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36화 (436/917)

1.

지루한 경험이라도 함께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추억이 되곤 한다.

생각보다 재미없었던 연극 역시 샤론과 함께 관람하는 것은 또 각별한 경험이었다.

두 사람은 레노먼드 타운을 떠나 타로 타운의 광장에 접어들었다.

수확제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은 해가 졌을 때부터.

길게 늘어진 땅거미가 첨탑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숨기자 커다란 노랫소리와 함께 광장 한가운데 모닥불에도 불이 붙었다.

오보에, 류트, 백파이프 등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이 토끼처럼 폴짝거리며 신나게 곡을 연주하면 술잔을 든 남자들이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뒤를따른다.

나이가 있는 아낙들은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천막 아래 주르륵 줄지을 때, 꽃다운 처녀들은 귀에 보리 이삭을 끼운 채 새침한 표정으로 청년들의 추파를걷어낸다.

흥겨운 분위기 속 헐거워지는 지갑을 노리는 길거리 장사꾼이 꽃이나 장식구 따위가 가득 담긴 판자를 들고 목청을 높이고,팔짱을 낀 남녀가 하늘까지 솟은 불길을 둘러싼 채 팔짱을 끼고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얼굴 찡그리는 이 하나 없이 모두가 만끽하는 축제는 밤하늘의 별을 끌어내려 대신 빛을 냈다.

“딴 따라라 딴딴.”

샤론은 딱 봐도 엄청 신나 보였다.

아》5그넘치느규체하지 못하고 발꿈치를 들썩이며 걷는 걸 보니 말이다.

귀에 쏙쏙 박히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시우에게 팔짱을 끼고 빙빙 돌기도 했다.

“엄청 좋구나?”

“응! 수확제가 10년 만인걸!”

게헨나에서 나고 자란 샤론인만큼 수확제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밖에 없었다.

그동안은 거액의 빚에 허덕이느라 축제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는데 이렇게 마음 편하게, 그것도 남자친구인 시우와 함께 축제를 만끽한다는 것이 믿기지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시우야, 우리 저거 마셔볼래?”

“뭐?”

“뱅 마리아니.”

더군다나 축제를 더욱 달아오르게 해주는 물건이 하나 있었으니….

뱅 마리아니라고 불리는 게헨나의 레드불이다.

제작법은 아주 단순하다.

맛있게 숙성된 와인에 코카잎을 넣고 가볍게 우려내면 끝.

코카잎에서 마약 성분만을 추출한 코카인과는 다르게 저렇게 생으로 우려내게 되면 중독성은 거의 사라지고 자양강장효과와 더불어 약간의 고양감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기호품이 된다.

실제로 타로 타운의 주점에서도 휴일에 한하여 판매되고 말이다.

“응? 한번 마셔보고 싶어!”

아무리 그래도 코카잎인데….

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샤론이 저렇게까지 원한다면 굳이 마다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자율방어가 있는 한 영체 자체가 약물 중독에는 면역이나 다름없고, 게헨나 산 뱅 마리아니는 중독성 자체도 높지 않으니 말이다.특별한 경험을 위해 아주 조금의 일탈이라고 생각하자.

“건배!”

은화를 몇 개 건네 사온 뒤 한 병씩 손에 쥐고 러브샷.

달콤한 포도향과 함께 꿀꺽꿀꺽 넘어가는 와인.

효과는?

솔직히 말해 거의 없었다.

그냥 알딸딸하게 취하고 조금 기운이 나는 기분이 끝이다.

하긴 다른 건 몰라도 마약만큼은 굉장히 엄격하게 관리하는 게헨나 시청이 위험한 물건이 나돌게 둘리는 없다.

“별거 없는데?”

“그러게.”

마주 보고 실없는 웃음을 짓는 두 사람은 이후로 축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가판대에 놓인 청동 장식품이나 유리 공예품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파는 매콤한 생강 쿠키를 반씩 나눠 먹기도 하고.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즐기는 축제의 풍취가 활기로 치환되어 혈관 곳곳에 흐르는 기분이었다.

발 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서 이 가판대 저 가판대를 옮겨가며 구경하자니 아직 12살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여자아이가 시우를 불렀다.

“신사분! 멋진 신사분!”

