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득해져 가는 시우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아찔한 추락감이었다.
적란운을 가로지른 스카이다이버처럼 새까만 입자의 구름을 뚫고 튀어나온 시우의 눈에 보이는 것은.
크기를 측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광활한 어둠.
아멜리아가 지닌 고독과 슬픔의 총체.
그 저변까지 아래로는 끝없이 가라앉는 아멜리아.
일평생 후회와 회한을 맴돌다 결국 외톨이가 되기를 선택한 그녀가 보인다.
어떤 간절한 말도 울림 없이 묻혀버리는 고독의 어항 속에서 아멜리아는 천천히 익사하고 있었다.
아멜리아의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시우는 제 외침을 스스로 들을 수조차 없었다.
아멜리아의 주위에 뱀처럼 몸을 휘감는 보랏빛 마력은 침식을 끝냈다.
그녀가 제아무리 릴리스의 목줄을 끊어냈다 해도, 폭주 자체를 막아낸 것은 아니다.
혼자라면 상처 입지 않는다.
주위를 비워내고 자신만의 세상에 틀어박히면 거짓된 안식은 찾아온다.
홀로 남겨지고 싶다는 염원.
아멜리아는 그것을 택했다.
새파랗게 떠오른 감정 없는 눈동자로 시우를 바라보며 거칠고 격렬한 마력을 토해내고 있었다.
달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떨어지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건 알 수 없었고 그리 중요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멀었다.
올려본 하늘의 휘영하게 떠 있는 달까지의 거리만큼.
단절로 인해 발생한 오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혹은 너무나 깊게 이해했기에 벌어진 간극은 그만큼이나 멀어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조차 가까워지고 있다.
시우는 다시 한 번 소리가 되지 못한 외침을 내지르며 그저 다가선다.
몸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시우에게 남은 것은 붉은가지도, 그림자로 짜낸 튼튼한 갑주도, 종횡무진 움직일 수 있는 리본도 없다.아멜리아의 입자에 뼛속까지 절여진 남루한 몸뚱이가 전부.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이미 폭주가 진행된 아멜리아는 주위의 무엇도 인지하지 못한다.
혼자서 완벽해지는 ‘세상’을 위해 주위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을 뒤집어본 시우는 알고 있다
입자를 이렇게나 한가득 몸에 품은 상태에서 아멜리아가 일으키면 일으키는 공명과 맞닿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 줌의 덧없는 꽃 더미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시우는 나아가길 택했다.
-콰드드드득!
시우는 몸을 쥐어뜯는 마력의 저항을 느꼈다.
이 이상 다가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경고처럼 전신에 퍼져나가는 격통에 괴로워하던 시우의 등 뒤로 먹구름처럼 일렁이던 입자의 걷혔다.
날이 갠 것처럼 순백의 빛으로 빛나는 하늘은 아멜리아의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어둠을 도려내며 시우와 아멜리아를 겨누는 마법의 모습은 빛의 창과 같았다.
어리석음을 단죄하는 지엄한 신의 심판처럼, 신성함을 넘어 외경까지 느껴지는 마력의 울림이 그 안에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왜곡? 공간에서 저 정도의 마법을, 저 정도로 정밀하게 구사하며 공격할 수 있는 존재가 24 위계 에렐림 공작이 아니라면 이상한 일이다.
예정되었던 30분이 지난 것이다.
만약 이대로 어렵사리 나아간다고 해도 저 창은 나란히 시우와 아멜리아를 꿰뚫겠지.
삶은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시우는 장미 덩굴처럼 몸을 얽어매는 마법을 헤집고 나아간다.
잔뜩 찢어져 헝클어진 옷가지.
겉으로 보기에 큰 상처는 없지만, 맨살이 드러난 손과 팔에는 울룩불룩한 ‘개화’의 전조가 보인다.
-팅!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공간임에도 귓가에 소리가 울렸다.
물을 채워 넣은 와인잔을 스푼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청명한 파동은 접근을 허락받지 못한 불청객에게 벌을 내린다.
시우는 보았다.
앞으로 쭉 뻗은 왼팔
三 손끝에;5&나기 시작한 화려한 꽃이 손 한쪽을 깔끔히 먹어치우는 것을.
I”
끔찍한 통증이었다.
근육과 &가 분리되고 신체의 내부부터 이형의 생명체에 파먹히는 감각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면 어리석은 처사다.
손끝부터 돋아나기 시작한 꽃은 팔, 어깨를 거쳐 심장에 도달할 때까지, 그리고 전신에 번질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우는 아멜리아의 자성마법을 막아내지 못했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하지만 아멜리아가 사냥하는 기억을, 그녀가 펼치는 마법의 규칙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처음 시도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데이터가 쌓여있다.
피어라.
목청이 터지라 부르짖는 영창과 함께 격렬한 마력의 스파크가 전신을 내달렸다.
그건 정상적인 마법이 아니었다.
모든 마력을 소모해 제 몸의 마력 회로를 박살 내는 자해 마법이나 다름없다.
아멜리아가 피워내는 꽃은 결국 미리 뿌려진 씨앗이 파동에 의해 개화하는 것.
파동이 퍼져나갈 마력 회로가 쇼크 상태가 된다면 즉, 잠시나마 평범한 인간과 다를 것 없는 몸 상태가 된다면.
