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15화 (415/917)

#415

1.

샤론과 쌍둥이의 엉뚱하고도 에로한 해프닝을 보게 된 이후.

시우는 보더 타운 외곽 고원지대를 찾았다.

오늘은 엘로아와의 선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대련.

새하얀 눈으로 덮인 설원의 한복판에 시우와 엘로아는 마주 서 있었다.

다만 이제껏 해왔던 대련과는 조금 달랐다.

엘로아는 계약검을 꺼내 들고 6개의 계약을 사용하기로 했으며, 시우 또한 붉은가지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검은 갑주에 리본까지 꺼내 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또한 검술 혹은 창술이 아닌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마법을 사용하라고 지시받았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평야를 수련지대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겠지.

“준비되었는가?”

“네, 스승님.”

새로운 힘을 얻었으면 정제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그것도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힘이라면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시우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무의식을 들여다본 이후 대련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다.고작 갑옷을 두르고 있음에도 느껴진다.

시우는 강해졌다.

그 강함이 엘로아에게 어느 정도까지 통용되는가.

남자라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전력을 사용해도 좋네.”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그대의 걱정을 살 정도는 아니라네.”

엘로아는 웃으며 자세를 고쳐 잡는다.

“계약한다.”

동시에 세찬 바람과 함께 그녀 주위에 쌓인 눈발이 분홍빛 소용돌이에 감긴 듯 휘몰아쳤다.그저 마력을 일부 방출한 것만으로 저만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엘로아의 몸이 사라졌다.

물리적인 힘만으로 수행되는 고속 기동.

발목까지 쌓인 눈더미는 그녀의 속도를 뒤쫓지 못하고 한참 뒤에야 홍해처럼 갈라질 뿐이다.

“피어라!”

시우는 충격에 대비해 자세를 낮췄다.

그녀가 할애한 계약은 전체 계약 횟수의 절반인 6개이다.

그러나 엘로아가 본래 신체 강화에 할애하는 계약이 여섯인 만큼 단순히 피지컬적인 부분에서는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 헉!”

좌에서 우로, 다시 우에서 좌로.

변화무쌍한 보법으로 페인트를 준 엘로아의 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채 지척에서 검을 휘두른다.예전이었다면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갑주 옆구리가 움푹 패여 날아갔을 그 공격을….

-콰아앙!

시우는 비스듬히 창을 세워 흘려보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생겨난 침착함이 제대로 식별하지도 못한 공격에도 몸을 먼저 움직인 것이다.

-콰앙! 콰앙! 콰앙!

동시에 종횡무진하게 이어진 상하좌우의 참격 역시 흘려내고 흘려내고 흘려낸다.

강함을 부드러움으로 제압하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극치.

얼핏 시야를 스쳐 지나간 엘로아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새겨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막고만 있다 하여 능사가 아니다.

보통 근접전에서 우위를 점하는지라 인파이트를 선호하는 시우지만 스승님을 상대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거리를 벌려 리본까지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휘리릭! 휘리릭!

수십 가닥의 검은 리본이 빙글빙글 꼬아진 채 엘로아를 향해 날아갔다.

그 모든 촉수가 마치 손이라도 되는 양 자유자재의 각도와 속도로 시우와 엘로아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중장비급 출력을 지닌 리본이라 할지라도 엘로아의 검격 앞에는 버들잎처럼 찢어질 뿐.엘로아는 눈을 어지럽히는 요란한 방어 속에서도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고작 이것으로는 날 멈출 수 없느니라!

그 몸짓이, 무겁게 내딛는 한 걸음이 소란 속에 외치는 듯하다.

엘로아가 일섬(一閔)으로 수십 가닥의 리본을 베어냈을 때.

발밑의 눈더미가 일제히 솟아오른다.

리본을 뻗는 순간 땅 밑으로 배치해두었던 리본들.

그것들이 무방비한 엘로아의 후위를 잡으러 시간차로 튀어나온 것이다.

동시에 검은 갑주가 앞으로 질주했다.

꼬나 쥔 창이 노리는 곳은 회피가 어려운 복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직선이 앞을, 구불구불 변화무쌍한 곡선이 뒤를.

이 모든 일이 대련 시작 3초 만에 일어났다.

그렇기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자들의 대련인 것이다.

“후읍….”

그에 대한 엘로아의 반응은 단순했다.

짧은 호흡 뒤에 검을 휘두른다.

단, 아주 빠르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속도의 한계를 초월한 검격의 연속은 더는 하나의 선이 아니었다.

