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30화 (430/917)

#430

1.

스승님은 한참이나 라피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옆에서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이상 엿듣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여 살짝 거리를 벌린 시우.

한참이나 울고 웃던 엘로아는 벌겋게 변한 눈으로 시우에게 돌아왔다.

“이리와 보겠나?”

“괜찮으세요?”

“괜찮으니 이리오게. 라피에게도 소개를 해주고 싶으니.”

엘로아는 먹먹한 목소리로 시우의 손목을 잡아끌며 소매로 쓱쓱 눈물을 닦아내었다.

괜히 뻣뻣하게 긴장해 묘비 앞에선 시우.

엘로아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더니 라피에게 시우를 보였다.

“라피, 이 사람이란다.”

시우를 옆에 둔 채 엘로아는 열심히 그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믿어지느냐? 자성마법을 지니고 있는데도 남자란다. 또 그 성취는 어찌나 빠르고 놀라운지 예전 네 모습을 보는 듯하더구나.”“조금 어리버리하고, 말도 멋들어지게 못하는 데다가, 욕심은 많아서 온갖 마녀를 다 꼬시는 바람둥이이지만….”“지금은 누구보다 믿을 수 있고, 의지가 되는…. 사람이란다.”

신나는 듯한 어조로 시우를 칭찬하다 결국 다시 울먹임으로 돌아간 목소리.간신히 쥐어짜 내는 그 목소리로 라피에게 인사를 끝냈다.

“그러니까 걱정 너무 하지 말고. 편히 쉬고 있으렴.”

시우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었고 엘로아는 시우의 품에 파묻혀 한참이나 흐느꼈다.

2.

“이제 조금 괜찮으신가요?”

눈물범벅이 된 엘로아의 얼굴.

사실 그녀는 이전에 몇 번이고 라피의 묘지를 찾아 왔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속이 풀릴 정도로 펑펑 울음을 터뜨린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목이 메고, 가슴이 떨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껴도.

눈물만큼은 흐르지 않았으니까.

눈물을 막아내던 것은 아직 매듭을 짓지 못한 죄책감이었고,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나날들에 대한 회한이었다.

엘로아는 오늘 밤 100년의 세월 동안 이어지던 후회와 슬픔이 예쁜 구슬이 되어 정원 위로 흩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것 역시.

지금은 시우가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못난 모습을 보였네.”

엘로아는 미소를 지으며 어쩐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시우를 올려보았다.

시우의 눈 주위가 빨갛다.

담배를 피우며 엘로아를 기다리는 동안 혼자 울적해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자기 일이 아님에도 기꺼이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나의 제자, 나의 사랑, 나의 운명.

“그럴 리가요. 이런 소중한 장소에 함께 오게 해주셔서 감사해요. 스승님.”

모처럼의 수확제이다.

오늘이 지나면 한동안은 시우의 얼굴을 보기 힘들 것이다.

근례 현세에서 일어나는 겁난과 술렁이는 소요는 하루 이틀 만에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시간이라면 함께 웃는 채로 보내고 싶다.엘로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우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이후 엘로아와 시우는 한참 동안 정원을 돌며 주위를 구경했다.

게헨나의 전망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방이 탁 트인 부감을 바라보며, 흘러갔던 추억들을 나눈다.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부끄럽지만 요리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서 말일세.”

“다음에도 또 해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그대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해줄 것이야.”

엘로아가 시우를 에아로 오인해 공격했던 첫 만남, 함께 수련하게 되었던 일, 엘로아가 요리를 대접해 주었던 일, 함께 술을 홀짝이던 매일 밤, 비겁의 마녀의 이야기 등등.

특별한 날이지만 특별한 대화랄 것은 없었다.

수련이 끝난 이후 시우와 종종 제머나이 저택의 호젓한 숲길을 걸을 때면 도란도란 잡담했던 것처럼.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상관없을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행복한 것은 이 손이 시우와 굳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겠지.그것만으로 발걸음이 가볍고, 가슴이 쿵쿵 뛴다.

“슬슬 가볼 곳이 있네.”

“이거 뭔가 죄송스러운데요? 원래 데이트 코스는 남자가 준비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미안할 것 뭐 있겠는가? 염려 말게.”

사실 시우는 엘로아와 함께 말쿠트 갤러리로 향해 걸어 다닐 심산이었다.

