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없고,
전하고 싶은 바를 전할 수 없다.
괴로운 일이었다.
외로운 일이었다.
어긋난 것을 바로 잡으려 했다.
클라라가 말할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또다시 버림받는 것이, 거부당하는 것이, 차디찬 외면의 시선을 받는 것이 두려웠다.
아멜리아는 차마 시우를 곧장 만나러 갈 수 없었다.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고 싶은 것처럼, 아니.
어쩌면 아예 어긋나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어설픈 각오와 두려운 맘을 부여잡고 게헨나를 배회했다.
배회라.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발을 붙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확실한 목적지를 두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횡보.
레노먼드 타운부터 덧없이 시작한 산책은 타로 타운에 접어들어서 끝을 맺었다.
시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옆에는 한 마녀가 있었다.
짙은 녹발과 민트빛 눈동자, 애교 넘치는 웃음을 지으며 시종일관 그의 옆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살가운 눈웃음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향한 몸짓엔 짙은 신뢰와 애정이 묻어나온다.
“아멜리아….”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본 클라라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멍하니 멈춰서 시간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서글펐고.
생각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욱신거리던 심장이 마침내 동사해버린 것처럼 뭉근한 따끔거림이 느껴질 뿐이다.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제머나이 백작가의 쌍둥이와 음란 행각을 벌이는 것을 엿보았을 때도.
그를 치유하기 위해 초청한 예빈 스미르나와 몸을 섞는 것을 보았을 때도 뭉근한 따끔거림은 있었다.
그러나 환부를 더듬듯 조금씩 따끔거림을 더듬어가다 보면 지금 이 감정의 근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때는 무지함이 있었다.
아멜리아는 사랑을 몰랐고, 인정하지 못했다.
그때는 희망이 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에게 사과할 수 있다는 한 줄기의 미래가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어떠한가?
현세에서 욕망의 마녀와 싸우던 시우를 마주했던 때와는 달랐다.
아멜리아가 시우와 함께 오두막에서 살아가던 무렵, 그에게 굉장히 자주 보았던 표정과 눈빛과 목소리가 이름 모를 마녀를 향한다.
빼앗겼다는 분함은 없다.
그것은 자신에겐 과분한 감정이다.
다만 이 세상이 두 사람의 것이라는 듯 흠뻑 빠져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빈틈이 없어 보여서.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관계의 증거인 듯하여서.
다리에 힘이 풀린다.
“아멜리아.”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한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침착하여 놀랐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자마자 괴사했던 심장이 녹아들어 가슴을 태우는 듯한 통증에 다시 놀란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괜찮아요.”
호흡이 가빠졌다.
균형감각이 ■무너진 것처럼 바닥이 출렁인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런 결말은 원하지 않았는데.
- 바스락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졌다.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두 번 접힌 쪽지였다.
아멜리아는 그것을 열어볼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이 시우의 마지막 이별 전언이라면 살생부의 의무를 등진 채 그를 다시금 위험에 빠뜨릴 것 같았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멜리아를 지지해주던 커다란 기둥이 빠질 것이 두려워 차마 펼쳐보지 못했다.
아멜리아는 그 쪽지로 손을 뻗었다.
실로 덧없는,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어쩌면 그가 이미 용서해 주었을 수도 있으니까.
너무 늦었더라도 지금은 어딘가에 매달릴 희망이 필요했으니까.
고작 두 번 접혀 있었을 뿐인데 그 어떤 엄중한 마법 결계보다 견고해 보였던 쪽지가 너무나도 쉽게 펼쳐진다.
쪽지의 내용은 아주 짧았고 글자보다는 종이의 여백이 많았다.
[나는 절대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에그 한 문장은 도망치던 아멜리아의 발목을 잡고 가장 어두운 곳까지 침잠한다.그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두른 릴리스가 아멜리아의 눈물을 닦는다.
“아멜리아, 아멜리아, 가엾은 아멜리아.”
« T9
“괜찮아, 넌 아무것도 잘못한 거 없어.”
아멜리아는 반응이 없었다
자신만이 아는 공간에 슈신을 유폐하기라도 한 것처럼 외부의 자극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_우우우우웅!
