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28화 (428/917)

#428

1.

어느덧 하루 앞으로 바짝 다가온 수확제.

기대감을 품고 술을 홀짝이는 엘로아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기다리던 샤론이 들어왔다.

“티페레트 공작님! 도착했어요!”

누구든 가까이 지내고 싶어지는 밝은 미소의 샤론.

민트빛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는 그녀의 옆구리에는 종이 상자 하나가 끼워져 있다.

공장에서 찍혀 나온 듯한 재질과, 상자를 꼼꼼히 포장한 테이프는 이것이 현세의 물품임을 즉각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연말이라 그런지 밀린 물품이 많더라구요. 제때 맞춰 달라고 얼마나 닦달했는지….”

수확제를 남성과, 데이트를 위해 보내는 것은 처음이다.

따라서 무엇을 준비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샤론 양, 언제나 감사한 마음뿐이네.”

“에이 뭘요, 다 돕고 사는 거죠.”

그런 엘로아를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은 샤론이었다.

평의회에서 선의의 경쟁 관계를 구축한 네 사람이지만 애초에 살벌한 경쟁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쌍둥이와는 이상하리만치 투닥거리는 일이 잦지만 뭘 해도 서투른 엘로아는 샤론으로 하여금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물씬 샘솟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샤론은 엘로아를 도와 결전 병기를 준비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상자와 경건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보는 엘로아.

특별한 날을 위해 이것저것 상의를 거쳐 준비한 필살기가 여기에 담겨 있다.

방수 대책으로 랩으로 둘러싸인 상자가 개봉되고.

그 안에 바다 건너 결계 건너온 귀한 의복이 공개됐다.

“이건….”

사실 선물의 내용품과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샤론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었던 바다.

하지만 엘로아는 옷을 꺼내 들자마자 과연 이 선택이 맞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왜냐하면 안에 든 옷은 몸을 가리기 위한 ‘의복’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질이 엄청 좋아 보이네요. 비싼 값 하는 것 같아요.”

샤론의 말대로 재질 자체는 엘로아가 보기에도 괜찮다.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 이상하다.

허리의 맵시를 잡아주는 코르셋이 결합된 레오타드, 그 끝에 달린 몽실몽실한 털 뭉치.태어나 한 번도 신어본 적 없는 아찔한 높이의 하이힐.

셔츠 손목만 똑 떼어 놓은 밴드와 흑진주로 만들어진 커프 링크스.

가터벨트와 오버 니 스타킹.

토끼 귀를 형상화한 리본.

무엇을 숨기랴

엘로아가 준비한 특별 필살 의상은 바니걸 의상이었다.

참고로 산타걸 의상과 바니걸 의상 중 하나를 놓고 고르다가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었다.

카탈로그를 통해 충분히 디자인을 봤고 상의를 거듭해 결정한 것이지만 뭐든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감상이 다른 법이다.수영복에 버금가게 노출도가 높고, 외설적이며,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의상은 엘로아를 경직 상태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샤론 양 0|, 이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엄청 예쁘게 잘 나온 것 같은데요?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공작님은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아름다우시니까요.”

샤론은 마치 자신의 선물인 것처럼 기뻐했다.

현세에서 시우와 함께 동거할 적 인터넷에서 연애 관련, 남자친구 관련에 관한 정보를 빠삭하게 조사했던 샤론.

더군다나 각종 매체를 통해 ‘바니걸 의상은 남성의 판타지를 충족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엘로아는 다르다.

그녀는 오랜 세월을 현세에서 보냈지만 활동지의 99% 험지였고 이런 정보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이 요사스러운 옷을 입는다고 시우가 좋아할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차마 엘로아를 위해 저렇게 발 벗고 뛰어준, 시간을 들여 상의까지 해준 샤론의 호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여기서 당혹스러움만을 내비치면 샤론의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입어나 보자.

그렇게 생각한 엘로아는 샤론에게 양해를 구한 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룸으로 왔다.

