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1.
게헨나의 가장 큰 축제를 꼽자면 마녀도 시민도 심지어 노예까지도 입을 모을,크리스마스를 대신하는 수확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거의 변함 없이 유지된 게헨나도 12월의 셋째 주 월요일 저녁부터 사흘간 화려하게 탈바꿈한다.모두가 제 업무를 내려놓고 골방에 틀어박힌 마녀까지 뛰쳐나와 흥겹게 어울린다.
시기에 맞춰 제머나이 백작가의 저택도 수확제에 맞춰 새 단장을 하고 있었다.
복도를 장식한 벽 트리와 첫눈처럼 새하얗게 탈바꿈한 카펫과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빛나게 된 촛대.
마당에는 커다란 전나무가 트리처럼 세워졌고, 알록달록 마력수로 만들어낸 등불 장식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 외에 은으로 된 작은 종과 지팡이 등의 오너먼트가 등불을 반사하며 화려한 경관을 연출했다.
호사스럽기로 유명한 제머나이 저트백이 거기서 그칠 리 없다.
메인 갤러리는 풍요로운 수확에 감사하는 짚단 모형과 각종 열매 소품들이 전시되며, 커다란 수사슴의 박제가 수레를 끌고 있는 모형도 장식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요란스럽기만 한 잡동사니처럼 보일 소품이 탁월한 미적 감각으로 줄지어져 있는 것이다.
“이야, 잘 꾸며놨다.”
시우는 그것들을 감상하며 약속 장소로 걸었다.
오늘 저녁.
시우는 쌍둥이와 샤론, 스승님과 제머나이 백작까지 다 함께 만찬을 즐겼다.
이제껏 백작가에서 대접받았던 만찬은 언제나 훌륭했지만, 오늘만큼 입에 촥촥 감겼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오랜 시간 기름과 버터를 끼얹어 가며 구운 칠면조를 크랜베리 잼에 곁들여 먹는 것을 메인으로 육해공을 가리지 않는 희귀 식재료의 총출동.
파인 다이닝에 나올 법한 맛을 알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진미가 아닌, 서민 입맛인 시우에게도 친숙하고 직관적인 맛이었다.
이후에는 꼬냑을 곁들여 다 같이 벽난로에 모여 앉아 화목한 시간을 보낸 뒤.
개별 데이트 시간이 찾아왔다.
아무래도 스승님, 샤론, 쌍둥이 순으로 하루하루 수확제의 일정이 예약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 엘로아는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라는 시간을 받았고 말이다.
당사자를 빼놓고 한 협의지만 안 그래도 네 여자에게 켕기는 것이 많은 시우가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기꺼운 마음으로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약속장소는 제머나이 백작가의 분수대 앞.
이 저택은 분수도 하나둘이 아니어서 자가 게이트 근처 정원에 있는 분수대라는 구체적인 약속 장소까지 정해야 했다.
그래도 데이트겠다. 근사하게 옷까지 차려입은 시우가 도착했을 때.
달빛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하늘을 올려보는 스승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분홍빛의 머리를 곱게 올려 묶은 그녀는 시우와 눈을 마주치고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왔는가?”
너무 기다리게 한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나.”
“그냥 함께 나오셨어도 됐을 텐데요.”입 밖으로 꺼내면서도 살짝 우스운 말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기 전까지 응접실에서 다 같이 있었는데 말이다.
시우는 타박타박 걸어 그녀의 옆에 섰다.
“기분이라도 내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함께 약속한 장소, 약속한 시각에 만나는 것 역시 의미가 있으니 말일세.”
그가 옆에 다가서자 갑자기 다소곳한 자세로 변하는 엘로아.
시우와 서로 마음을 주고받게 된 이후 단둘이 데이트에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비록 둘이 함께한 시간은 길었고 몸까지 섞은 관계라지만, 정식으로 사제관계를 넘어 연인 관계가 된 이후로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의식되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도 쑥스럽군.”
엘로아는 담비 목도리에 턱을 묶으며 미소를 숨겼다.
