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
1.
동틀녘이 되어도 디아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분한 마음에.
어머니에게 느끼는 안쓰러움에.
믿었던 남자에게 배반당한 배신감에 치를 떨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감히...! 감히...! 감히...!”
베개 모서리를 잘근잘근 씹으며 원념을 줄기줄기 뽑아내는 디아나.
비록 성교육은 수위 높은 어머니의 관능 소설로 입문한 디아나지만 귀족 영애의 바른 몸가짐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던 만큼 정조관 만큼은 투철하고 확고하다.
여자와 남자가 살을 섞었으면 결혼해야 한다.
이건 당연하고 당연한 상식이 아니던가?
심지어 처음에 마녀를 노리갯감 취급하던 귀축배달부조차 마녀와 배달부가 약혼 관계가 되는데.
“불쌍한 엄마....”
엄마는 시우에게 몸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냉혹하게 버림받았다.
심지어 엉덩이를 맞는 천박한 짓까지 강요받았음에도.
그 외에도 변태적이고 저열한 취미에도 어울려 주었음에도 말이다.
관능소설에서는 그러한 파렴치하고, 몰상식하며,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먹고 버린다.
불쌍한 어머니는 시우에게 농락만 당하고, 몸을 더럽힌 이후에 한 입 베어 물린 사과처럼 버려진 것이다.
그러한 연민과 동정은 곧장 시우에 대한 증오와 경멸로 치환되었다.
“첫 키스도 가져갔으면서…. 멋지다고 생각하게 했으면서….”
더욱 디아나를 서럽게 만드는 건 엄마가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런 짓을 저지른 남자가 디아나가 처음으로 인정하고 관심을 두게 된 신시우라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그는 한번 디아나를 위기에서 구출해주기도 했다.맘껏 증오하기에는 이미 마음의 빚을 져버린 상대인 것이다.그 점이 너무도 분했다.
결국 동이 틀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이를 바득바득 갈던 디아나.그때 방문이 열리며 초를 든 루시 예소드가 들어왔다.
“어머, 우리 딸. 엄마 때문에 깼어?”
“어…엄마….”
겨우겨우 억눌렀던 정체불명의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엄마의 모습을 보자마자 터져 나온다.
디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곧장 기겁하며 달려드는 루시.
“어머! 나쁜 꿈이라도 꿨니? 우리 딸 이리와. 왜 울고 있어.”
“아니에요, 아니에요….”
침대로 달려와 디아나를 안아 든 루시는 몇 번이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하지만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 디아나에게 존경받고 싶어하는 엄마가 딸에게 못 보일 모습을 보였다는 것도 알게 되고,
무엇보다 나태한 행각을 내비치며 계승을 미뤄왔던 사실에 대해서도 알려지게 된다.
엄마의 성격상 그걸 알게 되면 더욱 속상해할 것이다.
이별은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라지만 이별의 시간을 제 손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마녀와 견습마녀의 가장 슬픔이었으니 말이다.
“엄마...”
“왜 우리 딸. 엄마랑 같이 잘까? 아니면 같이 목욕할까? 아니면 자장가라도 불러주면 좋겠니?”
그래서 디아나는 그저 엄마의 푸근한 가슴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해요.”
정말 보기 힘든 디아나의 애정표현.
디아나는 표현이 서툰 견습마녀였고, 엄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능숙하게 전하지 못했다.하지만 오늘은 꼭 하고 싶었다.
“어머….”
디아나의 모습에 조금 놀란 예소드 백작.그녀는 디아나를 꼭 안으며 말했다.
“웬일이래, 무서운 꿈을 꿨나 보네. 엄마는 여기에 계속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렴. 엄마도 우리딸 많이 사랑해.”
“네…. 계속 있어 주세요. 계속….”
“그럼 그럼, 엄마는 어디 안 가지.”
밤샘 증오로 거의 파김치 상태였던 디아나.
푸근;백작의 품에 안기;>마;'자신이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디아나는 엄마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1분도 되지 않아 색색 숨을 뱉으며 꿈나라로 떠났다.
2.
“여,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냐.”
오후 한 시쯤 샌드위치로 식사를 넘긴 시우는 타카쇼가 운영하는 로즈 글래스에 들렀다.
원래 호스트라는 것이 보통은 늦은 밤, 심하면 새벽까지도 일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다.
시우를 마중 나온 타카쇼도 잔뜩 졸린 눈을 하고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방금 막 침대에서 일어난 모양새였다.
“술이나 적시려고 왔지.”
“여보쇼, 나는 너처럼 천일 밤낮 꼴딱 새도 멀쩡한 철인이 아니거든?”
“좋은술 가져왔어. 들어가.”
“안 그래도 어제 진탕 마시느라 속이 뒤집힐 것 같은데 또 뭔 술이야.”
“해장술 모르냐?”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시우는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질색하는 타카쇼의 등을 떠밀었다.
오늘 타카쇼를 만나러 온 것은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타카쇼는 빼놓으면 섭섭한 여자 심리전문가이니 말이다.
실제로 지나가다 툭툭 던졌던 타카쇼의 헛소리들이 요긴하게 쓰였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아암….”
소파에 대충 걸터앉은 타카쇼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눈을 비볐다.