제머나이 백작가에서 손님에게 제공되는 방은 말이 방이지 하나의 작은 저택이나 다름이 없다.거기에 갖춰진 드레스룸 역시 일반적인 옷장 겸 탈의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소규모 점포 크기의 수납공간과 벽 한쪽을 장식한 거울을 비롯 다양한 거울이 제공되는 것이다.쓱쓱 옷을 벗은 엘로아는 가터벨트를 입고 힘겹게 레오타드를 입었다.

스타킹을 당겨 가터벨트 클립에 연결하면 얼추 끝냈다.

“앗….”

거울을 본 엘로아는 자신의 실책 깨달았다.

이 바니걸 레오타드의 하부 옷감은 좁아도 너무 좁다.

치골과 허벅지가 훤히 드러날 뿐더러 다리가 접히는 쪽 살까지 고스란히 보인다.

따라서 평소 엘로아가 즐겨 입는 속옷을 착용한 채 입으면 팬티 날개가 볼썽사납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주저하던 엘로아는 속옷까지 벗고 완벽한 착장을 끝냈다.

굉장히 공격적인 이등변 삼각형이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형태였다.

가슴도, 다리도, 엉덩이도 너무 낑겨서 두 치수는 작은 사이즈의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영문 모를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스멀스멀 얼굴을 붉게 만든다.주책이다, 나잇값 못한다, 체통 없다, 요사스럽다 등등.

온갖 부정적인 표현이 주렁주렁 달릴 정도로 민망한 차림새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칫하면 발목이 꺾일 것 같은 이 하이힐은 어찌나 높은지 키가 훌쩍 커버린 느낌이다.차라리 벗으면 벗었지 이런 몰골로 시우 앞에 선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다 입으셨어요?”

“샤, 샤론 양! 들어오지 말게!”

“괜찮아요,제가 봐 드려야죠.”

만류에도 불구하고 샤론이 들어선다.

휘둥그레지며 반짝이는 샤론의 눈.

평소 수더분하고 활동성 좋은 옷만을 즐겨 입고, 드레스를 입어도 폼이 너른 원피스만 애용하던 엘로아다.

그런 그녀가 선보인 바니걸 코스튬은 같은 여자인 샤론이 봐도 뇌쇄적일 정도의 변신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안되겠지만 매우 귀엽다.

“공작님! 정말 너무 잘 어울리셔요!”

“샤론 양, 날 위해 힘써줘서 고맙네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네….”

“네? 왜요? 이렇게 귀여우신데요?”

“이건 너무 주책이랄까…. 나는 이걸 옷이라 불러도 좋을지 의문이네….”

“원래 이런 옷이에요 모처럼 이벤트잖아요.”

“그래도….”

엘로아는 어쩔 줄 몰라하며 샤론의 말을 경청했다.

“이런 옷이 원래 남자한테 어필이 확확 되는 거죠.”

“도대체 왜?”

“귀엽고 섹시한 느낌이 같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러한가?”

별다른 선행 지식이 없는 만큼 샤론의 칭찬이 바람을 불어넣는 속도도 빨랐다.

벌써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제 옷차림을 되살펴 보는 엘로아.

가치관과 새로운 정보 사이에서 혼란상태에 빠졌던 엘로아를 샤론의 한마디가 사로잡는다.

“네네, 또 시우도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시우가?”

“네!”

바로 시우가 좋아해 준다는 것.

시우 옆에 가장 오래 있었던 샤론의 말은 신빙성이 넘쳐난다.아무리 부끄러워도 그가 좋아해 준다면 입을 수 있다.

“...정말 좋아할 것 같나?”

“네, 무조건 통해요 이건 절 믿으세요.”

잠시 고민하던 엘로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항상 도와줘서.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헤헤. 뭘요. 저희 스승님이 마녀끼리는 돕고 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샤론은 싱긋 웃으며 엘로아에게 답해주었다.

2.

쌍둥이 장모님과의 낯뜨거운 해프닝 이후.

