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410화 (410/917)

1.

그 유명한 남자 마녀가 욕망의 마녀와 맞서고 살아 돌아왔다더라.

소문이 느릿하게 돌기로 유명한 마녀들 사이에서도 위 소문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게헨나 골목 구석구석까지 파다하게 퍼졌다.워낙에 자극적이고 놀라운 뉴스였던 까닭이다.

방 밖을 거의 나서지 않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디아나의 귀에도 들려왔으니, 얼마나 커다란 이슈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소식을 처음 접했을 당시 디아나는 괜히 어깨가 우쭐해졌다.

그녀의 첫 키스를 받아간 남자가 그렇게나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니.

내심 남들보다 빨리 그의 진가를 알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콧대가 높아진 것이다.

물론 단박에 몰라보고 위치보드에서 농락당했던 일 정도는 사뿐히 덮어두었다.

누굴 그 자리에 앉혀놨더라도 디아나 자신과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는 합리화와 함께 말이다.

물론 머지않아 그의 소유권을 어머니에게 양도했던 사실이 떠올라 살짝 우울해졌지만.

아무튼 그를 만난 것은 마지막 수업, 그리고 어머니를 유혹해 주는 부탁을 기점으로 거의 나흘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오늘부터 정상적으로 수업이 진행된다는 이야기를 들어 내심 가슴이 떨린다.

별 의미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 두 시간 전부터 꽃단장을 할 정도로 말이다.

“디아나 아가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안녕해요. 오랜만이네요.”

평소처럼 살짝 얼빠진 표정과 함께 방에 들어온 시우.

그를 보는 디아나는 괜스레 신비로움을 느꼈다.

디아나의 놀이 가정교사이자 흑기사이자 어머니의 애인이 될 남자.

신시우가 호문쿨루스를 멋지게 무찌르며 디아나를 구해내던 모습은 생생히 기억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상대하고 살아 돌아온 적은 악명 높은 공적 중 일인인 22 위계 욕망의 마녀다.

동 위계의 어머니가 얼마나 훌륭한 마녀이며 그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해 알고 있는 디아나로서는 그의 무용담을 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막연히 믿었던 소문임에도 시우를 다시 보게 되자 새삼 의문을 표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들어오세요.”

“네.”

디아나는 쪼르륵 소파로 걸어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일전 발목을 삐었을 때 그가 치유 마법을 사용해 주었던 소파였다.

“몸은 좀 어떤가요?”

“쌩쌩합니다.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래요?”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라….

그렇게 태평하게 말하는 점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그 정도의 위업을 달성했으면 자랑하거나 거들먹거릴 법도 한데 평소와 완전히 똑같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진짜이겼어요?”

“네?”

“욕망의 마녀랑 싸워서 이겨 돌아왔다면서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조금만 말해줘요. 어떻게 된 건가요?”

결국 치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한 디아나.

자각하지는 못했지만 상체까지 앞으로 잔뜩 기울인 채 열렬한 호기심을 표한다.

디아나에게 있어 시우와의 대화는 사악한 용을 잡아낸 용사에게 인터뷰를 하는 것만큼이나 흥분을 자아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이긴 거면 이긴 거고 진 거면 진 거지. 이겼는지 잘 모르겠는 건 뭐예요?”

“설명해 드리자면 좀 깁니다.”

“길어도 괜찮고 재수 없게 뻐기면서 자랑해도 좋아요. 말해줘요.”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도 조금 섞여 있고, 말씀드릴 수 없는 부분도 있는지라….”

미적지근한 시우의 반응에 디아나의 눈썹이 일자로 곧게 펴진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관심도 귀찮고 주목받는 것도 싫어하는 디아나지만, 만약 디아나가 훗날 강대한 공적을 쓰러뜨린다면 15분 정도는 그 치열한 싸움에 대해 썰을 풀어놓을의사가 있다.

지나치게 말을 피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수상함만을 안겨주었다.

가령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면….

지나친 디테일을 입에 담는 것을 피할 법도 하다.

“흐음….”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셔도 안 됩니다.”