술 대신 시우가 손수 끓여온 얼큰한 라면이 해장용으로 놓여있다.
냄비 뚜껑에 면을 얹어 후루룩 먹은 타카쇼의 눈에 총기가 좀 돌아온다.
“그래서 형제, 무슨 일이야?”
“넌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냐.”
“너를 향한 내 마음을 두 글자로 표현한 거?”
능글능글하게 답하던 타카쇼는 시우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연애 상담이구먼.”
“뭔가 복잡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왔다.”
“그렇네. 그럼 저 오글거리는 질문부터 대답해주면 되는 건가?”
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타카쇼는 잠깐 생각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글쎄, 사랑이란 게 내 기쁨을 상대방에게도 나눠주고 싶은 거? 그런 거 아니냐?”
그리고 멋쩍은 듯 코끝을 쓱 문지른다.당연하지만 시우는 놀랐다타카쇼 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센징, 표정이 왜 그러냐.”
“아니, 왜 이렇게 정상적인데? 너라면 난자를 수정 및 착상시키고 싶은 여자라고 대답할 줄 알았어.”
“그건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드는 생각인데?”
“아하.”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유였다.
“뭘 해서 즐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하고 싶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면 먹여주고 싶고. 그런 거지.”
하지만 당장 그 정도 대답으로는 잘 모르겠다.
그 마음이야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의 지침서가 되어주지 못한다고 해야 하나.
“타카쇼 들어봐. 너가 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래.”
“네가 무슨 상황인데.”
“들어 봐.”
시우는 한동안의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쌍둥이에 관한 것, 샤론에 관한 것, 스승님에 관한 것, 페리윙클에 관한 것, 예소드 백작에 관한 것 등등.
이제껏 절조 없이 고추를 놀려왔던 일과 그로 인해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벌어진 여성 편력에 대해.
이번에는 숨기는 것 없이 모조리 털어놓았다.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시큰둥하던 타카쇼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굳었다.
특히 쌍둥이와의 관계를 이야기 할때는 거의 질린 표정을 짓더니, 시우의 말이 끝날 때 쯤엔 은은한 분노가 서린 얼굴이 되었다.
“상쾌한 아침부터 기만질로 복장 지르러 왔구나? 너 뒤질래?”
“난진지해 시발.”
타카쇼는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되려 기만자를 보는 느낌으로 입꼬리를 축 늘어뜨린다.
“0| 미친 놈아. 백작 견습마녀에, 가슴 이빠이 큰 여친에, 게헨나에 셋밖에 없는 공작님에, 호텔 운영하는 부자 마망에, 마찬가지로 부자 백작님까지 꼬셔놓고 하는 말이 너가 이 상황이면 어떻게 할래? 시발 나도 그거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줘!”
“아니….”
“꼭 나한테 이런 잔혹한 짓을 해야 해? 우리 우정은 어따 유기했냐? 너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
타카쇼는 침을 튀기며 분통을 터뜨렸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려줄까? 한 일조쯤 받는 복권 당첨된 친구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나한테 와서 ‘하… 시발 돈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알뜰살뜰 잘 쓸까?’라고 물어보는 기분이다 유 뻐킹 코리아 김치 새끼야.”
“얌마, 그게 아니라….”
“어쩌다 마녀님들은 저런 맹탕 같은 새끼를 좋아하는 걸까…. 홋카이도의 열혈남아 미마야 타카쇼 님이 여기에 있는데.”
라면 국물까지 후루룩 해치운 타카쇼가 삐딱한 자세로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할 거냐고? 우선 성을 세울 거야. 그리고 성 안에서 내일 죽는 사람처럼 하루 열일곱 번씩 떡치다 복상사할 거다! 거 씨팔 상상만 해도 행복하네!”
질투로 인해 잠깐 불타오르던 타카쇼도 시우의 성향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뭘 고민해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5년을 넘게 함께한 사이인 것이다.
시우처럼 강단 없는 성격이라면 네 명의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도 나겠지.
더군다나 예소드 백작에게 중요한 ‘연구’를 빌미로 섹스하게 되는 것 역시 은근히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여기까진 진심이고. 이제 본론을 말해보자면. 너는 내가 말려도 어차피 예소드 백작님이랑 섹스할 걸?”
“왜?”
“그 신시우가 잘도 사람 죽어가는 걸 넋 놓고 보고 있겠다. 게다가 마망이랑 실컷 뷰지팡팡까지 했다며. 넌 떡정 무시 못 한다?”
타카쇼는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이며 말했다.
“그냥 좆됐구나 복창하고 도게자 박아. 어차피 너도 그래야 한다고 느끼는 거잖아.”
“그렇지.”
“사람 살리는 일이라치면 그 네 분이 널 혼쭐 내시겠냐. 뺨 몇 대 맞고 말겠지.”
어물쩍거리던 와중 타카쇼의 직언은 역시 탁월한 효과를 주었다.
페리윙클에게 받았던 조언도 있으니 이제야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할 결심이 들었다.
“당장 해야겠다. 조언 고마웠다.”
“아, 그리고 시우.”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는 타카쇼.
“내가 너 기만질 아니꼬워서 뭐라 하긴 했는데. 내 생각에 너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겠다 싶다. 그러니까 일단 5P부터 시작해 봐.”지극히 타카쇼 다운 충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