소란스;'운 현세의 규정과 다르게 게헨나에서의 일상은 평화롭게 흘렀다.

가끔 샤론과 마법 연구를 하고, 쌍둥이와 놀고, 스승님과 대련하는 한가로운 나날들.

그렇게 어영부영 안주하며 살고 있자니 금방 커다란 이벤트가 다가왔다.

노예 시절 시우도 내심 기다렸던 수확제가 오늘 저녁 이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제머나이 백작에게 식사를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만찬에 동참하게 되었다.

만찬 참석 인원은 제머나이 백작, 오딜 오데트, 샤론, 엘로아, 시우.

하지만 시간을 조금 서둘러 왔기 때문인지 만찬 테이블에 있는 사람은 하필이면 데네브 제머나이 뿐이었다.

데네브와 시우는 불과 이틀 전에 뜨거운 밤을 보냈다.

검증을 위해서 이긴 하다만 피아가 목적의식을 잊고 심취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그러니까 얼굴 보기 조금 힘든 상대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이미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석연찮다.

시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어서 와요.”

평소라면 기품 넘치는 미소로 반겨주었을 데네브.

오늘 그녀의 얼굴은 딱딱한 빵처럼 굳어 있었다.

그래도 데네브 백작쯤 되면 어른스러운 대처로 맞아주길 기대했는데 부질없던 것 같다.

세상에 이보다 불편한 자리가 있을까.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 말도 안 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껄끄러웠다.

“시우 군.”

“네, 백작님.”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데네브는 조용히 테이블보만 바라본다.

그러다가 간헐적으로 힐끗 시우를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이기를 반복.엄청 할 말 있어 보이고, 또 말을 걸어주었으면 하는 모양새였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편하게 해주세요.”

“네, 실은 있어요. 사실 제가 며칠째 고민을 해봤어요.”

시우가 말을 걸길 기다렸다는 듯 진중하게 꺼내는 데네브의 말투에 시우는 영문모를 불안감을 느꼈다.설마 이제 와서 검증이니 뭐니 그다지 의미 없다고, 쌍둥이와 떨어져 달라고 말하려는 건가?

한없이 진지한 그녀의 표정은 뭔가 불길한 예감밖에 들지 않는다.

“저희가…. 했잖아요?”

“그렇죠?”

“그때 제가 시우 군에게 조금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단 말이죠. 볼썽사납게도요.”

뭐든 문맥이라는 것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시우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간 모양이다.

데네브는 그때 기억을 무척 부끄러워하는 듯하니 적당히 무마해주기로 했다.

“아닙니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검증이었고….”

“아니요,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하는 건 시우 군이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려는 거에요.”

“오해요?”

데네브는 마치 논문을 읊듯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실은 그날연기를 했어요.”

“사실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티를 내면 시우 군이 자신감을 잃을까 봐 어울려줬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우 군에게 커다란 오해를 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령 제가 그 날 아주 황홀함에 젖었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Oh 네, 뭐.”

“하얀 거짓말은 인간관계의 윤활제로써 필요하다 여기지만 그게 또 엉뚱한 착오를 낳는다면 바로 잡는 것이 옳은 일이겠죠.”

“그렇군요.”

“저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너무 낙담하지는 마요. 조금도 기분 좋지 않았던 건 아니니까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을 잃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요. 조금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네네, 정진하겠습니다.”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 맞장구를 쳐주는 시우.

데네브는 자신의 해명이 먹혀든 듯하자 완전 뿌듯한 표정을 숨기며 나긋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예요. 오늘은 여느 때보다 근사한 식사를 준비했으니 맘껏 즐기세요.”

“감사합니다.”

딸은 어머니를 닮는다고 했던가.

알비레오가 보았다면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삼켰을 안하느니 못한 해명을 보며 쌍둥이나 쌍둥이 백작이나,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시우는내심 생각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12월 24 0시)은 휴재입니다

모레(12월 25 0시)는 지난번 검토중이었던 회차가 재등록 됩니다

엘로아 티페레트 삽화 3장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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