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1.
시우는 침음을 삼켰다.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알비레오가 와주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백작 둘이서 도란도란 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향후 시우의 처우는 저 대화로 결정될 것이다.
워낙에 울려서 내용까지는 식별할 수 없었지만 데네브가 언성을 높일 때 만큼은 확실한 딕션이 들린다.
주로 ‘쫓아내야지!’ ‘마음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어!’ ‘용서 못 해!’ 같은 살벌한 단어뿐이어서 괜스레 쫄렸다.
"쉭! 쉭!”
그때 어디선가 뱀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돌무더기 사이로 새는 바람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조수님…! 조수님…!”
고개를 틀자 통로에 몸을 웅크리고 고개만 빼꼼 내민 오딜과 오데트의 모습이 보였다.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는 쌍둥이답게 어디선가 뿅 튀어나온 것이다.
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어 시우 옆에 왔다.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쌍둥이의 두 눈은 먼지를 뒤집어 쓰고 이마에 피까지 난 시우를 보고는 수심으로 차올랐다.
“조수님…. 피, 피나요…. 어떡해…. 저희 때문에….”
“괜찮아, 조수님. 가만히 있어. 우리가 구해줄 테니까.”
“오딜 님…. 오데트 님….”
사실 데네브가 ‘0| 지하감옥의 존재는 쌍둥이조차 모른다’라고 말했을 때부터 ‘아닐 텐데….’ 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호기심이라는 단어를 의인화한 것 같은 쌍둥이가 이 흥미진진한 던전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시우의 예상대로 쌍둥이는 지하 감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시우가 잡혀갔으리라는 것도 예상하고 손에는 두툼한 열쇠 뭉치 두 개를 든 채 구출하기 위해 찾아왔다.
“오데트, 네가 팔 쪽을 맡아 내가 아래를 맡을 테니까.”
“응, 언니.”
“이러셔도 되는거 맞아요?”
각각 열쇠를 들고 하나씩 꽂아 돌려보는 오딜과 오데트.
시우는 걱정스레 물었다.
“조수님, 작은 스승님이 이걸 그냥 넘어갈 것 같아?”
“우선 피신하세요. 저희가 혼나면서 조수님 변호해 드릴 테니까요.”
속닥속닥 거리는 소리와 열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린다.
그러나 가을철 산불처럼 악화한 상황 앞에서 마냥 도망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마음만 받을게요. 절 두고 조용히 빠져나가세요. 데네브 님과는 제가 말씀 나누겠습니다.”
“조수님, 헛소리 말고 도망쳐.”
“그러다 진짜 큰일 나요….”
한편 데네브의 불같은 성정을 알고 있는 쌍둥이는 면피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이성적인 대화고 자시고 이대로 뒀다가는 조수님이 무슨 꼴을 당할지 눈에 선한 것이다.당장 조수님이 두들겨 맞고 끌려오지 않았던가?
먼저 쌍둥이가 완충장치가 되지 않고서야 그 미래는 명약관화였다.
“왜 이렇게 안 풀리지….”
“열쇠가 너무 많아 언니….”
하지만 열쇠가 많아도 너무 많다.
아무리 낑낑거려도 풀리지 않는 감금 장치.
보다 못한 시우가 말했다.
따지고 보면 시우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끝에 커진 불씨가 굳이 쌍둥이에게 튀는 것도 원치 않았고 말이다.
“제가 잘 해결해 볼게요. 괜히 저 때문에 이러실 필요 없으니 도망가세요.”
“우리가 멋대로 뛰쳐나와서 이렇게 된 건데 어떻게 그냥 도망쳐.”
“맞아요, 저희에게도 책임의식이 있어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박차가 가해질 무렵.
알비레오와 데네브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완전히 멎었다.
그 순간까지도 시우를 빼내기 위해 열중하던 쌍둥이었으나 시간에 맞추진 못했다.
“아….”
데네브와 대화를 끝내고 돌아온 알비레오.
둘은 시우의 주변에 찰싹 달라붙어 열심히 구속구를 풀어주려던 쌍둥이를 발견했다.
