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1.
저녁 식사를 끝낸 이후 샤론, 엘로아, 오딜, 오데트는 시우의 언질을 받고 일제히 한방에 모였다.
이 넷이 모이는 거야 그다지 특별할 일은 아니다.
며칠 전 협의회를 위해서도 모였었고, 또 식사 자리도 종종 함께하니 어색할 것 없다.
중요한 포인트는 이 모임을 주선한 사람이 시우라는 것.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네 사람은 저마다 마실 거리를 앞에 두고 시우의 의중을 가늠했다.
이례적인 사태인 만큼 샤론이 엘로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공작님은 들은 거 있으신가요?”“나도 잘 모르겠네만….”
“수확제 때문이겠죠?”
“그럴 것 같긴 하네.”
전혀 짐작 가지 않아 어리둥절해 하는 샤론과 엘로아.
“오데트, 드디어 정실 대전이 펼쳐지려는 거야.”
“응 언니,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자.”
뭔가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한 채 저들끼리 속닥거리는 쌍둥이.
생각보다 늦어졌기 때문에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이 네 명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장본인이 등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수님!”
“보고 싶었어요! 안아주세요!”
시우가 등장하자마자 쪼르륵 달려와 안기는 쌍둥이.
방금 같이 밥 먹은 뒤인데도 1년 만에 보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음을 지으며 반겨준다.
“어….”
워낙에 적극적인 대시에 환대 타이밍을 놓쳐버린 샤론과 엘로아.
엘로아는 귀여운 견습마녀를 보는 시선 그대로 쌍둥이의 애교를 바라보았지만 샤론은 알고 있다.쌍둥이가 얼마나 영악한지 말이다.
달려가 안아준다는 간단한 선택지만으로 대화와 스킨십 지분을 뺏어간다.
‘견습마녀’라는 포지션 상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수도 있고, 엘로아와 샤론에 비해 귀여움을 보이기도 쉽다.마음껏 어리광부릴 수 있는 포지션임을 알고 이용하는 것이다.
허리를 끌어안는 쌍둥이를 옆구리에 주렁주렁 단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샤론과 엘로아와도 인사를 나누었다.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돈되고, 시우는 오늘 모임의 목적을 입에 올렸다.
“사실, 자백할 것이 있습니다.”
“자백?”난데 없이 네 사람을 모아두더니 자백이라?
네 쌍의 시선이 나란히 시우를 향하자 부담감이 위를 짓누른다.
페리윙클에 이어 타카쇼와 상담을 끝낸 뒤 확실히 노선을 정하게 되었다.
예소드 백작의 연구에 협력하는 쪽으로 말이다.
아무리 가벼이 시작된 관계라고 해도 예소드 백작은 분명한 호의로 시우를 대해주었고, 디아나에게도 나름 정이 붙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 몰라라 하며 고개 돌리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이 네 사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나름의 사정이 있다 한들 비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저는 사실 루시 예소드 백작님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뭐?”
시우를 끌어안던 그대로 눈이 동그래지는 쌍둥이.
폭탄 선언에 입을 떠벌린 샤론과 마찬가지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스승님.
“관계? 조수님? 섹스 말하는 건 아니지?”
“에이 언니, 그럴 리가. 아무리 조수님이 망나니 같이 굴어도 그러진 않았겠지.”
“시우, 그대는 과외를 명목으로 예소드가에 드나든다고 들었네만….”
“진짜? 백작님이랑?”
뜨악한 반응에 한층 더 커지는 부담감을 묵묵히 누르며 시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성관계한 것…. 맞습니다.”
“하아….”
시우의 확인 사살에 살충제를 뒤집어 쓴 매미처럼 시우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쌍둥이.
어두운 표정을 짓는 엘로아와 한숨을 푹 쉬는 샤론.
“조수님 !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저희 둘로 부족해서 샤론 언니도 꼬시고! 공작님도 꼬셨으면서! 백작님까지 꼬시는 건 무슨 심보에요!”
“반성! 반성해요! 빨리 반성해요!”
쌍둥이는 펄펄 열을 내며 발끝으로 톡톡 시우의 오금을 차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그리곤 머리 높이가 낮아진 시우의 머리채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든다.
“바람둥이!”
“카사노바!”
“불륜남!”
“위》을 청구할 거에요!”어지간하면 쌍둥이를 제지하는 샤론과 엘로아지만 오늘만큼은 꽤 차가운 눈빛이었다.특히 엘로아 쪽이 말이다.
“얘기 좀 하세.”
엘로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좌우에서 오두방정을 떨던 쌍둥이가 멈칫했다.왜냐하면 엘로아의 목소리가 굉장히 차가웠기 때문이다.
“시우, 나는 그대가 오직 나만을 바라봐 주어야 한다고 바라지는 않네.”
“면목이 없습니다”
“그대를 사랑해주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은 나 이외에도 많지 않은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딱 잘라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대의심정과 결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엘로아는 엄숙한 목소리에서는 책망이 기색이 짙게 묻어나왔다.
실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만약 그의 옆에 있는 것이 엘로아 혼자였더라면 그녀는 시우를 전혀 나무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미 엘로아와 시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대가 설령 공적이 된다고 해도 시우의 편일 것이야. 허나 이해받는다고 하여 분별없이 행동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여기 있는 샤론 양, 오딜 양,오데트 양에게 실례이지. 그대가 받는 신뢰를 가벼이 여기는 겐가?”
