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국 제대로 된 대화도 시도하지 못한 채 문전박대당한 시우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변명을 주워섬기자면야 백작이 먼저 들이대며 유혹한 것이고,
또 이후로 몸을 섞은 것 역시 마법 연구라는 공통의 합의를 거쳐 이뤄진 것이다.그러나 곧이 곧대로 말한다고 들리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성교를 통해 마법적인 강화를 꾀할 수 있다고 해도, 예소드 백작처럼 예쁜 누님과 함께 잠자리할 수 없게 된다고 해도.이제 정리할 부분은 정리하자고 생각했다.
시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방문을 두들겼다.
아마 디아나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녀에게서도 썩 좋은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들어와도 좋아요.”
기품이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온 이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언제나 함께 공부하던,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뜨거운 성교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던 백작의 개인 서고.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요.”
“병문안을 와주셨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어요. 감사해요.”
그녀는 두툼한 털옷을 걸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꽁꽁 몸을 싸맨 채 시우의 인사를 받았다.다만 분위기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거리감이랄까, 명백히 간극이 느껴지는 환대.
헤어지기 전 예소드 백작의 행동패턴으로 예측해보자면 오랜만에 재회에 당장 키스 세례를 퍼부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더욱이 시우가 사지를 넘고 돌아온 판국에야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잔에 든 커피를 홀짝일 뿐, 제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남성의 몸으로 태어나 홀로 마법을 연구하고, 그 마법을 통해 욕망의 마녀까지 패주 시킬 줄이야.”“과찬이십니다. 전부 운이 좋았던 것인데요.”
사실 시우는 이러한 칭찬들이 조금 어색했다.
먼저 반반 싸움으로 끌고 간 것은 시우 자신이라기보다는 폭주하는 그의 무의식이었다.
또 비앙카는 니가와 포킹이 특기였던 주제에 좁은 케이지에 자신을 가두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 실수 속에서도 아멜리아가 없었더라면 마지막 반격에 목숨을 잃는 것은 시우 쪽이었을 테니, 딱히 어깨가 으쓱하지도 않은 것이다.
“겸손이 지나치면 그건 더는 겸손이 아니랍니다. 시우 씨는 앞으로 마녀 사회에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겠죠. 충분히 자랑할만한 성과에요.”
아무튼
오늘1H녀를 찾아온 이유는 과외를 위한 것이 아니다.
향후 관계를 확실히 함과 동시에 그녀에게 나름의 사과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육체적 관계부터 시작된 가벼운 만남이었다 한들 이별을 위해서라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슬슬 말을 꺼낼 타이밍을 잡고 있던 차에 백작이 먼저 입술을 달싹였다.
“그나저나, 조금 놀랐어요.”
“어떤 점이요?”
“시우 씨가 그렇게 큰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건 몰랐거든요.”
“비밀이라 하심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리는 백작의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질 무렵.
“시우 씨, 왜 저에게 말해주지 않으셨나요? 시우 씨의 연인이 티페레트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평정을 지키고 있던 예소드 백작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불쾌함이나 배신감 같은 것은 없었다.
애초에 불장난과 연구를 전제로 이루어졌던 만남.
그녀 또한 시우의 옆에 다른 마녀가 있다는 것은 이미 숙지하고 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배신감은 조금도 없다고 말해둘게요.”
따라서 백작이 머리를 쥐어 싸매고 울상을 지은 것은 하필이면 내연남의 정실이 뚜신이라 추앙받는 티페레트 공작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시우 씨! 상대가 티페레트 공작님이었다면! 조금은 귀띔을 해주셨어야죠!”
게헨나에 셋밖에 없는 작위에 걸맞게 그만한 무력을 지닌,
케테르를 제외하면 누구보다 많은 마녀를 제 손으로 숙청한,
또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데 누구보다 ‘올곧고 강직함과 동시에 엄격한’ 마녀.
“스승님이랬으면서! 설마설마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어요!”
예소드 백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지듯 시우의 앞에 섰다.
그녀의 눈 밑에 옅게 서린 그림자가 그간의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듯했다.
마녀가 추구하는 것은 자성마법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
따라서 게헨나의 작위는 적어도 마녀 간에는 그다지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작위 자체가 케테르가 초기 게헨나를 설립할 때 도움을 주었던 마녀를 대상으로 이권을 주기 위해 붙였던 것이지 현세의 장관이니 차관이니 하는 것처럼그 자체로 부여되는 특권은 적으므로,
백작이니 공작이니 하는 작위 상의 차이가 권력의 상하관계를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예소드는 게헨나 내부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 가문이었다.
