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도 무지개 위에 설 수 없다.
홀로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할 힘을 지녔어도.
질서를 어지럽히는 공적을 숙청할 힘을 가졌어도.그것이 완벽으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내면에는 자신만의 자가당착을 지닌다.
릴리스는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이용하는 법 또한 알고 있었다.
엉키고 엉켜 보이지 않는 모순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길게 빼낸다.
그것을 잡고 돌팔매질을 하듯 붕붕 휘두른다.
릴리스가 결정하는 것은 줄의 길이와 줄을 놓는 타이밍.
그 뒤로 벌어지는 모든 혼란의 결과물은 신이 던지는 주사위에 의해 결정될 뿐.
팽팽하게 회전하는 끈이 벌의 날갯짓처럼 귓가를 맴돌 때면 항상 고민에 빠지고는 한다.
지금일까?
언제 놓으면 가장 화려한 축제가 펼쳐질까?
누군가 공들여 쌓아놓은 도미노를 망가뜨릴 때처럼.
앞으로 펼쳐질 혼돈과 무질서를 생각하자면 입가에 웃음을 머금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
“케테르.
케테르 공작이라니 거창하기도 하지.
릴리스는 일그러진 제 거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릴리스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내팽개치고, 유기했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질서의 망령.
케테르는 실패했다.
그 사실이 비릿한 조소와 함께 가슴을 떨게 했다.
“너 역시 무지개 위에 설 수 없었구나.”
릴리스는 케테르가 준비한 카드 중 하나를 빼앗아 쥐었다.
그녀가 쌓아올린 ‘질서’의 심장, 마녀의 도시 게헨나.
정성껏 안배했던 준비물이 폭탄이 되어 품 안으로 돌아온다면 그 곤혹스러움은 어느 정도 일까.
클라라는 자꾸만 번지려는 웃음을 억누르며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좀 더 표정관리에 신경써야 할 때이다.
아멜리아는 클라라를 신뢰하지만 본디 의심암귀란 작은 단서가 모여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결정했어?”
“…네.”
“그래! 잘 생각했어! 우중충하게 틀어박혀 봤자 우울할 뿐이라니까.”
오늘은 수확제.
클라라는 아멜리아에게 외출을 권했다.
시우와 재회한 이후 며칠간, 아멜리아는 줄곧 멍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우울한 상념과 회한, 지금껏 품었던 기대가 어긋난 절망 속에서 마치 자폐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외부의 모든 것을 밀어냈다.
단, 클라라를 제외하고.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클라라는 협력적인 조력자 포지션을 취해왔다.
아멜리아가 가장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태도를 유지하고, 종국에는 그녀의 몸속의 자율방어를 해제하고 낙인 속에 마력으로 위장한 자성마법을 흘려 넣었다.
아멜리아의 세계는 좁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자아와 대인 능력이 차가운 언행 탓에 쉽사리 드러나지 않을 뿐.
반쯤 미쳐 있었던 비겁의 마녀나 간사하기 짝이 없던 욕망의 마녀조차 요리해냈던 릴리스에게는 참으로 먹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갑작스레 조용해진 아멜리아의 모습에 클라라는 평소보다 살짝 높은 어조로 물었다.
단순히 수확제를 둘러보기 위한 제안이었다면 아멜리아는 이 정도로 주춤거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녀가 지금 두려운 듯 어깨를 감싸는 것은, 이 외출이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고 했던 건 너잖아.”
“맞아요…. 그랬었죠….”
이 외출의 진정한 목적은 아멜리아의 짝사랑 신시우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이다.
‘속삭임’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대상에게 공감해야 한다.
아멜리아가 어떤 심리 도식을 거쳐 결과를 냈는지, 어떤 과거를 거쳐 현재 상태에 이르렀는지를 낱낱이 이해해야 한다.
클라라의 손안에는 아멜리아의 사고 패턴이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와류 속에서 결정되는 사고와 감정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다.
만약 릴리스가 클라라의 외형을 벗어던지고 아멜리아의 흉내를 낸다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깊은 이해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결코 비웃어서는 안 되겠지만, 아멜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실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극한의 회피 기제를 지니고 있을 줄이야.
아멜리아는 이별 당시 시우가 남겼던 쪽지조차, 스승이 남긴 유언장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유아적인 방어기제다.
“서로 오해가 생겼다면 직접 부딪쳐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아.”
“알아요, 클라라. 많이 말해주었잖아요.”
하지만 그래서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개인 변화란 무릇 외부의 상황에서 촉발되기 마련이다.
클라라는 시간을 들여 아멜리아를 설득했다.
친구의 진심 어린 충고라는 가면을 쓰고, 그녀의 무의식에 직접 간섭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아멜리아의 심상 저변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또다시 홀로 틀어박히려는 그녀가 제 발로 시우를 만나러 갈 수 있게 해주었다.
희망을 품는 것은 중요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만 그 낙차가 커다란 법이니.
물론 그녀가 직접 신시우를 만나 대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
클라라는 처음 새장 밖으로 나선 새처럼 불안해하는 아멜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꼭잘 될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항상 하는 말이지만…. 정말 고마워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친구끼리는 돕는 거야.”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 낸 아멜리아와 시우의 재회.
그 재회는 반드시 최악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하다.
2.
“하아, 망했네 망했어. 진짜 세상은 날 왜 이렇게 못살게구냐….”
샤론은 죽상이 되어 입을 삐죽거렸다.
협의회에서 수확제 둘째 날을 배정받은 샤론.
특별한 날 특별한 데이트를 위해 특별한 섹스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근히 변태인 시우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다.
