다.

너무 긴 세월을 혼자만 보내왔기에 남에게 진심을 전하는 능력이 서툴 뿐이다.

괴로워하는 표정에서, 마주하는 눈빛에서, 그녀의 눈물 속에서, 당장에라도 안기고 싶지만 차마 안지 못하고 옷자락만을 잡아당기는 손짓에서.그녀의 마음만큼은 확실히 전달되었다.

“아멜리아님, 다 알아요.”

한껏 경계하는 초식동물을 어루는 것처럼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행여나 그녀가 지레 겁먹지 않도록 말이다.

기억을 되찾았던 날, 시우는 아멜리아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

순간 떠오른 배신감과 분노에, 그녀의 모든 호의를 가증스러움으로 포장하고 뒤늦게 설명하려 드는 아멜리아의 애절한 매달림을 뿌리쳤다.

아멜리아만 도망친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시우 역시 당장 감정에 취해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두 사람에게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성숙함이 있었더라면, 이런 꼬이고 꼬인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아주 잠시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엇갈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아무리 화나고 원망스러웠더라도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싶으신 말이 전해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게요.”

툭툭 떨어진 눈물이 맺힌 손등을 어루만져주었다.

“혼자 남겨두지도, 귀를 닫고 멋대로 도망치지도 않을게요.”

몸을 일으켰다.

아멜리아는 흠칫 놀라며 시우의 의도를 살피려 들었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를 감쌌다.

아멜리아의 둥그런 뒤통수가 손에 잡히고 품에 쏙 들어왔다.

노예 시절 아멜리아는 언제나 시우보다 커 보였다.

물론 한눈에 봐도 작긴 작지만, 그녀의 딱딱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심리적인 위축을 이끌어냈던 탓이겠지.

그러나 지금의 아멜리아는 무척 작다.

이렇게 작고 약하면서 혼자서만 괴로워했던 것이다.

“우리 하나씩 이야기해봐요.”

2.

아멜리아는 시우의 품 안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이미 더 가까워질 수도 없을 텐데도 떨리는 손끝으로 옷깃을 부여잡고 셔츠에 눈물이 번져나갈 때까지 시우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시우 역시 어깨를 꽉 안고 아멜리아가 실컷 울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멜리아는 여전히 유창하게 속내를 전하지 못했다.

펑펑 울어버린 까닭에 발갛게 상기된 뺨과 코끝으로,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하고 가끔은 휙휙 주제를 건너뛰어 뒤죽박죽이 되기도 한다.

너무나도 어설펐기에, 제 마음을 몰랐기에 저질렀던 잘못을 성토하는 아멜리아를 시우는 용서해주었다.

사이가 크게 틀어졌던 당시 느꼈던 감정과 자신의 미숙함에 대해 시우 역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도망친 것은 아멜리아뿐만이 아니었노라고.

자신 역시 단순히 싫은 일에 대해 눈을 돌리고 싶었을 뿐이라고.

아멜리아의 기억을 엿보게 된 것도.

그녀가 어떤 상처를 부여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도.

아멜리아가 쪽지에서 확인한 내용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도.

시우가 먼저 아멜리아를 찾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쪽지를 읽고도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먼저 찾아가보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는 만날 수 없었다는 것도.

이제야 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품에 안기고도 단단하게 경직되었던 아멜리아의 몸도 커피에 들어간 각설탕처럼 풀어졌다.

편안한 침묵이 감돌았다.

해야 했던 이야기를 마음껏 주고받자 남은 것은 양털처럼 포근한 서로의 온기였다.아멜리아는 시우를 올려보며 묻는다.

“시우.”

“네.”

« 99

꿈에서만 그리던 이상향을 마주한 사람처럼, 만지면 흩어져버릴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아멜리아의 섬세한 손끝이 시우의 뺨에 살짝 닿았다.

조금은 지친 기색으로, 입술을 몇 번이나 깨물던 아멜리아가 묻는다.

“제가…. 밉지 않나요?”

“네.”

“그렇게 많이 괴롭히고, 못살게 굴고…. 공연한 잡일을 시켰는데도…. 기억을 잃은 걸 뻔히 알면서도 용서해 달라고 억지를 부렸는데도….”

사실 이 질문은 대화 중에 몇 번이고 나온 것이다.

아멜리아는 몇 번이나 확인을 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해하던 것이리라.

“기껏 남겨준 쪽지도 안 읽었는데도…. 팔까지 다치게 했는데도 밉지 않아요…?”시우는 눈물에 엉겨붙은 그녀의 앞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지금 이 구도.

속눈썹 개수를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가깝고, 분홍빛으로 빛나는 입술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거리.

아멜리아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어쩐지 알 것 같다.

동시에 멎은 숨과 얽히는 시선.

떨리는 아멜리아의 하늘빛 눈동자가 눈꺼풀에 잠긴다.

그러나 그저 눈을 감았다고 해서 동요를 전부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풀어졌던 아멜리아는 다시금 뻣뻣한 나무토막이 되어 시우의 옷깃을 잡아당겼고 속눈썹은 쉴새 없이 떨렸다.

두근거리는 고동이 맞닿은 피부로부터 전해진다.

우연하게도 궤적이 겹친 서로 다른 유성처럼 두 사람은 같은 것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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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의 교환.

친애와 신뢰를 표현하고 확인받을 최고의 방법.

두 사람은 속삭이듯 가만히 눈을 감았고, 고요한 밤 쌓이는 눈송이처럼 가까워졌다.

부드럽게 입술이 포개진 그때.

-끼이익!

아멜리아도 시우도 깜짝 놀란 까마귀처럼 재‘빨리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지하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기척과 대화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아멜리아는 정자세로 의자에 앉았고, 괜히 멋쩍어진 시우 역시 뻣뻣하게 앉아 연신 헛기침만 내뱉었다.

“시우 군, 일어났군요? 몸은 좀 어때요?”

“덕분에 아주 괜찮습니다. 네, 뭐, 아. 감사합니다.”

늦은 밤 지하감옥을 찾은 것은 코하브 백작과 알비레오였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심문을 계속하기 위해서이다.

어차피 마녀는 수면이 달리 필요 없고 모두가 이 사건의 조속하고 완만한 해결을 원했으니 근 이틀간 거의 쉴 틈없는 스케쥴로 심문이 진행되어왔던 것이다.

“하아….”

알비레오는 아멜리아와 시우를 번갈아 보고는 알만하다는 듯한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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