워낙에 시끌시끌 거리고 생소한 호칭이었던 지라 처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건지도 몰랐다.

소녀가 소매를 꾹꾹 잡아당길 무렵에야 ‘신사분’이라는 말이 시우를 향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두 사람.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발그레하게 변한 샤론은 별거 아닌 해프닝에도 깔깔 웃었다.

“시우야, 너 언제 신사 됐어?”

“놀리지 마, 무슨 일이니?”

쓴웃음을 머금고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묻는 시우.

주근깨가 빼곡한 뺨 위로 당돌한 눈빛이 흘러넘치는 소녀는 보란 듯이 제 손에 들린 꽃을 보여주며 말한다.

샤론의 모습을 보면 마녀임을 한눈에 알아봤을 텐데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다니.

여간내기가 아닌 아이다.

“여기 보시면 마녀님께 어울리는 멋진 꽃이 있답니다! 미녀의 마음을 얻는 건 용자라는 말이 있죠 지금 당장 선물하세요!”

“그래? 하나 사 볼까?”

“와! 예쁘네! 에헴, 거 예쁜 꽃으로 골라오거라. 돌쇠야.”

뭔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덩달아 신이 났는지 더욱 가열차게 앞 광고를 하는 소녀.

하나 사 줘야겠다.

가만 보면 다들 머리나 귀 뒤에 꽃 혹은 보리 이삭을 끼고 다니니 샤론에게도 어울리겠지.

“그래, 장미한 송이에 얼마니?”

시우는 웃음을 지으며 지갑을 뒤적였다.

제머나이 가문으로 지원이 끊겼지만 그래도 호스트바 알바 당시 답례로 받았던 돈이 조금 남아있다.

“자고로 선물이란, 선물 자체보다 그 선물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커다란지가 중요하답니다.”

“응?”

“0| 꽃은 평범한 꽃이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 아름다운 마녀님께 진상한다는 의미가 중요하죠.”

뭔가 말이 길어지는데?

아까부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샤론은 흥미진진한 눈으로 소녀와 시우의 흥정을 지켜보았다.뭐, 흥정이라기보다는 바가지를 쓰는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신사분이 보시기에 이 꽃이 마녀님의 머리를 어여쁘게 장식할 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어 보이시나요?”

쉽게 말해서 선물하고 싶은 마음만큼, 의미만큼 얹어서 알아서 값을 치러달라는 말.시우는 눈을 끔뻑이기만 하자 소녀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한다.

“한 송이에 2.5페니 정도면 그 뜨거운 애정을 절반이나마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헨나의 물가는 상당히 난해하지만, 장미 한 송이가 10000원 돈이라는 것은 폭리다.

그래도 하는 짓이 귀엽기도 하고 모처럼 축제니 기꺼이 소녀의 손에 남은 장미를 모두 사주기로 했다.

남은 장미를 다 팔아야 이 꼬맹이도 어디가서 놀지 않겠는가?

“그럼, 다 주렴. 거스름돈은 가지고.”

“네! 멋진 신사님! 지금 바로 줄기를 정리해 드릴게요! 저희 마을에서는 제가 제일 꽃 정리를 예브브게 하거든요!”

결국 장미 네 송이를 어마어마한 호갱가에 사게 된 시우.

소녀는 신이 난 듯 자신은 꽃을 따올 때 가장 커다랗고 탐스러운 것을 따온다는 둥, 마을 사람들도 다 자신에게 꽃을 사고 싶어 난리라는 둥 묻지도 않은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정말 감사해요! 예쁜 사랑 하세요!”

소녀가 떠나가자마자 참았던 폭소를 터뜨리는 샤론.

시우로서는 꼬마가 귀여워서 적당히 상술에 넘어가 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처음에 얼떨떨해하던 그의 모습이 너무 머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어떡해…. 너무 웃어서 눈물 나… 어떡해….”

아예 시우를 받침대 삼아 팔을 걸치고 흐느끼듯 웃음기를 떨치는 샤론.

“오랜만이네 이 서늘한 감각…. 타로 타운은 이런 곳이었지….”

“그래도 잘했어. 나누면서 꼬맹이가 엄청 똑 부러지네. 기특해 우리 멋진 신사분 신시우 씨.”