아케이드 상점가의 구조는 수확제의 장식품으로 꾸미기에 아주 제격이었고 사전 답사 결과 굉장히 화려하게 치장됐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엘로아가 꼼꼼하게 준비한 것을 보니 그녀에게 어울려주고 싶었다.

“레노먼드 타운에 아르카나 빌리지라네.”

“네, 모시겠습니다.”

1.

본디 티페레트 공작가는 부족하지 않은 부를 자랑하는 가문이었다.

지금은 제머나이 가문이 인수한 멘델 구릉의 포도밭을 비롯 게헨나의 비옥한 토지는 전부 티페레트 가의 소유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엘로아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위치포인트라는 자선 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한 바 변변한 돈이 없었다.

단 그녀의 인품과 업적으로 호의를 표하는 마녀는 대단히 많았고 공식적인 후원자만 두 자릿수를 넘어가니 과거 샤론처럼 눈물겨운 빈궁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다.

엘로아는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후원자의 호의를 받지 않았다.

성품 자체가 청렴하고 제 일이 남에게 자랑할 만한 일이라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숙소 제공을 받아들인 것도 지금껏 엘로아가 제머나이 백작가에 제공한 아티팩트의 대가로 받은 것이지, 만약 그런 인연이 없었다면초대를 거절했겠지.

하지만 오늘만큼은 수아 지부장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우의 곁에는 언제나 여자로 시끌시끌 거리는 만큼 그를 독점할 수 있는 이 밤은 귀하다.

거기에 괜스레 마음마저 들뜨는 수확제의 밤이라면 단둘이 있고 싶었다.

레노먼드 타운의 아르카나 빌리지.

이름을 들으면 알겠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기준으로 삼자면 남동쪽에 있는 저택단지이다.

제머나이 백작가나 예소드 백작가 같은 대저택보다는 쌍둥이의 전초기지에 가까운 타운 하우스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곳저곳에 서 있었다.

“여기 오는 건 처음이네요.”

“그런가?”

노예 시절에는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던 복마전이었고, 되돌아온 이후에는 이곳에 아는 마녀가 없어 딱히 찾아올 일이없었고.

아무튼 온갖 타운에 명소가 넘치는 게헨나 내에서는 꽤 수수한 곳이었다.

볼거리라고는 아르카나 빌리지 면적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작은 호수뿐.

그래도 제각기 수확제에 맞춰 개성을 뽐내는 저택과 무겁게 눈을 짊어진 수삼나무 길은 고즈넉한 정취와 고요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중 엘로아가 인도한 저택은 아마 아르카나 빌리지에서 가장 소박한, 저택이라는 이름이 과분하게 느껴지는 붉은 벽돌집이었다.담벼락 대신 서 있는 울타리를 거쳐 정문으로 들어섰다.

상대적으로 아기자기한 외관에 비해 실내는 구석진 곳을 훑어도 먼지 한 톨 묻어나오지 않을 만큼 정갈했다.

신발에 묻은 눈을 탈탈 털고 뽀송뽀송한 털 실내화로 갈아 신은 두 사람.

“여기도 예쁘네요.”

“조용하고 좋은 곳이지. 가장 좋은 점은 우리 둘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시우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엘로아는 웃었다.

단란해 보이기는 해도 이 자체는 그런 감탄사가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 역시 공중 정원처럼 엘로아에게 소중한 공간일까 겉치레를 입에 담는 그의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위층으로 가면 아늑한 방이 있다네. 위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간단한 안주를 준비할 테니 함께 대작이나 합세.”

“네? 아닙니다. 저도 준비를 돕겠습니다.”

스승님이 일하는데 상전처럼 가만히 앉아있을 순 없다.

시우는 팔을 걷어붙이고 그녀를 도우려 했으나 꽤 강렬하게 제지당했다.

“아닐세. 꼭 절대로 1층에 내려오지 말고 위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게나.”

그렇게 말한 엘로아는 분홍머리를 꼬리처럼 살랑이며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2.

“흐... ”= .

엘로아가 신신당부한 대로 2층에 먼저 자리 잡은 시우.

방의 구조는 꽤 단순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곧장 보이는 문.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곧장 보이는 소파 하나, 침대 하나, 책장 하나.

다락 형태를 방으로 활용하는 느낌인지라 천장은 비스듬했고 넓이는 1층보다 좁았다.

