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별자리의 마녀’ 블랑쉬 에렐림 공작.
천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최고령 마녀 중 하나.
대부분의 시간을 학회 공방에 틀어박혀 보내는 에렐림 공작이지만, 게헨나 내에서 그녀의 발언을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계통을 가리지 않고 모든 분야의 마법에 정통했으며, 공방에는 스스로 모은 것부터 학회원들의 논문에 이르기까지 마녀에게 있어 황금더미보다 구미가 도는 연구자료가 존재한다.
대마녀마저 그녀의 서고를 엿보기를 원하고 가르침을 받길 원하는 자가 발에 챌 정도로 많다.
그런 에렐림 공작의 발언에도 회의장의 술렁임은 멎지 않았다.
유사 이례 귀족이 추방당한 것은 손에 꼽았고, 숙청당한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에렐림 공작이 마녀의 권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극우 정통파 마녀라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초강수를 두리라고는 모두가 예상치 못한 것이다.
데네브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했다.
“에렐림 공작, 게헨나의 평안과 영화(榮華)의 불씨에는 분명 역대 메리골드의 헌신 또한 포함 되어있을 터입니다. 방금하신 발언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은듯합니다. 처형을 논하고자한다면 적어도 재판 이후에 행해져야 할 것 입니다.”
제머나이 백작가와 아멜리아의 인연은 그다지 깊은 것이 못되지만 엄연히 안면을 트고 있는 마녀다.전후사정은 알 수 없어도 이렇게 갑작스레 숙청당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제머나이 백작의 발언에 동의합니다. 즉각 숙청은 너무 급진적인 해결책입니다.”
“본격적인 위해 요소는 판별나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차분히 분석을 거쳐 대응해도 늦지 않습니다.”
여러 마녀가 데네브의 말에 힘을 싣는다.
형편 좋은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마녀가 마녀를 죽이는 것은 단순히 마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과는 또 다르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다.
부정적인 반응 속에서도 데네브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 중 진리진명 학술회에 소속된 마녀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작은 흔들림 없는 차분한 눈빛으로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반대 의견을 경청했다.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가면 같은 표정이었다.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합당한 의견입니다. 다만 사태가 일각을 다투는 만큼 논의가 길어지기 전 현 사태에 대한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에렐림 공작의 손바닥 위에 커다란 환영체가 나타났다.
언뜻 홀로그램 스크린처럼 그것은 엉망이 되어가는 타로 타운의 정경을 비추고 있었다.
“상세 내역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학술회 부학회장이자 에렐림 공작의 심복인 코하브 백작이 나섰다.
“현 시점 타로 타운에 발발한 공간의 난수화의 경과 분석 및 향후 예측에 대해 간략히 브리핑하겠습니다.”
코하브 백작이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자 환영체에 재생되던 영상이 되감아진다.
이는 타로 타운 인근의 관측대에 설치되어 실시간으로 녹화된 영상으로 비단 당시 상황 뿐아니라 마법적 관측에 의한 계측값까지 표기해주고 있었다.
“관측구로 확일할 수 있는 사건 발발 시각은 0시 4분 35초. 수확제의 불꽃놀이가 끝나지 않았을 당시 아멜리아 메리골드 남작의 자성마법 ‘입자’가 살포되
기 시작합니다. 이 시점에서는 결정화되지 않은 미세한 입자였으며….”
넘어가는 화면.
아직 불똥이 채 사그라들지 않은 밤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장면이었다.
“0시 13분 33초. 본격적인 마력의 준동과 함께 비를 뿌리기 시작합니다. 선대 메리골드의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자기화된 마력 입자를 살포, 공간 장악에특화된 마법을 구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비에 닿은 공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죠.”
영상은 타로 타운의 중앙에서 시작해 점점 번져나가는 빗줄기는 타로 타운의 전역을 물들이고서야 확장을 멈추었다.
“이후 14분 20초. 1분이 되지 않는 시간에 타로 타운 전 지역이 그녀의 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상 현상이 발생합니다. 공간의 뒤틀림이죠.”
코하브의 설명대로 확장되던 마법은 부자연스럽게 삐걱이고 있었다.
“15분 4초.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으나. 밖으로 팽창하려는 힘과 그것을 억누르려는 힘이 뒤엉켜 마력의 중첩 공간을 이끌어냈고 그 결과가 난수화가 발생합니 다.”
여기까지는 특별한 보고 없이 여기 앉은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공간의 난수화가 흔히 관측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특이성 탓에 유명하니 말이다.
“공간의 난수화는 인체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체내에 존재하는 마력의 양은 없거나 미약하며 의식을 잃겠지만 유해하지 않죠‘아직까지 시민들에게 위해하지 않다’ 라는 저의 보고를 확인하셨으니 짐작하셨겠죠. 하지만 이쪽을 봐주십시오.”
수평으로 관측한 영상을 보여주던 입방체가 사라지고 또 다른 입방체가 나타났다.아예 높은 곳에 날아올라 촬영한 듯 부감이 보이는 풍경이었다.
“에렐림 공작께서 직접 관측하신 영상입니다.”
그 영상을 접한 마녀들 사이에서 웅성임이 심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 내려다본 광경은 이 현상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님을 역설하는 듯 했기 때문이다.
마치 블랙홀을 위에서 찍어낸 듯했다.
일그러진 타로 타운의 중심부에 가까워질 수록 휘감기는 검은 원이 존재한다.