“하아…. 요개구쟁이들….”
“너희 어떻게 여기 왔니?”
알비레오는 한숨을 쉬었고 데네브는 경악한 듯 쌍둥이를 보았다.
분명 마법을 통해 재웠을 텐데, 이 지하감옥의 존재는 알린 적이 없었을 텐데.
쌍둥이가 보란 듯이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페어 키까지 가지고 말이다.
“스승님! 조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맞아요! 저희가 먼저 유혹했어요! 만약 조수님한테 문제가 생긴다면…!”
“저희 다시는 스승님들 안 볼 거에요!”
도주를 포기하고 정면 돌파에 나선 쌍둥이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데네브.
“언니! 애들 데리고 올라가!”
“싫어요!”
“저희 절대로 조수님이랑 안 떨어져요!”
하지만 쌍둥이는 시우의 양옆에 찰싹 달라붙어 의사표명을 굳건하게 했다.참다못한 데네브가 외친다.
“너희 이 남자가 얼마나 많은 여자랑 놀아나는 줄은 아니?”“알아요 하지만 조수님을 향한 저희 마음은 변치 않아요!”“이해할 수 있어요 일편단심 민들레에요!”
겨우 가라앉힌 속을 다시금 박박 긁는 쌍둥이의 모습에 데네브는 듣기 싫다는 듯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언니! 빨리 올라가라니까!”
“이제 똑같은 수법은 당하지 않아…! 흠냐….”
“자꾸 마법으로 해결하려는 거 비겁한 일이에…! 음…코오….”
하는 수 없이 알비레오가 수면 마법으로 쌍둥이를 재웠다.
쌍둥이는 나름 마법으로 저항해보려 했지만 애초에 쌍둥이가 사용할 줄 아는 모든 마법은 백작의 하위호환이다.금방 다시 꼬꾸라지는 쌍둥이를 알비레오가 안아 들었다.
“후우….”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쉬는 데네브.
쌍둥이의 짧은 등장과 빠른 퇴장이었으나 그 의도는 정확히 전달되었다.
쌍둥이는 뻔히 실패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나중에 혼쭐이 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빼돌리기 위해 잠입했다.방금 알비레오가 말한 것처럼 적어도 저 신시우를 향한 쌍둥이의 마음이 진심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후딱 데려다 놓고 올 테니까 이상한 생각하면 안 된다?”
“알겠다니까 언니.”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하는 알비레오.
사실 데네브는 이곳으로 시우를 데려올 때까지만 해도 꽤 가혹한 마음가짐이었다.
그의 죄를 남김없이 밝히고 여죄까지 철저히 추궁한 뒤, 적당한 형벌을 내려 추방할 심산이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알비레오의 차분한 호소와 설득, 그리고 쌍둥이가 보여준 필사의 변호는 격렬했던 감정의 추를 멈춰 세우는 데 성공했다.어디까지나 폭주를 제지했을 뿐이나 시우의 입장에서는 한시름 놓았다고 볼 수 있겠다.
“시우 군.”
“네, 데네브 백작님.”
“몹시 몹시 몹시 실망이에요 저는 시우 군을 믿었어요.”
“실망을 드; 점에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제가 워낙 우유부단했던 탓에 일을 키우고 말았네요.”데네브는 손가락을 튕겨 시우에게 걸려있던 자백의 시를 풀어주었다.연이어 손과 발을 걸어 잠그던 구속구까지 해제해준다.
“제 참담한 심정을 시우 군은 조금도 짐작 못 할 거에요. 나중에 견습마녀가 생겨봐야 조금은 이해가 가려나요.”
데네브는 여전히 까칠한 태도였다.
하지만 손을 뻗어 이마에 났던 상처까지 치료해주는 것을 보면 알비레오가 성공적으로 그녀를 설득해 준 것 같다.
“우선 말할 것은 많지만…. 벌써 왔어?”
“별일 없었지?”
“진정 됐다고 했잖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알비레오.
굉장히 빠른 시간임을 생각하면 퍽이나 데네브의 폭주를 걱정했던 듯하다.