제머나이 저택 침대 아래 깔린 러그 한 장이면 방 전체를 커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아무튼 부드러운 양털 카펫에 발을 놓고 소파에 걸터앉은 시우.

“괜히 긴장되네.”

평생의 동반자가 오른손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시우라면 이 분위기상 다음 전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해쉬태그 #수확제 #달밤 #단둘이 #술과 함께 인데 이걸 어떻게 착각하겠는가.

문제는 맨 정신으로는 한번도 스승님과 진득한 남녀교제를 나눈 적이 없다는 것이다.

첫 경험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기억을 되찾은 이후로도 키스 정도는 종종 나누었지만 엘로아가 먼저 그 이상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엘로아의 고뇌를 알고 있는 시우로서도 선뜻 제안한 적 없었고 말이다.

그래도 한 동안 못 보게 되는 만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들어가겠네.”

이런저런 생각 끝에 그래도 그간의 짬밥으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자 마음먹었을 무렵.술상을 받으려 일어난 시우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빼꼼 열린 방문 너머 지엄하신 스승님은 어디 가고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하얀 살결의 절반 이상이 보이는 노출도 높은 레오타드, 몰랑몰랑해 보이는 가슴골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적당히 탄력 넘치는 허벅지가 힐탓에 도드라지고, 가터벨트에서 연결된 끈이 살포시 살을 누르는 광경은 관능 그 자체.

시우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엘로아는 얼굴을 붉게 물든 인 채 술병과 잔, 그리고 치즈가 놓인 트레이를 바라보고 있다.

- 달달달달

부끄러움과 긴장 탓에 달달 떨리며 소리를 내는 트레이.

엘로아는 1층에 미리 복장을 준비해놓고 술상을 준비하는 겸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깜짝 토끼 의상으로 시우를 놀라게 해주고 민망한 분위기를 애교로 넘어가기 위해 준비한 대사도 있었다.

‘오늘만큼 나는 시우를 위한 토끼라네’.

겨우 한 줄임에도 까먹지 않기 위해 달달 외운 대사.

하지만 막상 시우 앞에 서자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시우가 이 주책없는 옷차림을 보고 타박하지 않을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더라도, 속된 말로 발정 났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보수적인 엘로아로서는 도저히 시우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것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다.

엘로아는 자꾸만 눈을 감아 현실도피 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눈을 부릅뜨고 그를 바라보며 외친다.

준비했던 대사를, 그에게 전하고 싶던 마음을.

“나, 나는 발정 난 토끼라네…!”

그리고 곧장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엘로아.

속마음과 준비했던 대사가 요상하게 배합되며 당당한 변태 선언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 아니…! 나는 시우를 위한 발정 난 토끼라네!”“아니아니…! 나는… 토끼라네…. 오늘만큼….”

연이은 송구 실수 끝에 이도 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 그야말로 대참사.

싸늘한 적막이 흐르고 엘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팔랑팔랑 서 있던 토끼 귀 리본이 시무룩하게 늘어진다.

망했다.

모처럼 샤론 양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것인데.

이래서야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엘로아는 주섬주섬 변명을 주워섬겼다.

“이, 이렇게하면… 그대가 기뻐해 줄 것 같아서…. 역시 흉물스러운가?”

“아뇨 스승님 전혀요.”

“아닐세, £고 있네. 이런 옷차림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지…. 머리카락 색도 이상하고, 키도 작고….”그때.

엘로아가 들고 있던 술병이 우당탕 바닥을 뒹굴었다.

시우가 앞뒤 보지 않고 엘로아를 와락 끌어안은 탓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트레이가 바닥을 뒹군 것이다.

“스승님, 정말 감사해요.”“제가 본 스승님 모습 중에 제일 귀엽고 예뻐요.”

수렁까지 처박힐 뻔했던 엘로아의 마음이 그의 칭찬 한마디에 날개가 돋친 듯 두둥실 떠오른다.

“...정말인가?”

주인이 나간사이 물병을 깨뜨린 강아지의 표정으로 힐끗 시우를 올려보는 엘로아의 물음에 대한 시우의 대답은.허리를 거칠게 움켜잡는 손과 진하디진한 키스였다.

갓지은밥 님이 그려주신 엘로아 티페레트 바니걸 스킨입니다

본래 3장 한 번에 공개하려 했으나 기다리시는 분이 많아 선공개합니다

리^^^^^^^^丁昌丁^^^^^^^^^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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