옆에서 떽떽거리던 쌍둥이는 귀엽기라도 했지 낮은 어조로 이어지는 엘로아의 타박은 무서움 그 자체였다.다행히 중간에 끼어든 샤론이 엘로아를 붙들었다.
“공작님, 우선 사정을 들어봐요. 아무리 시우라도, 음…. 사정이 있었겠죠.”
“하나도 빠짐없이 소상히 고하게.”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우는 미리 준비했던 진실을 모조리 전했다.
우선 백작과 관계를 맺게 된 기승전결.
마취o;격렬하게 반응;후 시우의 특징과 이유, 누가 유혹했으며, 어떤 경위로 관계를 계속하게 되었는지.
성관계를 통해 연구했던 것까지 전부 말이다.
엄하게 솟구쳤던 엘로아의 눈썹도 설명에 따라 조금씩 내려온다.
완전한 납득은 아니었다.
시우가 체취를 마시면 제정신을 잃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고 엘로아도 그것을 이용하였던 적이 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연구를 명목으로 계속 관계를 맺으며 확실히 알리지 않은 것에는 귀책사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정이면 빨리 말해주면 좋았을 텐데….”
시우를 속박하지 않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샤론도 그 점만큼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가장 먼저 시우를 달달 볶던 쌍둥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티페레트 공작의 분위기에 힐끗힐끗 눈치만 살피고 있었고 말이다.
“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게 함과 동시에 양해를 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
“예소드 백작 님과의 연구를 앞으로도 진행하고 싶습니다.”
당돌하고도 뻔뻔한 시우의 발언에 엘로아와 샤론이 멍하니 있는 가운데.다시 날뛰기 시작하는 쌍둥이.
“조수님 ! 하나도 반성 안 했어 !”
“이게 무슨 반성이에요! 합법적으로 섹스하겠다는 거지!”
무릎 꿇은 시우의 양옆에서 손을 뻗어 목을 조르는 쌍둥이.
이것만큼은 샤론도 쉴드 칠 수 없던 것인지 딱히 말리려는 제스쳐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예소드 백작과의 관계도 이어가겠다고 말하는 겐가? 연구를 위해서?”
“연구는 다른 사람이랑 해도 되잖아요! 샤론 언니도 있고!”
“바람둥이! 바람둥이!”
“컥..커흑…! 꼬, 꼭 연구만을 위한 건 아닙니다.”
이윽고 시우는 나머지 분의 사정도 털어놓았다.
사정 시 발생하는 독특한 마법적 작용을 이용해 또 다른 방식의 위계 계승법을 연구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게 된다고?”
“아직은 가설일 뿐이지만 여러 차례 검증을 해보면 진전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순간만큼은 네 사람의 표정이 완전히 똑같았다.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솔방울만 해진 눈.
사실 시우의 말을 곧대로 해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앞으로도 예소드 백작이랑 섹스할 거다.
2) 이건 시우의 몸에서 벌어지는 작용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3) 추가로 선대 마녀가 죽지 않는 계승을 연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주요 요점이 셋이나 있는 만큼 제각기 받아들이는 것이 달랐다.
우선 포인트 2에 집중한 샤론.
“그래, 뭐….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있을 수는 없으니까.”
시우는 최초의 남자 마녀이다.
그의 몸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블랙박스와 같다.
샤론 역시 시우의 도움을 받아 불완전 계승을 극복했으나 그 작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호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요소가 된다.
과거 과학을 모르던 사람들이 좋다고 납, 비소, 수은 따위를 얼굴에 발라댔던 것처럼 말이다.
예소드 백작의 연구보조는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시우가 다른 여자와 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포인트 3에 집중한 엘로아.
“예소드 백작의 마음도, 그런 그녀를 돕고 싶은 그대의 마음도 십분 이해하네. 내가 조금은 오해했던 것 같군.”
엘로아는 상실의 아픔에 대해 알고 있다.
사랑하는 견습마녀를 위해서는 심장을 꺼내서라도 도와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도 이해한다.
또 시우의 성정을 미루어보면 그가 단순히 육욕에 절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사유가 되었다.
하지만 쌍둥이는 포인트 1에 집중했다.
“그래서, 어쨌거나 계속 하겠다는 거잖아.”
“처음에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조수님 못 됐어요.”쌍둥이는 가장 처음 시우와 함께했던 처지다.
혼자 현세에서 고생할 때 옆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샤론 언니까지는 인정했다.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을 가지고 있던 티페레트 공작님까지도 인정했다.
하지만 거기에 예소드 백작까지 추가된다니.
아무리 사정이 그럴듯하고 이해가 간다고 해도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조수님은 못 됐어 매일 눈 감았다 뜨면 새로운 여자랑 놀고!”“저희랑은 시간도 많이 안 보내주면서! 너무해요!”빼으벅 소리를 지른 오달과 오데트는 화를 넘어 서러움을 느끼는지 눈물을 글썽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앞으로는….”
“됐어! 오데트! 가자!”사과하려는 시우를 매몰차게 뿌리친 오딜은 오데트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