시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단순히 쌍둥이의 미움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티페레트 공작과도 어느 정도 소홀한 사이가 될 테니.알비레오 입장에서는 데네브의 경거망동을 제지하는 것이 도의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맞았다.
“데네브, 잘 참았어. 역시 내 여동생이야.”
“언니는 좀 입 다물어.”
그 제머나이 백작이 서로 티격태격하다니.
진풍경을 보고 있자니 과하게 들러붙는 알비레오를 떼어낸 데네브가 앞으로 나선다.
“우선은, 알겠어요. 백번 양보해서 쌍둥이와 육체적 관계를….”
- 빠드득
대사가 끊기고 잠깐 이를 가는 소리.
오늘로 몇 번 째인지 모를 한숨으로 마음을 다독인 데네브가 마저 말을 잇는다.
“맺는 이유와 사정까지는 이해했어요. 그 외에 수많은 마녀를 꼬셔서 동침한 것까지 이해했고요. 당사자인 쌍둥이가 괜찮다고 하니 제가 이 이상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겠죠.”
“시우 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지 않나요? 게다가 하나같이 무슨…. 공작에 백작에 대마녀에…. 국부에 금테라도 두르시려고요?”
“아뇨, 그러려는 건 아니고…. 그냥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이어지는 장모님들의 죽 잘 맞는 핀잔에 어깨가 좁아지는 시우.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이다.
지금 잘 처신한다면 반쪽짜리 관계로 유지되던 쌍둥이와의 관계를 데네브에게까지 인정받을 수 있다.
시우는 침착하게 침을 삼키고 데네브와 눈을 마주쳤다.
“뭘 봐요?”
“아, 아닙니다.”
그리고 데네브의 핀잔에 재빨리 눈을 깔았다.
모처럼 책임감 넘치는 상남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너무 무섭다.저 새파란 안광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조금 전 오해가 있었음은 인정할게요. 저는 시우 군이 아무런 확증 없이, 무책임하게, 말초적 쾌락을 위해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희 쌍둥이를 능욕하고,더럽히고, 간음하고, 앞날을 망치려 했다고 생각해서 공격했던 거에요.”
구구절절한 수식어가 나올 때마다 움츠러드는 어깨.
“하지만 시우 군이 그나마 쥐꼬리만 한 양심과, 간장 종지만 한 책임감과, 병아리 눈물만 한 반성 의식을 보이고 일전에 입은 은덕도 있으니…. 매우 유감스럽게도 추방은 없던 일로 하겠어요.”
99그 . . .TT .
뒤에서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알비레오는 데네브의 판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되는대로 설득하려고는 했지만 데네브가 받아들일지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
“그러나.”
선고문을 마무리하기 직전 쫄깃한 반전을 주는 판사처럼 최종 판결을 내리는 데네브.
“0| 모든 선처는 쌍둥이와 당신의 행위가 그릇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 이뤄질 거에요. 당신이 앞으로 쌍둥이와 육체적 관계를삼가겠다 말한들 저는 그걸 신뢰할 수 없어요. 이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겠죠?”이미 시우는 데네브를 속이고 쌍둥이와 놀아댄 셈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다만 데네브의 말이 뭔가 수상쩍다.
“네?”
"응? 데네브?”
“그 말인 즉 슨, 항문성교 시 일어나는 모든 마력 반응과 작용을 직접 검증하겠어요. 만약 조금이라도 좋지 않은 영향이 관측될 경우 앞서 말한 선처는 무
효. 다시 말해 쓰둥이가 계승 받기 전까지 만나는 것을 금지하겠습니다.”시우는 잠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
쌍둥이랑 하지 말라고 해봤자 둘 다 어길 것 같고, 그릇에 이상이 없다고는 하지만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확실하게 확인하겠다-또한 당장 그릇에 이상이 없어도 혹시 모를 문제점이 있었을 수도 있으니 직접 검증해보겠다.
이 말이다.
“네?”
시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옆에서 듣고 있던 알비레오도 마찬가지였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즐거운 연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