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1.
흔히들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공기가 얼어붙는다.
극도의 긴장과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등골을 타고 흐르는 한기를 묘사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아….”
“히.시”
그대로 멈춰라 상태가 된 채 나지막한 탄식을 뱉은 오딜.
마찬가지로 얼음이 되어 기겁한 오데트.
그리고 상정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 굳어버린 시우.
속으로 좆됐구나를 복창하는 가운데 이 공간에서 움직이는 것은 살기와 함께 휘날리는 데네브 제머나의 하얀 백발뿐이다.
알비레오는 시우와 쌍둥이의 관계를 알고 있다.
시원한 뺨 싸대기 한 대로 시우의 난잡한 여성 편력과 쌍둥이와의 육체관계를 이해해주었던 알비레오 제머나이.
그런 그녀가 거듭 신신당부했던 말이 있다.
절대로 여동생인 데네브에게는 이 모든 사실을 들키지 말 것.
한두 번 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비교적 남녀 관계에 대해 포용적인 시선을 내비치는 알비레오와는 달리 데네브는 깐깐하고 엄격한 부모이고 또 분명히 감정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바 있다.
그래서 시우도 게헨나에 돌아온 이후에는 쌍둥이와의 육체관계를 최소한으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걸려 버렸다.
그냥 키스하는 모습을 들켰어도 모자랄 판국에 발가벗겨놓은 쌍둥이와 히죽거리며 키스하던 모습을.
“작은 스승님…!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흠냐….”
“작은 스승님…! 저희가 다 설명해 드릴 수…. 하아암….”
황급하게 이불로 몸을 두르고 시우를 변호하려 나서던 쌍둥이가 그대로 침대에 푹푹 꼬꾸라진다.데네브가 입술을 달싹여 수면의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시우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대화의 여지도, 아주 조금의 호의도 남겨 놓지 않은 매서운 눈길.
그리고 그 안에서 한 가지 각오가 바로 서는 것마저 보았다.
“노래하라.”
원형의 파동이 데네브의 몸에서 퍼지며 사방을 덮는 것이 느껴진다.세상을 오려내어 또 다른 세상을 덧그리는 이면결계다.
게헨나 내부에서 이면 결계를 펴는 것은 법적으로 제한되며, 규모가 큰 마법 실험 등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한해 미리 시청에 고지하고 진행되어야 한다.불법적인 마법 실험 등에 악용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네브가 갑자기 마법 실험이 진행하고 싶어서 결계를 펼친 것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살기등등한 마력을 뿜어내고 쌍둥이를 결계 밖으로 떨쳐냈다면 더욱이.
이미 시우의 혈액 속엔 임전 태세에 가까운 아드레날린이 핑핑 돌고 있었다.농담이 아니라, 잘못하면 죽는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마른 침만 삼키고 있을 때.
데네브가 먼저 고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격분한 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깊은 겨울 호수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쌍둥이가 이 시간에 별안간 포탈로 이동하기에 무슨 일이 있는지 따라왔어요.”
그러나 그것이 데네브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는 아시겠죠? 순간의 욕망에 눈이 멀어 감히 우리 귀여운 쌍둥이를 건드리려 하다니.”
견습마녀를 건드리는 것은 중죄 중의 중죄.본래라면 시우를 근처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우는 명색이 제머나이 가문의 은인이었으며 데네브는 시우와 쌍둥이가 서로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품고 있다고 판별했다.
따라서 서로 키스 정도는 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그라면 선을 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오늘 그녀가 보게 된 풍경은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성관계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딜과 오데트가 영영 마녀가 될 수 없는 장애를 지닐 뻔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는 데네브는 마녀로서 두려움마저 느꼈다.
“당신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렸어요.”
“데네브 님, 제가 설명드릴 수….”
“듣지 않겠어요.”
해명하기에 앞서 피부가 따끔따끔 찌르는 위기가 감지됐다.
목숨을 건 전장을 숱하게 굴러왔다.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인 직감이 경종을 울린 것이다.
-콰아앙!
건물의 외벽을 부수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옆구리를 맹타한다.
단순히 충격량만으로 따지자면 시가지에서 신호 무시하고 질주하던 버스에 치인 수준.
시우가 본능에 가깝게 검은 갑옷을 현현해 착용하지 않았더라면 어디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졌을 그런 강렬한 충격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런 물리적 효과를 가한 마법이 어떠한 형태도 갖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우는 재빨리 안대를 벗어 던졌다.
아무리 잘못을 한 것이 사실이;, 데네브가 화난 것도 이해가 간다지만 설명도 못 하고 맞아 죽는 것은 사절이다.
“당신은 이제 제머나이 가문의 손님이 아니에요.”
-부웅! 부웅! 부웅!
안대를 벗고 나서야 시우는 마력의 흐름을 통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데네브가 마력과 함께 호흡을 뿜을 때마다 주위의 대기가 동조한다.
근사한 건물을 과자 집 부수듯 박살 내며 흉흉한 소리를 내는 것은 렉킹볼처럼 둥글게 뭉쳐진 공기의 철퇴였다.
“견습마녀를 간음하는 죄를 범하려든 극악무도한 악적.”
-콰지지직!
고작 5번 정도 오갔던 충격에 집이 폭삭 무너져 내렸다.
굉음을 집어삼키는 먼지 속에서 시우는 재빨리 그곳에서 몸을 빼냈다.
“허나 그 간의 정이 있고 두 번 쌍둥이를 구한 것을 정상참작하겠어요.”
무너지지 않고 버텨선 기둥 끝을 밟고 오연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보는 데네브.
