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쌍둥이, 샤론, 스승님과 페리윙클까지.
예소드 백작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감사를 표하고 싶은 마음을 풀며 해우를 나눴다.
그 이후 시우는 아멜리아를 찾아 나섰다.
그녀의 순번이 마지막까지 미뤄진 것은 시우 역시 아멜리아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따라서 처리하기 힘든 감정을 뒷순위로 미루듯 아멜리아를 만나는 것을 차일피일 미뤄만 왔다.
그러나 머지않아 문제에 봉착했다.
그때는 말이 너무 심했다고 사과를 하건, 뭔 얘기를 하건 우선은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눠야 할 것이 아닌가?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아멜리아는 게헨나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굴피나무 숲의 오두막에도.
본래 부교수였던 그녀에게 제공되던 숙소에도.
심지어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 메리골드 저택에도 가보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늘로 세 번째 찾아오는 텅 빈 오두막.
보존 마법이 걸려있어 제법 오래 비어있었음에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테이블을 시우는 복잡한 심경으로 쓸었다.
허전함을 느꼈다.
케테르에 의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던 시우.
어린 시우와 아멜리아가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때가 오두막 구석구석 눈길이 닿을 때마다 개화했다.
함께 밥을 먹었던 테이블이 있고, 나란히 앉아 책을 읽던 벽난로 옆 안락의자가 있고.
마법 지식을 되찾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책상이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하나같이 소중한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기억을 되찾았을 때.
애정과 친애가 원망과 분노와 격돌했을 때.
느꼈던 격렬한 애증을 느꼈다.
시우가 기억하는 아멜리아는 밤시중을 거절했다는 트집을 잡아 온갖 방법으로 못살게 굴었던.
심지어 탈출 직전에 그의 덜미를 잡아채 방해하려 했던 깐깐한 상사였다.
동시에 무뚝뚝하지만 실은 눈물이 많고, 까칠해 보이지만 실은 요령이 없는.
자상한 어머니이자 누나였으며, 연모하던 여인이었다.
시간은 감정을 희석한다.
그녀가 입에 올렸던 ‘기억을 되찾아도 절 용서해 줄 수 없냐는 말’.
당시에는 비겁하고 가증스럽게만 들렸던 그 말에 대해서도 지금이라면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시우에게 남아있는 것은 씁쓸함과 미안함, 그리고 아멜리아에 대한 약간의 난해함이다.
아멜리아는 왜 시우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을까?왜 아무런 대화의 시도도 하지 않았을까?
다시 만난 그 순간 그녀를 바라보았던 냉정한 시선에 마음을 접고 발길을 돌린 걸까?
피어나는 의문이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손끝에 박힌 가시처럼 크게 아프거나 거슬리지 않지만 언제고 박혀있는 기분.오늘은 유달리 그 가시의 돌기가 오돌토돌하게 느껴졌다.
“…하아….”
시우는 한숨을 쉬며 문을 닫았다.
2.
최악의 재회 이후.
아멜리아는 클라라와 함께 게헨나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멜리아를 클라라가 반쯤 들춰 매다시피 데려온 것이었다.
허공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는 아멜리아.
클라라가 식사를 권해도 차를 권해도 마다한다.
책상 앞에 앉아 마법 연구라도 하겠다는 양 며칠째 한 글자도 늘어나지 않은 종이를 놓고 펜을 쥔 채 멍하니 있다.게헨나로 돌아와 클라라의 저택에 머물게 된 이후로 줄곧 저런 상태였다.
사냥을 가야 한다는, 혹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로서는 힘들 것이다.
클라라는 아멜리아를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봐 왔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그녀를 구해내고, 위로하고, 응원하며 그녀 스스로 제 아픔을 털어놓기까지 기다렸다.
아멜리아는 서툴다.
언뜻 보기에는 강하고 오만한 마녀의 표본 같지만 그 속내는 연약한 어린아이.
옆에서 설명해주지 않으면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의지할 곳이 없으면 홀로 도망쳐 마음을 닫고 감정을 숨긴다.그마저도 변변찮지만 말이다.