대신 그녀의 주변에 입자의 폭풍이 휘몰아칠 전조가 발생했다.
15 위계를 넘어선 마녀는 마법과 정신이 합일되는 경지에 오른다.
본능과 감정은 마력에 동화되며 위계가 높아질수록, 그 유착이 강해지는 것이다.
릴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이제는 애써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침내, 그녀 안에 씨를 뿌렸던 마법이 아멜리아의 붕괴와 더불어 낙인 구석구석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니까.
릴리스 스스로 평가하기에 부족하고 유치한 연출이었다.
고작 둘의 엇갈림을 유도하고, 쪽지를 슬쩍 수정했을 뿐이니.
그러나 저 혼자 부서져 가던 아멜리아에게 이 이상의 연출은 필요 없다.릴리스가 맡은 마녀는 아멜리아만이 아니다.
구태여 장인 정신을 발휘해 에너지를 소모할 여력도 없다.
괴로워요.
끝내고 싶어요.
슬퍼요.
절 내버려 둬요.
혼자면 되는 거에요.
후회하지 않아요.
전 괜찮아요.
릴리스의 귓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갈갈이 찢긴 감정의 파편.
비탄의 색이라기엔 요정의 빛무리처럼 아름다운 그것을 하나하나 어루만진다.
격렬한 감정은 느릿한 것보다 전환이 쉽다.
그것이 커다란 기쁨이건, 피를 토하는 분노건 속도가 붙은 감정이란 누군가 옆에서 슬쩍 떠미는 것만으로 완벽하게 궤도가 틀어진다.
“지금이라도 바꿀 수 있잖아.”
비겁의 마녀가 그랬고, 비앙카가 그랬고,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무수히 많은 마녀가 그랬다.아멜리아 정도의 미숙아가 버텨낼 수 있을 리 없다.
“이제는 그만 억누르자. 너만 희생하는 거 나는 마음이 아파서 더 볼 수가 없어.”
릴리스의 목소리에는 이미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격렬하게 회전하며 운동량을 더해가는 감정의 폭주를 조금씩 조금씩 몰아붙인다.
“힘들었잖아, 괴로웠잖아. 너 혼자만 고통스러웠잖아. 넌 이미 충분히 속죄를 끝냈어.”
-우우우웅!
저 멀리 폭죽처럼 터지는 불꽃놀이들.
그 사이로 미세한 입자들이 번지기 시작한다.
비가 내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눈물이 쏟아지듯 폭우가 몰아친다.
그 입자들은 범위를 넓히고, 넓히고, 넓혀 타로 타운 전체를 휩쓸었다.
과연 케테르가 자신의 검으로 삼으려고 할 만큼 아멜리아의 능력은 대단했다.
이 넓은 일대로 모조리 제 수중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으니.
“괴롭지? 분하지? 하지만 괜찮아. 내가 널 도와줄게. 네가 행복할 방법을 알려줄게.”
물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을 테지만.
릴리스는 슬쩍 손가락을 당겼다.
마치 꼭두각시를 움직이는 것처럼 아멜리아의 전신을 파고든 마력이 태동한다.
아멜리아는 멍한 눈빛으로 릴리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수심에 가득 찼던 하늘빛 눈동자가 텅 비어버린 허망한 구렁텅이로 느껴진다.
“행복…?”
“&&! 너에겐 힘이 있잖아. 네가 가져야 할 권리를 되찾아올 힘이.”
허술한 논리다.
이미 논리라고 보기도 어려운 궤변에 가깝다.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남녀 간의 마음이 단순히 힘의 논리로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슬픔이 가장 전환하기 쉬운 방향은 분노와 절규.
예로부터 부정적인 감정과 폭력성은 궤를 함께한다.
훗날 더 없이 후회하게 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응당하게 느껴질테지.
“손가락 한 번만 튕기면 되는 거잖아. 그거라면 그의 옆자리를 지켜낼 수 있어. 단둘이서 행복한 세상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거짓말과 궤변, 이뤄지지 않을 약속들로 가득한 사탕발림.
