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비레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데네브의 전언에 따르면 회의는 회의(會議)가 아니었다.
에렐림 공작의 일방적인 브리핑과 설파가 조금도 수정되지 않은 채 반영되었을 뿐이다.
그만큼 확고한 명분이 있었고, 수상쩍은 심증이 있었다.
사실 알비레오조차 ‘메리골드 남작은 공적이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알비레오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시우에게 전말을 전했다.
더불어 에렐림 공작이 회의 당시 제출했던 조감도 역시 보여 주었다.
아까부터 샤론이 만들어낸 마법진 위에 올라가 강화 술식을 받던 시우.
그는 놀라울 치만큼 침착했고, 그만큼 각오를 굳힌 듯 보였다.
도리어 원소 마법으로 검은 갑주의 이음매를 견고히 하는 샤론의 손이 훨씬 떨렸다.
“제한 시간은 30분, 시민의 위험은 우선 걱정 없음, 난수화된 공간 속에 펼쳐진 대규모 마법이라는 말씀이시죠?”
시우는 침착한 목소리로 알비레오가 말한 것을 정리해 되물었다.
알비레오는 아멜리아와 시우의 관계를 얼추 짐작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전속 노예였으며, 아멜리아는 시우를 짝사랑했다.
반죽음이 된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둘은 결별을 맞이했고 그 뒤로 다시 마주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쌍둥이가 좋아 죽으려 드니 알비레오도 최대한 밀어주고 있지만 어떤 면모에서는 시우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그는 난봉꾼이었고 여기저기 사건을 몰고 다니는 트러블 메이커으니까.
그러나 시우의 본질적인 선량함은 믿고 있다.
거의 남남이나 다름없던 쌍둥이를 위해 호문쿨루스와 싸우고 공적에 맞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멜리아를 위해 사지를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말할게요. 말리고 싶어요.”
조금 전부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도 묵묵히 사전 준비를 돕는 샤론만큼이나, 제머나이 백작은 시우의 진입을 만류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잠깐 눈 돌리면 사지 속에서 뒹굴고 나오는 사위다.
난수 공간, 그것도 의도를 알 수 없는 마법이 펼쳐진 틈을 단신으로 진입한다라….
아주 냉정하게 판별했을 때 이건 자살 행위다.
삼라만상의 규칙이 왜곡된 마경 속, 자체적으로 발동되는 마법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서 마법의 활용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 경계의 너머는 일상적인 마법 역학이 적용되지 않는다.
어떤 마법을 사용하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간’의 규칙에 따라 피드백을 반영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사소한 실수가 생겨난다면, 정성껏 가꿔왔던 마법은 제 주인에게 이빨을 들이민다.
일신의 마법 성취가 드높은 마녀일수록 동반하는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그 많은 귀족과 대마녀가 수수방관하는 것도 같은 까닭이 다.
본디 마녀란 그 무엇보다도 제 안위를 중하게 여기니 말이다.
“이걸 또 못 말렸다고 쌍둥이한테 무슨 잔소리를 들을지… 벌써 머리가 어지럽네요.”
“괜찮습니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그때는 문제없이 움직였어요.”
모든 객관적 지표와 상황이 불길한 암시를 풍기는 와중에 알비레오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 시절 호문쿨루스를 잡아내고, 물병자리의 마녀에게 뇌가 헤집어지고도 부활했다.
비겁의 마녀가 일으킨 겁난에서도 살아남았으며, 최근에는 욕망의 마녀마저도 꺾었다.
여태껏 있던 최악의 상황을 어찌저찌 헤쳐나가던 그라면, 예측되는 암울한 결말을 비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실소가 나오는 근거 없는 낙관이었다.
“얄궂네요. 이렇게 많은 마녀가 있는데. 가장 먼저 진입하는 사람은 당신이라니.”
마음 같아선 알비레오도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순 없다.
알비레오에게는 쌍둥이가 있다.
괜히 정에 이끌려 생존확률이 희박한 곳에 따라갔다가 객사라도 한다면 낙인을 물려받지 못하게 될 오딜에게도, 반쪽짜리 낙인만 물려받게 될 오데트에게도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바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생각보다 촉박하네요.”
“꼭 돌아와요.”
알비레오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데네브와 합류해 플랜 日를 준비함과 동시에 샤론과 시우가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이다.그는 지금 전쟁터를 향하는 것이니.
“미안해.”
“그 말 한 번만 더하면 싸대기 날릴 거야.”
샤론의 고운 화장은 눈물에 녹아 흐르고 있었다.
공들여 뾰족하게 세운 속눈썹도 흐물흐물 젖어서 축 쳐져 있다.
들어갈것이다.
하물며 시우가 움직이지 않으면 처형이 결정됐다고 전해 들은 이상, 그가 등을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제발 필요 없는 일이 되길 기다리며 시행한 마법 덕에 시우의 갑옷은 온갖 마법적 강화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붉은가지를 가지러 가는 길을 뒤 따라 나중에 사용하려고 모아두었던 값비싼 재물을 있는 대로 털어왔다.
샤론의 자성마법은 타르바의 원소마법.
바치는 제물에 비례해 마법의 강력함 또한 항진된다…만.
최고급 홍옥과 흑진주, 푸른빛이 감도는 금강석을 제물로 바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이 위험한 공간을 만들어낸 아멜리아는 23 위계의 마녀.
제물을 사용해 이제 막 20 위계 초입에 오른 샤론이 들어가 봐야 시우의 발목을 잡기나 할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의 갑주의 조응력을 극한까지 올려주는 것뿐.흐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시우를 본다.
