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메리골드 남작의 폭주 사건 이후로 또이틀이 지났다.
자칫 제2의 게헨나의 침공으로 기억될뻔했던 해당 사건은 결코 가벼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에렐림 공작의 진두지휘 하에 아멜리아의 처분을 결정하기 위해 조사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피해 사실 확인과 인과규명을 위해 코하브 백작이 조사관으로 임용되었다
게;여는 마녀를 재판할 수 있는 사법체계가 없기에 청문회를 통해 협의안이 발표될 예정이었다.
“...이하, 거짓된 진술은 본 청문회에서 남작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성실히 조사에 응해주시길.”
“알겠어요.’’
검게 염색한 단발, 이지적인 빛이 엿보이는 상아색 눈동자.
신사복에 외눈 안경을 멋들어지게 착용한 코하브 백작은 유의사항을 읊고는 심문을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사건 종결 직후 도주의 우려가 있다 판단되어 제머나이 저택의 지하감옥에 구속된 채 조사에 응하게 되었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만을 듣고 결과가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일 수집된 마법 패턴의 분석과 증거수집이 이뤄질 것이며 최소한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약 세 시간에 걸쳐 진행된 심문 중 아멜리아는 거의 동요의 빛을 내비치지 않았다.
담담하고 진실한 목소리로 질문에 답할 뿐.
모순되거나 거짓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없는 담백한 대답이었다.
“좋습니다. 30분 정도 휴식을 지닌 이후 다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코하브 백작은 어느새 한가득 쌓인 종이 뭉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단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마 즉시 저 서류를 위원회 쪽에 보내 교차검증을 하고 조금 더 심층적인 부분을 파고들겠지.
조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피곤한 질문이 빗발칠 것이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싸늘하게 식은 홍차를 머금었다.
“메리골드 남작.”
중재인 신분으로 심문에 참관하고 있던 알비레오 제머나이는 아멜리아의 독방으로 선뜻 발걸음을 내디뎠다.
“누추한 곳이라 미안하네요. 수십 년간 사용된 적이 없던 곳이어서 말이죠.”
비록 청소도 깨끗이 하고 새로운 침대도 놓았다지만 구축 지하 건축물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퀴퀴한 냄새와 돌벽 사이에서 흐르는 한기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알비레오는 새삼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마녀들이 죄다 미녀라는 건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상식이다.
개중에서도 아멜리아의 미색(美色)은 훌륭했다.
단정히 꼬여진 옆머리는 금사(金絲)로 짜낸 밧줄을 연상시키고, 쾌청한 하늘을 머금은 듯한 하늘색 눈동자는 빤히 마주하고 있다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긴 쌍꺼플도, 가녀리면서도 우아한 몸선도 평생 외모에 불만 없이 살아온 알비레오조차 괜히 주눅이 들 지경이니….
많은 마녀가 동성애적 성향을 강하게 띠지만 알비레오는 자신을 지극히 이성애자라고 인지하고 있었다.
비록 경험은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런 그녀가 왜 새삼 아멜리아의 미모에 감탄하며 이런 생각을 떠올리느냐 하면….
“신시우씨 는, 괜찮나요?”
실로 악마 같은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겸비한 마녀가 다름 아닌 딸내미들의 맞상대이기 때문이다.
아멜리아는 과거부터 신시우와 깊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실제로 짝사랑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적도 있다.
뭔가 일이 꼬여 틀어진 관계 중에 시우가 목숨을 걸고 구해왔으니 ‘대위기 이후 재결합’이라는 할리우드 클리셰를 따라가는 건 빤히 보이는 수순인 것이다.
안 그래도 에버그린 양에 티페레트 공작에 예소드 백작까지 합세한 상어 수조인데, 복귀한 아멜리아까지 합사한다니.어머니 된 심정으로 어찌 한숨이 푹푹 나오지 않을쏘냐.
“괜찮아요, 회로가 영향을 많이 받아서 의식이 없긴 하지만요.”
“...팔은요?”
꽤 칼로 자르는 듯한 심문 속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아멜리아다.
하지만 그녀는 시우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커다란 잘못을 지은 표정이 되어 움츠러들었다.
“코하브 백작이 의수(義手)를 이식해 주기로 했어요. 이 분야에서는 최고이니 믿을만 할 거에요.”
“다행이네요.”
아멜리아는 그제야 안심한 듯이 의자에 마저 등을 기댔다.
자신이 어찌 될 지는 신경도 안 쓰면서 신시우의 이야기에는 저토록 일희일비하다니.
역시 예상했던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
알비레오는 큼큼한 목청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정식적으로 청문회가 진행되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가벼운 처벌로 끝나지 않을 거에요. 작위만큼은 분명 몰수되겠죠.”
아멜리아가 일으킨 소동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아무리 속삭임의 마녀의 농간이 끼어있다고 한들 그녀는 수천 명의 시민을 마법적으로 감금했으며, 게헨나의 결계에도 중대한 위협을 끼칠 뻔했다.
따라서 아멜리아 역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인 점은 마녀들 사이의 여론이 나브브지 않아요. 제대로 된 배상만 행해진다면 시민권 몰수까지는 너무한 처사다라는 중론이에요. 청문회가 끝나는 대로 구속 시효도 중지될 예정이고요.”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알비레오는 ‘그러게요, 저도 제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네요’라는 뒷말을 숨겼다.