개화는 정지한다는 가설에 모든 것을 걸었다.
정말 가설이 맞았던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난수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복합현상이 발생한 것인지는 모르다.
새된 소리를 내는 파동이 몸을 통과했지만 시우는 가까스로 바닥이 없을 것 같던 공허 속을 딛을 수 있었다.
반쯤 사라져버린 왼팔을 부여잡는다.
팔을 뻗을 거리에 아멜리아가 있다.
머나먼 길이었다.
어긋남만을 답보해가던 두 사람은 이제야 겨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현세와 나뉘어 저만의 삶을 영위해 온 마녀의 도시, 게헨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속담이나 격언 따위가 독자적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그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지개 위에 설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무지개란 화려한 이상향과 완벽의 상징.
인간들 사이에서는 완벽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표현으로 쓰이고,
마녀들 사이에서는 누구도 창조의 마녀의 경지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조 어린 표현이라지.
후자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경우 정말로 맞는 말이다.
무지개 위에 설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없다.
때로는 사소한 오해가.
때로는 미숙함이.
때로는 잘못된 사랑의 표현 방식이.
때로는 미움과 원망이.
서로를 상처 입히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의 틀어짐을 낳는다.
인연이란 그런 헝클어진 흙더미 위에 피어난 초라한 꽃이다.
만약 무지개 위에 선 존재를 신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면, 신이 보기에 그 꽃은 너무나도 보잘것없어 보이고 또 쉬이 시들어버리는 무가치한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약한 인간은 함께이기에 행복할 수 있고, 서로를 향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아멜리아의 몸에서는 여전히 마법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기관사라도 탈선한 채 폭주하는 열차를 멈춰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늘 위에선 필살이 보장된 빛의 기둥이 기요틴의 칼날처럼 처형을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아무런 힘도 남지 않은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멜리아를 향해 걸어가는 것밖에 없었다.
어긋남을 끌어모아 혼자서 괴로워하던 아멜리아를 안아주는 것밖에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이렇게 힘들게 만났는데.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0초나 남았을까?
시우는 아멜리아를 끌어안았다.
황폐해진 몸을 거칠게 들쑤시는 마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그저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내뱉을 뿐.
갈라진 틈새로 피를 머금은 입술이 열린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요….”
이 말은 그녀에게 닿았을까.
마지막 순간이라 할지라도 아주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을까.
인형처럼 멍하니 굳어있던 아멜리아를 소중하게, 소중하게 끌어안는다.
“이제는 떠나지 않을게요.”
점점 밝아지는 사위.
머리 위로 지글거리는 열감이 곧장 느껴지고 자비 없는 신의 심판이 두 사람을 꿰뚫는 그 순간.
톡톡.
시우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느꼈다.
아니.
이것은 또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옷자락을 적시는 소리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본연의 색을 잃었던 세계가 자신의 색채를 되찾으며 어두컴컴한 입자가 아스라이 흩어진다.
왜곡되고 헝클어졌던 공간이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돌아오고.
머리를 향해 쏟아지던 빛의 창조차 거대한 꽃 더미로 변해 흩어지는 사이.
차갑게도 얼어붙었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한다.
-펑! 펑! 펑!
아직 채 끝나지 않았던 불꽃놀이의 남은 불똥이 하늘을 수놓았다.
축제를 즐기려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난데없이 화려하게 흩어지는 꽃의 소나기를 바라보며 기쁨과 감탄이 섞인 환호를 연발했다.
무너져가던 세상은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찢어발기던 흉폭한 마력도, 그것을 심판하려 들던 신성한 창도 없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옷깃을 꾸욱 잡아끄는 힘이 채우는 것을 느꼈다.
시우는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아멜리아가 있었다.
그녀는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어쩔 줄 몰라하며 시우를 바라보는 아멜리아가 있었다.
“시우... 시우... 팔이… 팔이 다쳤어요….”
그토록 시우를 다시 보고 싶어 했음에도.
그토록 시우와 재회하는 것을 두려워했음에도.
당장 잘려나간 시우의 왼팔을 보며 하염없이 걱정의 눈물을 흘리는 아멜리아 메리골드가 있었다.
시우는 아멜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아멜리아는 죄지은 사람처럼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듯 옷자락만 공연히 잡아당기고 있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할지 모른 채 입술만 달짝이고 있는 아멜리아가 참 그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지금이라면 분명히 들리겠지.
“아멜리아 님.
아멜리아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다 괜찮아요.”
시우는 정신을 잃고 아멜리아의 품에 쓰러졌다.
흐려진 상념 아래로 게헨나의 또 다른 격언을 되뇌어 보았다.
신은 잔혹하여 기적을 선물하지 않는다…라는 마녀답게 시니컬한 격언이다.
마법 폭주에 의한 여파는 그 개인이 지닌 성취에 비례한다.
아멜리아에겐 이미 통제를 벗어난 자신의 힘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폭주(暴走)’인 것이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스스로 마법을 거두어들였을뿐더러 여력을 몰아 에렐림 공작의 마법까지도 상쇄해버렸다.
이런 상식을 벗어난 일에 대해선 역시 신이 주신 기적이라 표현해도 좋은 걸까?
그게 아니라면 유치하고 진부하지만.
헝클어진 흙더미 위에 소박한 꽃이 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작지만 아름다운 그런 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