시우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돈이 아니지만 저 꼬맹이는 가족들과 화목한 식사를 더 맛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

밤이 깊고 자정에 가까워질수록 축제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마을 처녀 하나를 둘러싸고 몸싸움이 벌어진 남자 둘이 연행되는 사건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마저 축제의 일환으로 받아들였다.

수확제의 피날레를 말하자면 자정에 펼쳐지는 대규모의 불꽃놀이를 빼놓을 수 없다.

마법과 화약의 조화로 현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몽환적인 불꽃이 밤하늘을 수놓는데, 노예 시절 시우도 멍하니 구경하고는 했다.

광장은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심지어 복잡한 인파를 피해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나, 광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있는 시민도 있었다.

혀를 날름거리며 치솟던 모닥불도 지금은 모래에 덮이고, 가판대와 거리 곳곳을 밝히던 조명에도 가리게가 씌워졌다.다시금 별을 되찾은 밤하늘을 올려보며 사람들은 숨죽여 웅성거렸다.

“영화시작하기 전극장 같네.”

샤론의 표현이 딱 걸맞았다.

모두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그 시점.

-피이이이잉!

새된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처럼 불똥 하나가 하늘을 길게 쪼갠다.커튼이 갈라지듯 좌우로 펼쳐지는 총천연색의 불꽃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를 알렸다.

“와…. 다시 봐도 장관이네.”

일반적인 불꽃놀이와는 다르다.

폈다 사라지면 끝이 01fLi라 마법에 따라 정교하게 컨트롤 되어 여러 형태를 그리는 불꽃.

-펑! 펑! 펑!

눈송이를, 풍요를 기원하는 커다란 고래를, 보리 이삭을, 때로는 푸른 들판을.

대낮이 된 것처럼 밝아진 세상 속에서 짝을 찾은 커플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한다.

“그거 알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샤론 역시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확제 불꽃놀이 밑에서 키스하는 연인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대.”

별을 흩뿌리듯 흩어지는 형형색색의 불빛 속에서 샤론이 시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키스.

서로의 입술을 맞대고, 타액을 섞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행위.

주변 풍경이 워낙에 아름다운 탓일까?

마치 첫 키스를 할 때처럼 가슴이 뛴다.

샤론도 마찬가지인지 시우의 소매를 꾸욱 붙잡으며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달콤한 숨.

흩어진 불똥이 사그라지는 소리.

좋은 살 냄새.

아주 살짝 풍기는 와인향.

영원인 듯 찰나인 듯 순식간에 지나간 시간 속에 시우와 샤론은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마음에 뚫린 구멍으로 본심이 새어 나오듯 저도 모르게 읊조린다.

“샤론, 사랑해.”

그 말을 들은 샤론은 또다시 배시시 웃었다.

“비겁해,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다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렇게 행복해도 좋은 걸까? 싶은 시간.

죽는 그 순간이 되어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화려한 불의 꽃을 가로지르며.

비가.

내린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이 떨어지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 범위를 넓혀 수천에 달하는 인파와 타로 타운 전체를 아득하니 덮고 있다.

막바지에 다다른 불꽃놀이, 사람들이 부산스러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느닷없는 비 소식에 불쾌해 하는 기색은 없었다.

작은 소란은 추억거리로 삼아 넘길 정도로 축제에 심취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우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은 불길함을 느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슴을 옥죄는 듯한 불안함이었다.

지금은 영하다.

이 정도의 빗줄기라면 곧장 눈이 되어 흩어져야 마땅했다.

아니, 적어도 진눈깨비의 형태를 취해야 했다.

하지만이 비는….

“어 ?”

불꽃놀이를 통제하는 마법식 사이로 저며 드는 미세한 마력의 파동.통상적인 축제에서는 볼 수 없는 이변에 샤론도 이상함을 눈치챈다.

“시우야….”

안대를 벗고 하늘을 올려보는 시우의 눈에 뚜렷한 마법의 형태가 보였다.그리고 그 마력은 시우에게는 몹시 익숙한 것이었다.

왜냐면….

“아멜리아….”

그 패턴과 마력의 응조 패턴은 아멜리아의 자성마법이었으니까.

시우가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타로 타운은 쏟아지는 별처럼 흐르는 입자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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