반면 티페레트는 그녀를 존중하는 몇몇 마녀의 후원이 없다면 하룻밤 만에 파산해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정한 재정상태였다.현세에서 끼치는 영향력 또한 예소드 가문이 앞섰으니 상대가 티페레트 공작이라 한들 꿀릴 것이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예소드 백작은 티페레트를 만난 적이 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겪은 적이 있다.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과 말투.
제자의 목숨을 앗아간 세상에 복수하기 위해 미친 듯이 공적을 잡아들이고, 또 호문쿨루스를 잡아들이던 복수귀.
그녀의 폭력적인 무위와 벼려진 칼날 같은 눈빛은 천하의 루시 예소드 조차 주눅 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큰 문제였나요?”
시우는 오가는 대화 속에서 예소드 백작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많은 마녀가 티페레트 공작을 ‘경외’한다 하지 않았던가?
경외의 경(敬)은 한자로 존경할 경이며, 외(뿌)는 두려워할 외이다.
요컨데 예소드 백작도 예외 없이 티페레트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하긴 그럴 법도 하다.
스승님이 해온 일은 조금 귀엽게 표현하자면 미니 케테르적 행보였으니 말이다.
최근 언제나 은은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만을 보았기 때문에 간과하고 있었을 뿐 첫만남 때만 해도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당연하죠 시우 씨는 티페레트 공작께 배움 받고 있다 하시지 않았나요? 그녀가 어떤 마녀인지는 저보다 잘 알고 있을 것 아니에요!”
“스승님은 그렇게 무서운 분이 아닌걸요?”
“당연히 시우 씨에게는 상냥하시겠지요! 누가 연인에게까지 칼같이 굴겠어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친 백작은 목이 타는지 뜨거워 보이는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한숨을 쉬며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저도 제가 잘했다고는 말을 못 하겠어요. 시우 씨는 엄연히 연인이 있다고 말해줬고 그걸 무시하고 몰아붙인 건 저니까요.”
“저도 똑같습니다. 백작님의 탓만이 아니에요.”
“그래도, 최소한 제가 뒷감당할 수 있는 상대인 줄 알았어요. 훗날 관계를 인정받을 생각도 했고요. 비겁한 말이겠지만 설마에 설마에 설마 티페레트 공작님이실 줄이야….”
설령 그녀가 관계를 맺을 당시 연인의 정체에 관해 물었어도 시우는 샤론의 이름을 댔을 것이긴 하다.그때까지만 해도 스승님의 봉인으로 기억이 제한되어 있던 상태였으니까.
거의 좌절 모드가 된 백작이 시우의 팔뚝을 단단히 쥐었다.
“혹시, 들킨 건 아니겠죠? 하긴, 그럴 리가 없죠. 들켰으면 벌써 찾아오셨을 거에요.”
“백작님 조금 침착하시는 건 어떨까요?”
“침착이라뇨…. 당신 정말 티페레트 공작에 대해 조금도 모르네요.”
“꼭 저에게 뿐만이 아니라 스승님은 분별 있는 분이셔요. 괜한 분풀이도 하지 않으시고요.”
얘기에 앞서 그녀가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같아 일러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간지러워지는 귀를 긁적이고 있을 스승님의 명예를 위해서도 설명이 좀 필요할 성 싶었다.
“정말… 요?”
“당연하죠. 겉보기에는 무섭고 딱딱한 분이시지만 사정만 설명해도 충분히 이해해 주실 거에요. 화를 내시지도 않을 거고요.”
예소드 백작으로서는 어디까지나 공작의 애인 입에서 들려오는 평가이다.
객관적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시우의 말투에서 묻어나오는 짙은 신뢰의 기색은 백작을 안심시키기 충분했다.
진위를 판별하겠다는 양, 한참이나 지긋이 주홍색 눈동자로 시우와 눈을 마주치던 백작은 뭐 마려운 강아지 소리를 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시우 씨 말을 다 믿지는 못하겠지만, 절반만 사실이래도 한 시름 놓은 거 같네요.”다리에 힘까지 풀렸는지 털썩 소파에 앉은 백작은 지친 표정으로 연거푸 긴 숨을 내뱉었다.
“나쁜 짓을 함부로 할 것이 못되네요.”