그런 아멜리아가 케테르에 의해 살아난 신시우의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살생부를 떠맡았다.
차라리 이 업무가 목숨을 건 치열한 사투였더라면 아멜리아에게 부여되는 양심의 가책 역시 덜어졌을 것이다.‘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명제는 아주아주 효과적인 면죄부이니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멜리아는 너무도 강했다.
또한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약했다.
대부분의 사냥은 싸움이 아닌 처형이었고, 어쩔 수 없이 살육을 거듭하며 무너져가는 마음을 지탱해주는 것은 실로 이기적인 기대였다.
‘이렇게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면 그가 용서해 줄지도 모르니까’라는 기대.
냉정히 평가를 내리자면 그것은 삽질이다.
인간 사이의 갈등은 마음을 전하지 않으면, 상황을 전하지 않으면 풀어낼 수 없다.
무슨 외계인처럼 신성한 신경 줄로 정신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당장 용서받을 자신이 없기에 속죄라는 변명을 앞세워 미래에 재회할 상대의 부채감을 쌓는 것.그건 타인의 상냥함에 기대는 자학 행위이자 자위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얼마 전, 그렇게 애절하게 쌓아가던 기대감마저도 박살 나버렸다.
무의식의 신시우와 마주하게 된 그 날 이후로.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기대감마저 떨어진 유리잔처럼 산산이 조각난 것이겠지.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오해와, 그 위로 덧그려지는 또 다른 오해.틀어진 톱니바퀴처럼 엇갈림은 또 다른 엇갈림을 낳는다.
클라라는 그것을 비웃지 않았다.
그녀의 고뇌를, 어리석음을, 그것에서 기인한 처절할 정도의 슬픔을.
가까이에서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극상의 미주조차 비교가 어려운 황홀한 경험이었다.
“아멜리아.”
클라라는, 릴리스는.
그 고통을, 고뇌를, 자기연민을, 후회를, 번민을, 자가당착을.
사랑해 마지 않았다.
그것들이 만들어낸 틈새를 벌린다.
바스라지고 취연해진 마음의 구멍을 통해 기생한다.
“나랑 이야기 좀하지 않을래?”
그것이 속삭임의 마녀가 다른 마녀를 지배하는 최강의 공식이었다.
3.
제머나이 저택의 응접실에는 두 마녀와 두 견습마녀가 모였다.
각각.
샤론 에버그린.
엘로아 티페레트.
오딜 제머나이.오데트 제머나이.
시우와 마음을 나누고 확답을 받은 엘로아는 샤론을 찾아가 그 사실을 고했다.
전후 사정이 어찌 됐건 굴러온 돌이 되었으니 그간 엘로아를 위로해주고 공감해주던 샤론에게 가장 먼저 진실을 알린 것이다.
물론 ‘나는 그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 족하며 그 이상을 욕심낼 생각은 없다’라는 것도 분명히 말해두었다.
아주 욕심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겠으나 파렴치한 스승으로서 그를 독차지할 명분은 없었다.
샤론은 전혀 놀라거나 아쉬워하지 않았다.
엘로아를 끌어안으며 제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샤론 역시 엘로아가 했을 마음고생을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샤론과 쌍둥이가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엘로아의 비밀은 샤론을 통해서만 얘기가 되어 있었고, 쌍둥이와 맺은 평화협약의 조약 아래정보 공유 및 회의의 장소를 갖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티페레트 공작님.”
“진짜 공작님이시네요….”
“이렇게 모두 모인 것 처음 같네요.”
“샤론 언니, 식사는 몇 번 같이 한 적 있었잖아요.”
엘로아의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사실 샤론이 시우의 또 다른;인 중 ‘쌍둥이도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는 당연히 제머나이 백작인 줄로 알고 있었다.
그가 제머나이 백작가의 전폭적인 협조와 지원을 받는 것도 그렇고.
비록 샤론이 ‘백작’이라는 호칭이 아닌 ‘쌍둥이’를 사용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지만 상식적으로 놓고 생각해봐도 그편이 훨씬 이치에 맞았기 때문이다.