사실 이 정도 선에서 의견이 일치된 것은 제머나이와 예소드가 나란히 힘을 썼기 때문이다.
쌍둥이의 장래 유망한 연적이 될 아멜리아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같은 마녀끼리의 의리도 있지만, 말할 것도 없이 신시우의 난동을 막기 위해서였다.
행여 그녀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가장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고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이니 말이다.
“백작님.”
“네.”
“혹시, 신시우씨가 깨어난다면….”
잠깐 생각에 잠긴 듯 긴 속눈썹을 깜빡이던 아멜리아 조용히 말을 걸던 때.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었다.
우당탕.
누군가 계단을 급하게 내려오는 소리였다
“아멜리아!”
아멜리아에게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공동에 울린다.
넘어질 듯 커다란, 아니 거대한 가슴을 출렁이며 뛰어 내려온 사람은….
소피아 아베느가, 아멜리아의 유일한 친구였다.
“소피아?”
“아멜리아!”
“으극..!”
그녀는 순식간에 철창문을 열고 이산가족 상봉하듯 아멜리아를 꽉 끌어안았다.
케헥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격렬한 포옹.
고상한 자세로 홍차를 마시던 아멜리아는 순식간에 소피아에 가슴팍에 파묻혀 버둥거렸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소피아에게 제대로 된 말도 전하지 않고 홀로 공적 사냥을 떠났던 아멜리아.
사정을 알 리 없는 소피아는 아멜리아를 걱정하며 그녀를 찾아 떠났다.
하지만 온갖 금수와 짐승의 눈을 빌릴 수 있는 소피아조차 아멜리아의 편린조차 찾지 못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녀의 흔적을 지워버린 것처럼 거취의 실마리조차 깔끔하게 증발해 있던 것이다.
게헨나 구석구석부터 현세까지 샅샅이 수색하던 소피아에게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소식.
아멜리아 메리골드 남작이 게헨나를 침공했다더라.
그 말도 안 되는 전보에 거품을 물고 뛰어온 것이다.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미안해 아멜리아….”
“소피, 아… 괜, 괜찮으… 으으….”
아멜리아를 뜨겁게 안은 채 눈물을 흘리며 뺨을 비벼대는 소피아.
산소결핍으로 파랗게 질려가는 아멜리아를 본 알비레오가 헐레벌떡 둘을 떼어놓는 것으로 소란은 가라앉았다.
2.
“사체 발견?”
[네, 속삭임의 마녀가 클라라 스코르피아를 참칭해 메리골드 남작에게 접근한 것은 거짓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네요]
“그 밖에 특이사항은?”
[1 급 공적, 속삭임의 마녀가 아직 게헨나에 남아있는 경우를 대비해 수색팀을 편성했습니다…만, 효용이 있을런지는]
“고생이 많아요. 진전이 있으면 또 연락주세요.”
코하브 백작은 통신을 끊었다.
심문으로 정보를 정리해 위원회 측에 넘겨 검증을 끝냈다.적어도 지금까지 그녀의 말과 어긋나는 진실은 없었다.
현세 사막에 위치한 클라라 스코르피아의 공방을 급습했을 때 발견한 것은 반쯤 녹은 황금 더미와 얽혀있는 미라화된 시신이었으니.
‘속삭임의 마녀가 무엇을 위해서?’는 둘째치고 적어도 아멜리아의 습격에 악의가 없었다는 정황증거가 추가로 확보된 셈이다.물론 남작이 되어서 공적의 허튼수작에 놀아난 실책까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하감옥으로 내려가는 나선계단을 걸으며 코하브 백작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세상은 변한다.
절대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가설도 시간에 따라 무너진다.
또한 그런 변화에는 언제나 전조가 존재하는 법이다.
역사를 나누는 분수령처럼 함께 걸어갈 때는 쉽게 눈치챌 수 없지만 뒤돌아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그런 전조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틀 전, 언제나 중립을 지키던 에렐림 공작이 왜 그런 행동을 했었을지도….
“아무튼….”
개인적 의문은 의문이고 소임은 소임이다.
에렐£ 공작의 총애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투명한 증언수집을 바탕으로 사건의 흑백을 가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응?”
코하브 백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멜리아가 수감된 수감실 쪽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힐끗 엿보이는 것은 눈물로 읍소하는 아베느가 남작과 그것을 담담히 받아주는 메리골드 남작.
“소피아가 잘못한 게 아닌걸요. 소피아가 없었더라면 저는 그와 접점이 생기지도 못했을 거에요.”
“으허헝…. 그래도, 내가 내가지켰어야 했어….”
“제가 어리석었던 까닭이에요. 소피아가 책임져야 할 건 없어요.”
덤으로 훌쩍이는 아베느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며 진정시키는 메리골드 남작의 손도 보였다.
“번번이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항상 걱정해줘서 고마워요.”“아멜리아….”
보아하니 꽤 감동적인 만남의 시간을 보내는 모양이다.
심문 절차상 제우자스『만고 것은 원칙상 불허;휴… 언제부터 마녀들이 원칙을 그렇게 잘 지켰단 말인가?
코하브는 회중시계를 슬쩍 꺼냈다.
“한 10분 정도만 더 기다릴까요….”
연인의 재회를 방해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자신의 상냥함과 섬세함에 새삼 감탄하며 벽에 기댄 코하브는 구두 코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갓지은밥님이 그려주신 바니걸 엘로아 ver.2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