“키스도 안 할거고,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않을 거야. 무사히 돌아오면 결혼하자는 얘기도 안 할 거야.”“…샤론.”
어차피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기년도 안 되는 시간에 적어도 5번은 죽다 살아난 시우니까.
이 정도 일에 고꾸라질 위인이 아니라고 굳게, 최대한 굳게 믿었다.
“너도 아무 말 말고 다녀와.”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소 잠깐 헤어질 때 나누는 인사처럼 등을 떠민다.
샤론과 오랫동안 눈을 마주 보던 시우는 안대를 벗었다.
수면 위를 떠도는 기름방울처럼.
사이키델릭한 색채가 감도는 경계가 시우의 등을 잡아 삼키고.
샤론은 털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저만치 기다리고 있던 알비레오에게 다가갔다.
“저희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무섭고 두려운 일이 생기면 금방 위축되곤 하던 새가슴 샤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지만 동시에 눈물 따위로 꺾이지 않은 신뢰와 의지가 엿보였다.
2.
경계에 발을 들이자마자 느낀 것은 온몸 구석구석 퍼진 마력회로에 어마어마한 과부하가 걸리는 감각이었다.
수은전지를 혀에 가져다 댄 것처럼 퍼지는 저릿거림, 단단히 응조되었을 갑옷의 그림자가 끊는 주전자처럼 덜커덕거린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정적.
필터를 씌운 듯 짙은 녹색으로 시들어간 세상을 녹물처럼 쏟아지는 빗물이 울적하게 덮어내고 있다.실로 비현실적이다.
“후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정신 나간 마경(魔境).
일전에도 경험이 있다는 말은 진실이지만 그건 반쪽짜리 진실이다.
무의식 상태에 있던 기억을 열람했을 뿐이며, 그 상태의 신시우는 지금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연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느긋이 걸어갈 수만 있다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천재지변도 해결할 가락이 잡혔을 것이다.
허나 세 가지 악재가 겹쳤다.
하나, 이곳이 단순히 난수화된 공간이 아니라 언제라도 펑 터져버릴지 모르는 마법이 혼재해 있다는 것.
둘, 심지어 시우는 그 중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
셋,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간제한까지 걸려있다는 것.
당연히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해야 하고, 한순간의 실수는 목숨을 대가로 징수하며, 이 모든 악재를 넘어서더라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아멜리아가 숙청당한다.
그 시각 근처에 시우가 있으면 휘말리는 것은 덤이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시우는 곧장 통제식이 적힌 리본을 벗겨낸 붉은가지를 들었다.
이 붉은가지는 잘못 사용 시 사용자의 몸을 걸레짝으로 만든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너무나도 활용성이 좋은 병기였다.
기본적으로 아무리 난수화 속 왜곡이 심하다 해도 공간 전체에 걸린 현상.
붉은가지에서 발현해 내는 왜곡장 내부를 침범할 수는 없을 터.
“피어라.”
기억을 더듬는다.
그때의 신시우가 했던 것처럼 붉은가지를 중심삼고 일그러진 길을 나아간다.
현재로썬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상황을 낙관할 근거는 되지 않는다.
알비레오가 보여주었던 조감도처럼 이 현상은 내부로 갈수록 심화한다.
반대로 말하면 고작 주변부에 있을 뿐임에도 이만한 부하가 걸린다는 것이니.
-철컥 철컥
비앙카와의 격전에서 거의 1년 만에 마주한 그녀였지만,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시우는 게헨나에 다시 돌아온 이후 아멜리아를 찾았다.
시간이 지나면 부정적인 감정은 해소되기 마련이다.
기억을 되찾았을 당시 아멜리아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분노.
차라리 없던 일로 치부해버리고 싶었던 쓰라린 추억도 시간과 함께 포개지며 가라앉고 이제는 손끝에 박힌 가시 같은 뾰족함만을 주고 있다.
후회도 있었고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멜리이스『먼녀 찾오지 않?;주 것을 구실로 그녀를 만나러 가지 않았을 뿐이다.
편지를 읽은 그녀가 여태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그녀쪽에서 인연을 끊고 싶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이니.
못다 한 이야기를 듣고, 그간 미뤄두었던 대화를 하고, 사과할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교수직을 사임한 아멜리아의 행방을 알고 있는 이는 없었다.
들려오는 것이라곤 현세로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뿐 시도는 번번이 헛수고로 돌아갔다.
“하필….”
그런데 하필 이런 재회라니.
시우는 아멜리아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려운 사람이었다.
종종, 아니 꽤 자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지금까지 벌인 모든 행보는 공적의 것에 가깝다.
설령 시우가 귀족회의에 참가했더라도 마땅히 에렐림 공작의 말에 반박하여 마녀를 설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렐림 공작이 정연하게 내세운 논리보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정황보다,확고하게 시우의 발걸음을 이끄는 것이 있다.
믿음이다.
아멜리아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난해한 사람이지만 결코 공적이 될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님을.
그녀가 통나무집에서 보여주었던 상냥한 미소와 발랄한 배려는 거짓이 아니었음을.
이 모든 일은 오해 남짓은 착오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우스우리만치 믿고 있었다.
그런 아멜리아가 오해를 끌어안고 숙청당하는 것은 두고 볼 수 없다.
시우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그의 정신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이 공간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내장이 꼬이는 듯한 중력의 뒤틀림과 산화된 쇠처럼 큼큼한 냄새를 풍기는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며.나아간다.
O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해피뉴이어~
올 한해 모두 고생많으셨습니 다
새로운 한해 모두 즐겁게 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