면을 넘어 공간을 점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날카롭게 베어낸다.

찰나의 순간 수천 개의 선과 함께 펼쳐진 검역(劍域)은 일대를 순간의 진공 상태로 만들어낸다.

아무리 갑옷으로 무장했더라도 저 살벌한 영역에 발을 들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채 나뒹구는 리본 조각과 주위의 공기를 빨아들인 탓에 솟구쳐 오르는 눈송이.

엘로아는 주춤한 시우에게 역으로 달려든다.

왼쪽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올려 베는 참격.

역동작에 걸린 시우가 피해낼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절묘한 각도.

만병지왕의 계약이 없어도 그녀는 오랜 경험과 노력을 바탕으로 가장 최적의 수를 둘 수 있는 최고의 검사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예상했다.

그 무시무시한 스승님이 눈에 흙 뿌리기 같은 수단에 넘어가지 않으리라고.

따라서 한가지 수를 더 준비했다.

-후웅!

시우는 미리 계산하고 있던 좌표 이동식을 발동했다.푸른 빛의 번뜩임이 순식간에 시우의 몸을 휘감고.엘로아의 검격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다.

……

갑자기 사라져 버린 시우의 모습에 뒤를 돌아보려던 엘로아는 등에 맞닿은 딱딱한 창대를 느꼈다.

그녀의 뒤로 점멸한 시우가 곧장 배후를 잡은 것이다.

엘로아의 몸이 우뚝 굳더니 별수 없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내가졌군.”

뒤를 돌아본 그녀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2.

시우의 좌표이동식으로 나란히 방에 돌아온 두 사람은 가볍게 몸을 씻고 벽난로 앞에 앉았다.물론 따로 씻었고 함께 마실 꽤 괜찮은 위스키도 준비되었다.

온수에 달궈졌던 몸이 찬 공기에 식을 때쯤 위장을 달구는 주정과 벽난로의 온기.

이만큼 졸음이 솔솔 몰려오는 것이 없다.

담요를 덮은 엘로아는 미소를 지은 채 시우를 바라보았다.

“기특하네. 대단하네. 역시 내 제자라네.”

시우는 오늘 처음으로 엘로아와의 대련에서 승리했다.

여태껏 너무 긴 딜레이 탓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던 좌표이동.

양자의 간극과 위치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그 사기적인 이동기를 통해 엘로아의 등을 창대로 콕 찌른 것이다.

그것도 계약을 6획이나 소모한 스승님을 상대로 말이다.엘로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실컷 치켜세울만한 공훈이었다.

“또 하나의 벽을 넘었군. 정말 축하하네.”

하지만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쏟아지는 엘로아의 폭풍 칭찬에도 시우는 머쓱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다.조금은 더 우쭐해도 좋을 텐데 말이다.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감사해요. 전부 스승님께 배운 덕이죠.”

시우의 미묘한 반응을 보던 엘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녀도 내심 입 밖에 내지 않던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네. 내 뒤를 잡을 수 있는 마녀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네."

시우는 눈치채고 있었다.

엘로아는 마지막 일격을 내지르는 순간 망설였다.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좌표 이동식은 단거리라고 해도 많은 연산과 변수 대입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동안 시우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비앙카처럼 단순 원거리 마법에 치중한 마녀라면 몰라도 스승님처럼 근접에서 몰아붙이는 타입의 경우 놓칠 리 없는 빈틈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엘로아는 무방비 상태의 시우를 보고 검격을 망설였다.

설령 갑옷으로 방어하고 있다 한들 사랑하는 제자를 다치게 할까 염려해 억지로 힘을 줘 검을 멈춰 세웠다.

힘을 뺐다.

그 빈틈이 있었기에 시우도 연산을 마저 할 수 있었다.

만약 엘로아가 사정을 봐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면 얄짤없이 얻어맞고 눈밭을 굴렀을 것이다.사실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마냥 맘 놓고 웃을 수 없던 것이다.

엘로아는 그런 시우의 뺨을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시우, 날 보겠나?”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머금은 엘로아.

아름다운 눈동자는 어머니의 것처럼 자애를 머금고 있다.

첫 만남 때를 생각하면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엘로아의 엄지가 가볍게 시우의 입꼬리를 잡아 위로 올렸다.

“웃어도 좋네. 그대가 아쉬워하는 것은 그만한 향상심이 있었기 때문일세. 예전이었더라면 내가 잠시 봐주었다 한들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었겠나?”

“하아, 스승님은 못 당하겠네요.”