흐으음…. 역시 뜬 소문은 믿을 게 못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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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해도 안 넘어갈겁니다.”

원래 숨기려 하면 할수록 궁금하고 의심스러운 것이 사람의 심리다.

“알겠어요. 정 그렇다면 사정이 있겠죠.”

그러나 디아나는 이미 시우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쌓고 있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고 무려 어머니를 유혹해 달라는 발칙한 부탁을 할 정도로 말이다.

“나중에라도 내키면 말해주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법전투를 직접 하는 것은 무섭기도 하고 싫지만 남의 무용담을 듣는 건 다르다.

위치보드 초절정 고수인 그가 어떤 식으로 마법을 활용해 싸웠는지 들으며 이번 수업을 마무리 짓고 싶었는데.

내심 아쉬움을 감추는 한편, 디아나는 오늘 그 외에도 할 말이 있었다.

머지않아 게헨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어주는 커다란 축제가 열린다.

한 해의 수확물에 감사를 표하며 사흘간 흥청망청 놀고 마시는 수확제가 바로 그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 수확제가 단순히 ‘축제’를 넘어서 연인과 연인 사이의 애틋한 마음을 확인하는 그런 시기라는 것.

눈이 내리는 수확제에 맺어진 커플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까지 영원한 사랑에 빠진다는 속설 따위도 있었다.출처도 알지 못하고, 딱히 신빙성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소설에서 읽어둔 바 있다.

원래 사랑에 빠진 남녀는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성에 좌우되는 법.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어머니와 그가 이어진다면 엄마는 조금 더 삶에 미련이 남을 테고, 디아나의 목적은 엄마가 계승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었다.설령 그것이 명백히 눈길이 가는 남자를 대가로 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나저나, 그거 알죠?”

“그거라뇨?”

“곧 수확제에요. 당신도 게헨나 노예 출신이라고 했으니까 알 것 아니에요.”

“아….”

디아나의 말을 들은 시우는 애써 모른 척하려 했던 텁텁함이 다시 혀 위를 덮는 것을 느꼈다.

수확제는 사실상 크리스마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종교와 삶이 분리된 현세가 그렇듯 게헨나의 수확제는 축제의 의미를 넘어선 기념일 같은 것이다.

“레바나 대욕장에는 로맨틱한 장소가 많거든요. 괜찮은 장소들을 알려줄 테니까 엄마랑 좋은 시간 보내요.”

태연한 척 말하지만 얼굴이 슬쩍 붉어져 있는 디아나.

하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쌍둥이의 노상 키스에 스트립쇼를 보기라도 한 양 펄펄 날뛰었다.

그런 그녀에게 예소드 백작과의 뜨거운 불장난을 들켜버린 뒤로 부탁을 받았다.

엄마를 유혹해 계승을 미뤄달라고.

둘이 만나 어떤 일을 하는지까지 알게 되었으니 아무렇지 않은 안색으로 입에 담을 말들은 아니었다.

“와인도 근사한 것으로 준비했고 엄마도 저랑 놀려고 일정을 비워놨을 거예요. 당신도 남자니까 선물 정도는 알아서 준비하고요.”

사실 일전 디아나의 부탁에 대해 시우는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엄마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디아나의 마음도 이해가 갔고.반대로 사랑하는 여자들을 배신하는 것 같은 양심의 가책도 느꼈다.한참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 기억의 궁전을 거닐게 된 이후 또다시 고민이 추가되었다.

시우의 옆에는 샤론과 쌍둥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 아픔을 끌어안은 채 먼 발치에서 시우만을 바라봐주던 엘로아도 있었다.

그리고 시우는 느꼈다.

당장 엘로아가 그랬듯, 당장의 선택이 힘들다고 어중간하게 대답을 유보한다면 원치 않게 힘들어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비록 페리윙클은 미안하다면 미안한 만큼 더욱 사랑하면 되는 거 아니야? 라는 말을 했지만….

애초에 백작과의 관계는 초반에는 그녀의 유혹, 훗날에는 시우의 신체 탐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던가?

가볍다면 가벼운 관계까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런 의문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시우는 예소드 백작과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했다.