“…내가 뭔가 잘못 이해한 게 있나 싶네만….”
제머나이 백작가의 귀여운 견습마녀를 마주하게 된, 그의 연인이 사실 견습마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엘로아는 황망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대들의 스승님은 어디 있는가?’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다.
“...아무래도 이건 혼을 내야 할 것 같군.”
그릇은 결코 손상되어서는 안될 계승의 증표이며 그것을 가장 쉽게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이 남성이디.아무리 사랑하는 제자 시우라도 견습마녀를 건드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샤론이 이해가 간다는 듯 쓴웃음을 짓는 동안.쌍둥이가 쏙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저희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에요. 나름대로 안전한 방법으로 조수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어요.”
“오데트 불쑥 그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해?”
“언니, 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는 걸? 오히려 숨기는 게 이상한 일이야.”
사실 엘로아의 귀에 ‘사랑을 나누고 있어요!’ 뒤로는 들리지 않았다.
이차충격.
시우가 견습마녀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은?
“설마….”
엘로아는 이미 시우가 페리윙클과 뒤로 격렬하게 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다.따라서 빠르게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에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
“맞아요, 맞아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치고 과장된 쌍둥이의 몸짓과 붉게 달아오른 얼굴만 봐도 본심이 어떨지 짐작 간다.하지만 여기 있는 여인들은 다 같이 시우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 방식이 어떻든 적어도 엘로아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선 술이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좋아요! 저희가 포도주를 준비했어요.”
“멘델 구릉에서 난 맛좋기로 유명한 와인이에요!”
다 같이 술잔에 술을 따르고 가볍게 잔을 맞댄다.샤론이 먼저 말을 꺼 냈다.
“사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시우가 똑 부러지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도 이렇게 바람둥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샤론 언니랑 저희끼리는 나름대로 규칙을 정해서 조수님을 공유하고 있어요.”
“괜히 싸우거나 하지 않게요.”
샤론과 쌍둥이가 별다른 다툼 없이 화목하게 어울리게 된 것도 종종 갖는 이 모임 때문이었다.
오딜의 네이밍 센스를 빌려 ‘공정한 분배를 위한 평의회’라는 이름을 갖은 이 모임에서 논의되는 주제는.
“금일 평의는 이번 수확제의 데이트 순서와 시간이 되겠습니다.”
같은 굉장히 소소한 일이었다.
진지한 분위기와는 다소 동떨어진 논의 주제에 혹시 일종의 술자리 농담인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엘로아는 한없이 진지한 샤론과 쌍둥이를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한다.
이 평의회는 비록 쓸데없는 다툼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지만 선의의 경쟁까지는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을.
“저 오딜이 먼저 발언하겠습니다. 저와 오데트는 둘이서 하나입니다. 단순 진영에 따라 시간을 나눈다면 조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듦을 참작하여 샤론 언니와 티페레트 공작님의 두 배가 되는 시간을 함께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언니 말이 전적으로 맞습니다.”
쌍둥이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피자를 커다란 세 조각으로 나눈다 치면 쌍둥이는 그중 한 조각을 받아 나눠 먹는 셈이다.따라서 피자를 네 등분 하고 쌍둥이가 두 조각을 받아가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샤론, 반박합니다. 수확제란 일 년에 단 사흘만 진행되는 특별한 이벤트입니다. 분명 시우가 오딜 양에게 신경 쓰는 동안 오데트 양에게 관심이 덜 가고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서로 함께 있는 이상 완전히 이격되어있는 상황과 동일시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그런 논리로 시간을 나눈다면 오딜양과 오데트 양이 시우와 함께하는 권리의 절반을 가져가게 됩니다.”
샤론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샤론은 나누면 조각나서 먹을 수 없게 되는 피자와는 달리 근처에서 정서적 교감과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유효한 시간이라는 것이다.
얼떨떨하게 이 평의회에 끌려 들어왔던 엘로아.
눈을 끔벅이며 진지한 토론을 바라보던 그녀 역시 참전하게 되었다.
“나도 발언하고 싶은 바가 있네.”
시우를 아끼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여기 세 사람에게 뒤지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