“난 그대가 자랑스럽네. 조금의 거짓도 없이 진실이야.”

그렇게 빤히 시우와 얼굴을 맞대던 엘로아의 입술이 움찔거린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자세가 워낙 그런 자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이다.엘로아는 즉흥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그런 그대를 위해서 선물을 조금 주고 싶네만…. 혹시 내게 바라는 것 없나?”

새초롬하게 눈을 피하며 입술을 모으는 엘로아.이런 모습 또한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이거면 좋을것 같네요.”

그제야 시우도 자연스럽게 웃으며 엘로아의 입술에 가볍게 뽀뽀를 해주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 엘로아.

웃음을 감추기 위해 두 손으로 입가를 감추고 몸을 새우처럼 웅크렸다.

조금 뒤.

애써 웃음기를 가라앉히고 위스키를 홀짝인 엘로아가 자세를 바르게 하자 시우가 물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대련이라니 무슨 일 있나요?”

“그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네.”

“ 답은요?’’

라울 정도더군.”

시우의 전투 스타일은 엘로아와의 궁합을 따지자면 극악이나 다름없다.

그는 일반적인 마녀들이 약한 근접전을 유도함으로써 전술적 우위를 점한다.

그렇기에 검술의 달인 엘로아에게 잡아먹히는 상성인 것이다.

완벽히 동일한 전법을 구사한다는 것은 격차를 뒤집을 변수가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니 말이다.

따라서 시우가 엘로아에게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엘로아가 눈여겨 보려던 것은 늘 그렇듯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다.그런데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다고는 해도 뒤를 잡아 승리하다니.

“그대는 붉은가지도 없었지 않았는가? 만약 있었더라면 또 결과가 달라졌을 걸세.”

시우는 저렇게 겸손하게 굴지만 듣자하니 붉은가지의 통제에도 뛰어난 성취가 있었다 한다.

‘불합리’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사기적인 성능을 지닌 창이 있더라면 또 어떤 양상이 나왔을런지.

“붉은가지가 있으면 단거리 좌표이동도 더 딜레이가 생기니 확답은 드릴 수 없네요. 하지만 확실히 예전과 다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그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시우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케테르가 그의 몸에 간섭했다는 사실도.

그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강해질 수 있던 이유도.

“또또또, 자신 없다는 식으로만 말하는군. 그대는 욕망의 마녀도 무찌르지 않았는가?”

“전에도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그대의 무의식이 했다는 말인가?”

“사실이 그렇습니다.”

엘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의 옆에 몸을 작게 웅크려 앉았다.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엿듣는다.

그것만으로 의지가 되는 소중한 사람.

“시우는 강하다네. 케테르가 남겨 놓은 그대의 무의식만이 강한 게 아니야.”

엘로아는 그가 욕망의 마녀를 쓰러뜨리기 직전까지 간 것이 단순히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그대의 마음과 용기가 그대를 강하게 하는 것이지.”

말할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이제 시우는 예전의 나약했던 시우가 아니다.

엘로아가 잠시 옆을 비우더라도 능히 이겨낼 힘이 있다.그렇게 작게 곱씹는다.

“오늘따라…. 애교가 많으시네요.”

잠시 머뭇거리던 시우를 살포시 엘로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민망하게도, 그대 옆에만 있으면 어리광이 피우고 싶어진다네.”

“과분한 사랑에 항상 감사할 따름이죠.”

“아무튼… 그대라면… 대마녀 급의 전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걸세.”

느릿하게 늘어지는 엘로아의 말.

아무래도 계약을 활용해 몸을 강화했고 시우의 품에 안기기까지 했으니 뒤늦은 졸음이 몰려오는 듯했다.

“이제…. ...없어도…. 잘해낼수….”

“침대로 옮겨드리겠습니…. 잠드셨네.

마지막 말은 하품에 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곤히 잠든 엘로아의 볼을 시우는 괜스레 찔러본다.

몇 번을 찔러도 반응이 없는 엘로아.

자율방어는 당연히 발동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우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온전히 시우에게 몸을 맡긴 모습에 괜스레 미소가 지어진다.이 상태라면 아마 가슴을 주무르거나 야한 장난을 쳐도 꼼짝없이 주무시겠지.

“이런.

예고없이 솟는 음심을 억눌렀다.

이건 전적으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잠든 스승님 때문이다.

자면서도 유혹하는 스승님이라니, 이 어찌나 무서운 매력인지.

시우는 엘로아를 번쩍 들어 침대로 옮겨주고 마저 마법 연구를 하기 위해 작업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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