데네브의 주변에 은은히 맴도는 반투명한 방어막은 조금의 분진이 그녀의 옷에 묻어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의 주위로 십 수개의 마력 점이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둘이서 하나인 제머나이라지만 명색이 백작이다.
단신으로라도 20 위계 급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사업상 따로따로 현세를 방문하지 않았겠지.
“좋은 말로 알아 듣지 못한다면 따끔한 경험을 몸에 새겨줄 수 밖에 없죠. 당신의 팔다리를 부수고 게헨나 밖으로 추방하겠습니다. 적어도 계승이 끝날 때까지 쌍둥이와 만날 생각하지 마세요. 오딜도 오데트도 속상해할 테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절 이해하겠죠.”
“데네브 님, 설명드릴 기회라도….”
“듣지 않겠다고 했어요.”
차갑게 잘려나가는 목소리와 동시에 수십 개의 마력점이 번쩍 발광한다.
그와 동시에 내뿜어지는 수십 가닥의 보랏빛 마포의 향연.
중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말이야 팔다리를 부러뜨리겠다고 했지만 데네브는 지금 힘 조절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피어라!”
피할 곳 없이 빽빽하게 이어지는 마력의 파동을 본 시우는 그림자를 퍼뜨렸다.
농밀한 농도의 그림자 입자는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마포 자체의 성능을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노면을 뒤집으며 빗발치는 마력의 폭류 사이를 헤집으며 시우는 그저 내달렸다.
원래라면 원거리 공격을 빗겨냄과 동시에 접근해 근접전을 걸었을 것이다.
엘로아가 평가를 내렸 듯, 시우가 진심을 발휘하면 혼자인 백작을 상대로는 그럭저럭 맞수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미래의 장모님이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누가 봐도 시우에게 귀책 사유가 있다.
빈틈을 틈타 반격을 가한다?
사람 새끼면 그러지 말아야지.
그렇다고 저 공격들을 하나라도 맞았다가는 몸 성하기는 그른 것 같으니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데네브의 공격을 받아내며 그녀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거나 다른 이의 구조를 받는 것뿐이다.
“맞아요, 당신은 욕망의 마녀와 맞붙었었죠. 그 알량한 재주를 믿고 경솔하게 행동한 건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책임질 수 있어요! 우선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외쳐봐도 데네브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쫄랑쫄랑 도망치는 시우와 결계 내의 타로타운을 철저하게 파괴하며 공격을 쏟아붓는 데네브.
1분도 지나지 않아 멀쩡한 건물은 하나도 남지 않은 채, 부서진 잔해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때.
피해 다니던 시우의 귓가로 한 소절의 아름다운 노래가 퍼진다.
마력을 읽는 시우의 눈으로 봐도 음속을 아득히 넘어선 보랏빛 파동이 도저히 회피할 수 없는 속도로 펼쳐지는 게 보였을 뿐.
“크 I”
인간의 성대로 낼 수 없는, 천상의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청명한 소리가 마력을 매질 삼아 울렸다.
데네브가 만들어낸 파동이 피부에 맞닿자 곧장 체내 마력의 노이즈가 증폭된다.
정류되지 않은 마력이 체내를 타고 흐르는 것.
이는 순간적으로 독극물이 마력회로를 타고 흐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유도했다.
균형과 속도 변화를 감지하는 반고리관이 방해를 받으며 만취했을 때보다 극심하게 천지가 출렁인다.
또한 자기화된 마력 특유의 리듬이 일제히 헝클어짐과 동시에 검은 갑주가 잘못 구운 쿠키처럼 부풀어 올랐다.
지금까지 마법은 장난에 불과했다.
이것이야말로 제머나이 가문의 비기, 회피할 수 없는 자성 마법 ‘노래하는 마법’.
귀를 막고 고막을 파내어도 마력을 매개로 침투하는 ‘진동’까지 온전히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버둥거리면 죽어요.”
설마 이런 종류의 마법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시우다.
찰나의 사고와 판단이 결판 짓는 마법 대결 중 확정적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마법은 사기에 가까운 성능이었다.
-쾅! 콰과광! 콰과과광!
폭격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뒤집히는 대지.
“우우욱...!”
자욱이 치솟는 분진 사이로 시우는 손과 발을 이용해 반쯤 기다시피 움직여 공격을 피해냈다.
체내의 마력을 가다듬어 노이즈가 발생한 마력을 정류한다.
이차적인 방해를 막기 위해 마력장을 수십 겹 비치해 진동에 의한 피해를 막는다.
하지만 데네브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겨우겨우 회피를 끝내자마자 자비 없이 쏟아지는 자성마법에 시우가 기껏 크루아상처럼 돌돌 둘렀던 마력장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는 것이 보인다.
도대체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지.
아니면 눈 딱 감고 맞아서 편해져 버릴지 고민하던 차.
수상쩍게 모여드는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데네브는 지금 시우의 움직임을 제한하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파형이 결계에 부딪쳐 다시 한 지점에 모인다.
아무렇게나 난반사 되었음에도 하나의 현묘한 규칙을 가지고 차곡차곡 포개진 파형은 그 자체로 또 다른 마법이 된다.
“시발!
큰 거 온다.
어찌저찌 공격을 피해내 도망치는 시우의 모습을 보고 더 확실한 공격을 가해도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 걸까?
지금처럼 찔끔찔끔 대응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다.
시우는 즉각 가누기도 힘든 몸을 최대한 움직여 폭심지에서 멀어졌다.
이윽고.
-퍼어어어엉!
어마어마한 폭발이 수십 미터의 지반을 들어 올리며 거대한 쇼크웨이브를 만들어 내었고.
뒤늦게 울려 퍼진 폭음이 두꺼운 암반과 함께 시우의 몸을 난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