적어도 나머지 네 연인에게 허락을 받거나, 혹은 시우 자신이 확실하게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라도 말이다.

열심히 나름의 데이트 코스를 설명하려던 디아나의 표정이 침묵을 지키는 시우를 보며 시시각각 바뀐다.

처음에는 이상함, 그리고 의심, 그리고 살짝의 경악.

모든 몸동작이 굼뜨기 짝이 없는 디아나지만 눈치만큼은 기민하고 비상했다.

“...잠시만요. 당신 설마…!”

“디아나 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물결처럼 출렁이던 디아나의 표정이 얼음처럼 쨍 굳었다.나른해 보이는 눈이 험악해질 정도로 부릅뜬 눈.

안으로 베어 문 입술과 앙다문 양 어금니.

“뭐가요?”

“일전에 제안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죠?”

무섭다.

둘이 마법으로 겨루게 된다면 디아나는 시우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겠지만 맞붙어서 이길 수 있다 하여 능사가 아니다.그녀의 분위기 자체가 굉장히 무서웠다.

“사실 말씀을 드리지 못했지만, 저에게는 연인이 있습니다. 관계의 시작부터 그렇게… 음…. 무거운 관계는…. 음….”

백작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굳이 그녀가 먼저 유혹했다는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다만 체감상 새 아빠가 되리라고 기대하던 이혼녀의 딸 앞에서 ‘나 사실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재혼은 무리야. 잘 지내렴’이라고 고백해야 하는 느낌.

샤론이 말했던 위가 꼬일 것 같다는 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뭉그적거린다면 디아나에게도 예소드 백작에게도 헛된 기대나 남기게 되겠지.

“죄송합니다. 예소드 백작님을 유혹할 수는 없어요. 모두 제 탓입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디아나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시우.

“우리 엄마를….”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게 끌리는 목소리.

당혹과 배신감 그리고 어이없음이 묻져나오는 비브라토 발성에서 디아나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먹고 버려?”

원래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또한 같은 상황이라도 받아들이는 입장과 생각에 따라서 같은 사건이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디아나의 단어 선택은 그녀가 바라보는 시우의 행보를 대변해주었다.

이러나저러나 그녀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시우이니 명쾌히 변명할 거리도 없었고 말이다.

“우리 엄마를 먹고 버리겠다고?”

기본적인 존칭도 생략된 채 또박또박 말하는 디아나.

제로백 1초의 스포츠카처럼 급발진하는 디아나의 모습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말을 하려 했으나….

“이…! 짐승 같은 새끼!”돌아오는 것은 술잔을 쥔 디아나의 풀스윙이었다.

띵 하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시우의 옆머리에 튕겨 나가는 유리잔.

“나쁜 새끼!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그딴 식으로 취급해!”

“디, 디아나 아가씨…! 일단 제 말 좀…!”

“나가! 나가! 당장 사라져 !”

예소드 백작이 디아나를 사랑하듯, 디아나 역시 자신의 어머니를 깊게 사랑하고 있다.하지만 갑자기 어머니와의 동침을 그저 그런 인조이라고 표현하는 듯한 그의 모습이.간신히 찾았던 희망이 사라지는 듯한 허무함이.

마치 불씨처럼 디아나의 분노에 도화선을 당긴 것이다.

대화를 시도하기에는 아주 그른 것 같은 상황 속에서 디아나는 물건을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마다 시우에게 던져대기 시작했다.

시계, 꽃병, 술병부터 베개, 만년필까지.

그녀가 힘이 조금만 더 셌더라면 테이블까지 뽑아 던질 기세였다.

“내 눈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기만 해 봐 썩 꺼져!!”

서릿발을 넘어서 블리자드 같은 디아나의 샤우팅을 받아내던 시우는 결국 어깨 뒤쪽에 만년필이 꽂힌 채 쫓겨났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 수정 사항

- 수확제가 다가오기까지 추가적인 말미를 두었습니다.

- 휴재 직전 최신회차 '수확제(4)'는 아주 약간 뒤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그사이 허술했던 에피소드를 채워 넣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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