쌍둥이가 러브러브젠가를 준비하는 걸 보고 질세라 이것저것 구상하던 중.
혼자서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는 티페레트 공작님을 도왔다.
티페레트 공작님은 바니걸 의상을 준비했고, 그때 샤론도 함께 필살기를 주문했다.
현세의 이기, 13종 성인용품 패키지가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오늘 오전 도착 예정이던 밀수선이 해상사고에 휘말려 그대로 현세의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는 것.딜도며 수갑 따위는 주인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해저의 히든 아이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이가 없네 진짜….”
일정이 촉박하긴 해도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줄 알았는데.설마설마 배가 전복됐다는 거대한 해프닝으로 무산될 줄이야.체질로 봐도 좋을 불운한 숙명에 헛웃음이 나오는 샤론이었다.
“하… 기대 엄청했는데….
카탈로그엔 꽤 무시무시해 보이는 도구들도 있었지만 흥미가 생겼었다.
색다른 플레이는 커플 간 관계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마녀사회 최고의 인기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우의 옆자리를 꿰차기 위해서는 어중간한 각오와 준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탄을 해도 달리 뭘 준비할 시간이 없다.
보수적인 마녀가 많은 게헨나에서 어른의 장난감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창피한 소문이 나는 것은 스승님께 죄스러운 일이다.
결국 화장이나 최대한 예쁘게 하고 옷을 차려입은 샤론은 타로 타운의 벤치에 앉아 시우를 기다렸다.
3.
시우에게 수확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축제 분위기가 된 타로 타운의 광장이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수확제라 해도 그다지 변화가 없는 편이고, 그나마 화려하기로 소문난 말쿠트 갤러리는 노예 신분으로 맘껏 발을 들일 수 있는 장소가아니었다.
따라서 타카쇼와 함께 자연스럽게 찾는 장소는 흰고래 주점이었고 마른 육포에 생맥주 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이정도면용 됐네.”
사람이 자신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는 ‘연휴 혹은 특별한 날 얼마나 멋진 하루를 보내는가?’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 점에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게헨나의 셋밖에 없는 공작님인 스승님과 행복한 하루를 보냈고, 내일은 제머나이 백작가의 견습마녀 오 자매와 함께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또 오늘은 예전의 시우였다면 언감생심 말을 걸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샤론과 데이트 약속.
객관적으로 봐도 과분한 행복이라는 생각뿐이다.
모든 축제가 그렇듯 피크 타임은 저녁부터다.
아직 막 정오를 넘긴 시간인지라 타로 타운의 광장은 그다지 북적거리지 않았다.
지난밤 흥성거림의 반동인 것처럼 제각기 숙취와 씨름을 하며 연인과 가족과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다.
물론 날이 어둑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려하게 부활할 테지만 말이다.
잠시 걷다보니 약속 장소 근처 벤치에 앉아 있는 샤론이 보였다.발소리를 죽이고 뒤로 돌아갔다.
예전에 종종 하던 장난처럼 깜짝 놀라게 해줄 심산이다.
“이제 안 당하거든?”
그녀의 뒤로 잠입에 성공했을 무렵 휙 고개를 뒤로 젖힌 샤론이 시우와 눈을 마주했다.분명 생각에 잠겨있는 거로 보였는데 귀신같이 알아차리다니.
“내가 바본 줄 알아? 했던 거 맨날 하고.”
“어떻게 알았어?”
샤론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기에 그대로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샤론과의 인사는 어지간하면 뽀뽀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냄새는 못 숨기지. 내가 몇 번을 맡았는데 말야.”
“그런 것치고는 종종 당하던데.”
실속 없이 알콩달콩 나누는 대화.
샤론에게는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첫인상은 기 센 길고양이 같은 아가씨였는데 말이다.
“짠! 어때? 오늘 좀 꾸몄는데.”
샤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옷차림을 보여주었다.
평소 아무렇게나 늘어뜨렸던 머리가 공주님처럼 번 헤드 형태로 올려져 있다.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것 같은 나비핀과 귀걸이가 한적한 오후의 햇살에 반짝이고, 따뜻한 겨울 코트와 목도리는 잠깐 민간 시찰을 나온 공주님이라 해도믿을 정도로 우아했다.
더군다나 두꺼운 옷을 더욱 부피감 있게 밀어 올려주는 미드의 영향력이란….
몇 달을 매일 같이 집에서 봤었는데도 늘 새롭고 짜릿한 샤론의 미모.
예쁘긴 진짜 더럽게 예쁘다.
“화장도 했어?”
“뭐야! 왜 이렇게 영혼 없어!”
“너무 예뻐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거 비싼 옷이거든? 더 칭찬해.”
화내는 척을 해도 저렇게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면 누가 겁을 먹을까 싶다.
샤론은 총총 걸어오더니 꼭 안겼다.
부드러운 살내음과 동시에 퍼지는 포근함.
샤론은 시우에게 제 체취를 묻히겠다는 양 이리저리 머리를 비비며 장난을 쳤다.
“오늘 데이트비는 이 누님이 다 낼 거니까. 시우는 몸만 와.”
“뭐야 그래도 돼?”
“그럼~ 내가 너랑 같이 살 때 받아먹은 게 얼만데. 우리 같이 갤러리로 쇼핑가자 얼마 전에 월급 들어왔거든.”
샤론은 애교부리는 강아지처럼 시우에게 달라붙었다.
평소에도 찰싹 달라붙는 스킨십을 선호하는 샤론이지만, 오늘은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만약 샤론에게 꼬리가 있더라면 붕붕 좌우로 힘껏 흔들렸을 것처럼 들뜬 모습을 보며, 말쿠트 갤러리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