이미 릴리스의 독은 아멜리아를 제어를 끝냈다.
릴리스의 혀끝이 튕기는 한 마디마다 아멜리아의 마력이 더욱더 폭주하기 시작했다.
“너의 슬픔을, 분노를. 그에게도 보여줘.”
-우우우우우웅!
빗물이 맞닿은 곳곳에 피어나기 시작하는 새싹의 향연들.
새끼손톱만 한 꽃망울이 개화하면 모든 것은 무너진다.
이로서 릴리스는 목적을 쟁취하고, 케테르의 계획은 망가진다.
-딱!
홀린 듯 들어올린 아멜리아의 손가락이 공중에 비틀렸다.
아주 짧은 파동.
마력과 입자를 매개로 물결이 퍼지듯 흘러넘치는 그것은, 그녀의 통제하에 담긴 삼라만상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꽃이 피어날 때마다.
입자가 마력을 흡수해 더욱 큰 마력을 생산할 때마다.
릴리스의 얼굴에는 환희가 깃든다.
추락한다.
게헨나의 붕괴가 목전에 있다.
“...돼요….”
릴리스가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는 그때,
진동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릴리스의 광소도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주위를 훑는다.
거짓말처럼 고요해진 사위에 빗방울이 보인다.
저중력 공간에 들어선 것처럼 느릿하게 멈춰 선 빗물들이 빛을 받아 산란하고 있었다.
경악한 릴리스는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부서진 순간 릴리스의 자성마법 ‘속삭임’은 분명히 아멜리아의 몸을 잠식했다.이미 릴리스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안...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법 현상은 통상적인 고전역학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마법을 시행하는 것에는 관성이 적용된다.
달리던 열차를 급정지를 할 수 없는 것처럼, 이만한 대규모 마법을 멈춰 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멜리아는 릴리스의 달콤한 감언이설을 거절했다.
감정의 폭주를 주체하지 못해 발동한 마법을 제어하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했다.
무리하게 마법을 중지한 결과, 23 위계에 달하는 고위계 마법이 충돌했고 결과가 이것이다.
공간의 난수화.
본A 두규분의 마녀가 죽을 힘을 다해 사용한 마법이 부딪칠 때나 일어나는 현상을 혼자 일으킨 것이다.
“이럴 리가….
릴리스는 황망한 표정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통제는 지금도 존재한다.
릴리스가 쥔 목줄은 확실하게 아멜리아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멜….”
그것을 다시 쥐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릴리스는 제 살갗 아래에서 불룩거리는 새싹을 보았다.
조금만 더 팔을 뻗었더라면 팔부터 시작해 전신이 터져나갔겠지.
명백한 거부.
그것은 릴리스를 향한 거부임과 동시에.
세상 모두를 향한 거부였다.
“아하하.”
황망함도 잠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릴리스의 ‘속삭임’은 대상의 마법 성취와는 상관이 작용한다.
마음의 강도에 따라 효과가 일변하는 특이한 마법이다.
미숙아로만 보았던 아멜리아는 확실한 의지로 속삭임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녀를 과소평가했다고 밖에는 변명 삼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멜리아는 분명 릴리스의 통제를 거부했지만 여전히 폭주 상태다.
이 난수화된 공간이 계속 유지되는 것과 입자가 마법이 주위의 모든 것을 밀어내고 멈춰 세우는 것이 그 증거다.
아멜리아가 항상 그랬듯 주변을 모조리 밀어내며 또다시 혼자만의 공간에 틀어박히고 있었다.
세계의 규칙을 무시하고 왜곡되어가던 공간 속에서 자신만의 은신처를 새로운 마법으로 재창조한 것이다.점점 짙어지는 공간의 어긋남에 이미 눈앞에 아멜리아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좋아,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릴리스는 썩 싫지 않았다.과정이 어찌됐건 결과는 바뀌지 않을 테니까.
“네 발버둥을 보여줘 봐.”
마지막 말과 함께 짙은 어둠이 섬광처럼 릴리스를 덮치며 그녀를 공간 밖으로 튕겨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