“떳떳한 일만 하고 사는 게 최고인 것 같긴 합니다.”
시우도 그녀의 앞에 마주 앉고 쓴웃음을 나누었다.그래도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었다.
원래 거절이라는 게 당하는 사람도 당하는 사람이지만 단절을 선언해야 하는 사람도 부담이 생기는 법이다.
가볍게 시작했다고는 하나 질펀하게 몸을 섞느라 소위 떡정도 생겼고 그녀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걱정도 됐었는데.뭔가 대화 흐름이 ‘불륜은 그만두죠’ 쪽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내용입니다만 저희 연구는 여기까지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말한다.
여기서 연구란 당연히 사정 시 마력 증폭 작용에 관한 연구이다.
“네?”
그에 따른 백작의 반응은 시우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만… 만나자고요?”
“그만 만나자기보다는…. 성관계를 맺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소한의 떳떳함을 위해서 라도요.”
“그럴 수가….”
이제껏 실컷 흘러가던 대화 주제와는 정반대로 백작은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라도 들은 듯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불과 1분 전까지 그렇게 티페레트 공작의 진노를 걱정했으면서 말이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도….”
“아니요. 저에겐 시우 씨의 몸을 연구하는 것도 굉장히,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말허리를 끊고 들려온 진중한 목소리.
어느덧 예소드 백작은 뚫어지라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몸짓에는 단순히 육체관계에 대한 미련처럼 보이지 않는 확고한 기대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거 보세요.”
백작이 슬쩍 손을 흔들자 테이블 위에 있던 두툼한 서류 뭉치가 손으로 날아들었다.시우의 앞에 촤르륵 그간의 분석자료를 펼쳐 보였다.
비록 반쯤 날림이라고는 하나 지금의 시우는 예전 야매 마법사 시절과는 다르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기초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소드 백작이 보여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절반 가량은 읽어낼 수 있다.
“보셨죠? 시우 씨는 관계를 맺을 때 단순히 마력을 충전해 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주입한 순수한 마력을 통해 낙인에 새겨진 회로를 본뜨고 있어요.”
백작은 열의에 띤 목소리로 온갖 복잡한 그래프가 난잡하게 그려진 자료를 보여주며 조목조목 각 항목을 시우에게 설명했다.
성관계 시 그의 마력이 어떤 식으로 자성마법에 관여하는지에 대해 말이다.
“역시 그렇군요.”
“역시라뇨?”
그리고 백작의 말은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현 상황과 겹쳐진다.
아인에 새로이 합류한 마법은 모두 질내사정을 했던 상대의 것이었다.
차례로 예빈, 에아, 샤론, 엘로아, 루시.
그녀들의 자성마법 역시 복사되어 시우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시우는 그 사실과 더불어 얼마 전 기억의 궁전에서 관측한 것을 백작에게 털어놓았다.
자신의 가설이 옳았음을 확신한 예소드 백작은 손뼉을 짝 치며 눈을 빛냈다.
언제 주눅이 들었냐는 듯 기운이 펄펄 넘쳤다.
“그거 봐요 시우 씨! 이걸 잘 정립해내기만 한다면 어쩌면 낙인의 ‘전이’ 같은 것도 가능할 수 있어요! 선대가 죽지 않아도 견습마녀가 낙인을 물려받을 수있는 거죠 물론 그걸 위해서는 상세 수치 조절과 훨씬 많은 표본의 추출이 필요할 테지만…! 가히 혁신이 될 거라고요!”
“아….”
시우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디아나가 루시가 떠나길 원치 않듯.
루시 역시 디아나를 홀로 남겨두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우의 존재는 이 곤란한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 된 것이다.티페레트 공작의 눈살이건 아니면 저항이건 뒷전으로 미룸직했다.
“시우 씨,이렇게 부탁할게요. 조금만 더 연구를 도와주세요…. 제 개인적인 사심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저와 디아나에게는 시우 씨의 도움이 꼭필요해요.”
백작은 필사적으로 시우의 손을 움켜쥐었다.
조금만 거절의 기색을 내비쳐도 당장 옷을 벗고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일단은…. 알겠습니다.”
찜찜하기는 해도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성욕의 문제가 아니라면 시우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었다.
어찌보면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잘라버리라는 말인가?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시우 씨…!”
이 정도 사유라면 어느 정도는 네 여인에게 참작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그런 생각을 하며 시우는 일단 긍정적인 사인을 비춰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