하지만 예쁘게 휘어있는 눈꼬리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자꾸 들었나 놨다 하는 발꿈치도 기대감의 증거였고 말이다.
“커흠….”
언제나 위엄 넘치던 스승님이 생전 첫 데이트를 하게 된 소녀처럼 들뜬 모습을 보고 있자니.괜히 시우도 멋쩍어진다.
그렇게 근사한 코스는 달리 짜놓지 않았는데 잘 에스코트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그럼….”
“그럼….”
잠깐의 어색한 침묵 속 정적을 타파하고자 동시에 나온 말.
“그대가 먼저 말하게나.”
“스승님 먼저 말씀하세요.”
멈칫했던 두 사람이 뱉은 말까지 완전히 똑같았기에 또다시 묘한 침묵이 서렸다.먼저 웃음을 보인 것은 엘로아였다.
시우도 뒤늦게 웃으며 다소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이완된다.
“연인이 단둘이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데이트라고 정의한다면, 그대와 데이트는 이번이 처음이로군.”
“그러게요, 정작 함께 지낸 시간을 꽤 길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더욱 하나하나 해보고 싶다네. 그대의 연인으로서 부탁 하나 해도 되겠는가?”
“맡겨만 주시죠.”
엘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참을 우물쭈물 거렸다.그리고 몹시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손을… 잡아도 되겠는가?”« 99
그렇게 묻는 엘로아의 모습은 상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대답과 팔을 내밀어 손을 잡는 것도 잊을 만큼.
엘로아는 조심스레 시우의 손을 두 손으로 쥐었다.
서로의 체격 차이만큼이나 손 크기 차이도 꽤 크다.
조심스레 시우의 손을 매만지던 엘로아는 손가락 하나하나가 얽히게끔 살며시 깍지를 끼고 제 뺨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항상 그대와 이렇게 손을 잡고 걸어보고 싶었다네.”
고작 그것만으로 너무 행복한 듯 녹아내리는 듯한 웃음을 보여주는 스승님.
“겨우소원을 이뤄보겠군.”“따라 오겠나? 그대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네.”
그렇게 손을 단단히 맞잡은 두 사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2.
게헨나의 정중앙에 위치한 아르스 마그나 타운은 지리적 위치 탓에 그다지 넓지 않다.
전체 면적을 50% 넘게 차지하고 있는 레바나 대욕장을 제외한다면 타로타운의 4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작은 크기.
플로라 양장점 등이 위치한 시가지에서 북서쪽으로 쭉 나아가다 보면 게헨나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 중 하나가 나온다.
공중 정원
위치포인트의 설립 및 유지를 위해 모든 재산을 처분한 티페레트 공작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팔지 않은 유일한 정원이었다.
지금은 누구의 출입도 허가하지 않는 공중 정원은 하늘을 향해 나선으로 뻗은 유리계단과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절도 잊은 채 피어난 꽃들은 별을 향해 기도를 올리듯 살랑였고, 겨울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산들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손을 맞잡은 채 아찔한 유리 계단을 밟아 정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달빛을 조명 삼아 한가로이 정원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전망대처럼 높이 뻗은 정원에서는 저 멀리 흥청이며 수확제를 맞이하는 타로타운도 보였고, 영엄한 안개를 휘감은 채 우뚝 서 있는 영산도 보인다.
마치 환상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게헨나는 알면 알수록 예쁜 곳이 넘치네요. 정말 대단해요.”
“후후, 맘껏 구경하게나. 그대에게는 특별히 관람료를 면제해 줄 테니.”
온갖 신비스러운 풍경에 익숙해졌던 시우지만, 하늘에 가장 가깝게 맞닿은 정원만큼 아름다운 곳은 본 적 없다 확신할 수 있었다.처음 맞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놓지 않은 손을 꼼지락거리던 엘로아가 말했다.
“시우, 나는 조만간 먼 여행을 떠나게 될 걸세.”
“무슨 말씀이신가요?”
“케테르 공작의 부재로 공적들로 인한 혼란이 예상되는 바네. 아마도 당분간 공적 토벌에힘을 쏟아야 할 것 같네.”