그 중앙을 살피자면 이미 빛조차 빨아들이듯 어두컴컴해 안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0시 15분 4초를 기점으로 이상공간의 팽창 자체는 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하여 중심부에 다가갈수록 난수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소드 백작이 허망하다는 듯 펜을 던졌다.
열심히 계산하던 난수화 패턴의 해독키 계산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통상적으로 공간의 난수화는 모든 좌표에 균등하게 작용하지 않나요?. 한 번 펼쳐지면 존재와 부재만을 논할 수 있는 이원적 상태인데…. 안으로 갈수록 심화되다니….”
한 마녀가 모두의 의문을 대표로 표명했다.
그에 대신 답한 것은 코하브 백작이 아닌, 에렐림 공작이었다.
“맞습니다. 그것이 제가 다소 극단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공간의 난수화가 발생했을 뿐이라면 얼마든지 중도책이 있습니다.시간은 넉넉할 것이고 또한 이 소란도 불의의 사고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요.”
에렐림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저것은 일반적인 난수화된 공간이 아닙니다. 메리골드 남작은 난수화된 공간 속에서 자의로 마법을 펼치고 있으며 해당 영상에 촬영된 것은 그로 인한 공간 붕괴의 조짐입니다.
남작의 마법은 현시점에서도 느릿하게 범위를 넓혀가고 있으며 약 1시간 이후에는 타로 타운 전체를 뒤엎을 것입니다.
현재는 아슬아슬한 중첩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붕괴 범위가 확장할수록 장악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 시점이 되면 그녀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계까지 당겨진 고무줄의 한쪽을 놓는다면 벌어질 일은 자칫 게헨나 전체를 둘러싼 결계의 붕괴를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부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입밖으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침음을 삼키는 마녀가 있었고,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빗는 마녀도 있다.
“앞서 이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관측 과정에서 저는 두 가지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정체불명의 마법을 제지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허나 실패했습니다.
둘째로 붕괴의 중심축에 있는 남작에게 경고를 전했습니다. 응답은 없었습니다.
상기 두 번에 걸친 시도가 저의 중도책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렐림 공작은 서류 한 뭉텅이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결심을 굳힌 마지막 이유입니다. 최근 1년간 ‘문’을 통해 게헨나를 오간 출입국 관리소의 명부입니다. 남작이 현세로 나간 기록은 있지만 재입국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식 절차를 밟지 않은 백도어로 밀입국한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데네브를 비롯, 아멜리아의 처형을 꺼리던 이들은 느꼈다.적어도 절반 이상의 여론이 에렐림 공작의 쪽으로 기우는 것을 말이다.
분명 석연찮은 점도 있고 더 좋은 해결책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은 촉박했고, 당장 에렐림 공작 이상의 해결책을 내세우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주머니 차원으로서 절묘한 밸런스를 이루는 게헨나 내부에서 저런 공간의 붕괴와 침식이 일어난다면 공작의 말대로 최악의 참사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게헨나의 귀족이라함은 과거 도시의 변영과 발전에 지대한 공훈을 지닌 마녀를 뜻합니다. 많은 분이 제 의견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정을 분문하고 동포를 죽여야 한는 것은 무거운 일입니다.”
좁혀지는 의견 차이를 보며 공작은 쐐기를 박았다.
“얼마 전 예언기관에서 확답을 받았습니다. 케테르 공작은 이제 움직이지 않습니다. 과거 십 수년과 현 사태를 보며 다들 짐작하셨으리라 봅니다.”
케테르 공작.
그 이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마녀가 머릿속에 떠올리던 이름이었다.
스스로 정한 규칙에서 어긋남이 발생하며 가장 먼저 나섰던 그녀가 왜 아직까지도 잠잠할까.
세간에서는 이미 여러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케테르가 모종의 사유로 더는 움직일 수 없다는 소문.
허나 그것이 단순히 소문으로 남는 것과 에렐림 공작이라는 거물급가 공식 석상에서 확정짓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의미를 지닌다.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려는 회의장을 에렐림 공작이 단조로운 어조로, 힘주어 말하며 짓눌렀다.
“케테르 공작은 마녀 사회를 지탱하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체제가 무너졌습니다.
공적은 더욱 날뛸 것이며 추방자들 역시 동요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결단의 때입니다 .
마녀가 이룩해야 할 것은 마법적 혁신이지만, 그것은 안정과 통제라는 반석 위에 놓여야 합니다.
설령 케테르 공작이 부재하더라도 규율을 지켜낼 수 있음을 게헨나 내외로 보여야 합니다.그것이 마녀를 위한 길이며 게헨나를 위한 길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동포의 피를 손에 묻히는 일을 마다하신다면 제가 장두(狀頭)에 서겠습니다.”
강대한 발언권, 확고한 심증과 그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물증에 올곧은 명분이 조합됐다.
이곳에서 에렐림 공작에게 반대를 표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기형적으로 발생한 마법 사고는 마력원을 제거하면 정상화됩니다.
단, 해당 공간이 난수화된 공간인 점, 주위에 시민이 구류되어있는 점을 고려해 정밀 타격을 위한 계산에 들어갈 것입니다.
소요 예상 시간은 약 30분을 최후의 기회삼아 메리골드 남작에게 투항 권고를 보내겠습니다.”
반대는 없었다.
데네브는 즉시 언니 알비레오에게 전언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