날이 날이고 장소가 장소인 만큼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려 했던 시우다.
갑자기 시작된 스승님의 돌발발언은 시우를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다.
“스승님… 이렇게 갑자기요?”
“한참 전부터 움직일 만했다네. 그대와 떨어지는 것이 싫어 괜스레 뭉그적거렸을 뿐이지.”공적 토벌.
라피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또 개인의 복수심을 위해.
엘로아가 공적 사냥에 일생을 바쳐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비겁의 마녀 사건을 이후로 그녀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더는 복수심에 파묻혀 무의미한 질주를 하지 않았으며, 한결 여유 넘치는 웃음을 머금게 되었다.
공적은 인간에게 큰 해악을 끼친다.
그들을 소멸시키는 것은 정의로운 행위이며 더 나아가 정의에도 보탬이 되는 행위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녀가 어지간한 공적의 위협에 녹록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위가 얼굴을 모르는 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리고 싶었다.
하지 않았으면 했다.
아니면 차라리….
“미리 고하겠네. 그대는 오지 말게나.”
“...방금 막, 저도 돕겠다고 말씀드리려던 차였는데요.”
“그럴 순 없네.”
시우의 손을 엘로아가 꼭 쥔다
절대로 허락하지 않겠!;는 굳은 다짐이 작은 손아귀의 힘에서 느껴졌다.
“비겁의 마녀 때와는 다릅니다. 저도 충분히 스승님의 힘이 될 거에요.”
“노파심에 말하지만,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네. 그래도 허락할 수 없다네.”
시우의 말이 허풍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강력한 공적 비앙카를 사냥했다.
힘을 적당히 뺀 엘로아와의 대련에서도 한 판을 따냈다.
비록 무의식의 시우가 한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설명할 수 없는 파워업을 겪게 되었으며 앞으로도 더 발전할 자신이 있었다.
차라리 아무런 힘이 없었다면 모른다.
그런데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 혼자 위험한 길을 걷게 하겠는가?
따라서 시우는 침착하게 엘로아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설득의 단초조차 끊어내겠다는 듯이 엘로아는 시우의 말을 자른다.
“그대가 도움되지 않는다고 말하려던 것은 아니야.”
“그럼 왜…!”
뚜벅뚜벅 걷던 엘로아는 불현듯 멈춰 섰다.
돌아본 장소에는 묘비 하나가, 그리고 묘비의 석판 옆에는 라피 티페레트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굉장히 오랜 시간이 지났음이 분명함에도 바로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이끼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걸 본 순간.
역설하려던 단어와 문장이 목구멍에서 턱 막힌다.
“라피를 묻은 이후 누군가와 함께 오는 것은 처음이라네.”엘로아는 살며시 시우의 손을 놓고 묘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그리고 제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듯이 차디찬 묘비를 손으로 닦는다.그녀의 눈과 손끝에는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애환이 서려 있었다.
“그대가 함께 와주었으면 했네. 라피도 분명 기뻐할 테니.”
“…비겁하십니다.”
그녀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자신의 모든 마음을 보여주었다.
왜 그녀가 시우가 따라나서지 못하게 막는지.
어떤 심정으로 말하는 것인지.
엘로아는 아직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속죄의 길에 시우가 끼어드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잿더미와 같았던 그녀의 인생에 간신히 피어오른 희망.
시우를 또다시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러면…. 제가 고집부릴 수가 없잖아요….”
“그게 어찌 고집이겠나? 날 걱정하니 나온 말이겠지.”
엘로아는 시우에게, 사랑스러운 제자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부탁했다.
“라피와 인사하고 싶으니 잠시만 시간을 주겠나?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주게.”“...알겠습니다.”
시우가 등을 돌리고 담배를 피우는 동안 엘로아는 라피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 지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시우와의 이야기.
때로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였고, 때로는 부서질 듯 애처롭게 떨리는 울음이 섞인 음색이었다.별빛이 시큰거리게 아름다운 밤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