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비레오가 입을 열기 무섭게 무너질 듯 문을 열며 들어온 것은 엘로아 티페레트 공작.시우의 스승님이었다.
엘로아 티페레트.
사실 시우는 기억을 되찾기 전부터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일전처럼 가벼운 옷차림으로, 주로 잠옷 차림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던가.
아니면 거의 매일 같이 즐기던 야밤의 대작을 제안하지 않는다던가….
대부분은 이상하리만치 엘로아가 시우를 피한다는 점에서 맥락이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별일 아니겠지라고 넘어갔던 사소한 조짐에도 이미 복선이 깔렸던 셈이다.
그 모든 것은 아주 작은 유혹의 단초라도 뿌리치고 싶은 엘로아의 다짐에서 나온 선 긋기였으니.
기억의 궁전 속에서 시우는 확인할 수 있었다.
시우를 남자로서 사랑하게 된 엘로아.
그리고 시우를 제자로서 사랑하는 엘로아.
그녀가 시우와 몸을 섞고 어떤 죄책감을 느꼈는지, 그리하여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도.
물론 시우는 티페레트 공작만큼이나 사제관이 뚜렷하지 않다.
애초에 세상이 좀 덜 빡빡했던 시절엔 선생과 제자의 로맨스를 다룬 이야기도 많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녀가 얼마나 큰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꼈을지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눴던 기억을 지우는 것이.
가령 샤론이나 쌍둥이의 기억을 지워 아주 남남이 되는 것이 어떤 중대한 결단과 자기희생인지는 한결 소상히 이해할 수 있다.
“스승님, 다녀왔습….”
그런 문제에 앞서 딱 봐도 엄하게 꾸짖음 받을 것을 직감한 시우가 어색하게 인사하고.
“티페레트 공작… 어머….”
생글생글 웃으며 공작을 반기려던 알비레오는 깜짝 놀란 듯이 입을 가렸다.
-짝!
시우를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엘로아가 시우의 뺨을 냅다 때린 것이다.
그렇게 아프진 않고 따끔했다.
그리고 즉시 시우를 꼭 껴안는다.
“저는.... 사교 모임 약속이 있어서….”
사제의 정열 넘치는 재회를 보며 슬그머니 일어난 알비레오가 집무실을 나섰다.
“스, 스승님…. 숨이 좀 막히는 데요….”
“가만히 있게.”
방금 현세에서 돌아온 것처럼 전투복 차림의 엘로아.
벚꽃 빛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엘로아는 시우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꽉 껴안았다.
만약 시우가 곰 인형이었으면 솜이 삐져나올 정도로 말이다.
시우가 의지할 곳도 없이 홀로 사지를 향하는 동안 엘로아는 겨우 사진 한 장에 놀아나 며칠씩 홍콩을 돌아다니며 에아를 추격했다.
잊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 분노와 복수심을 곱씹기 바빴다.
그 결과 이상 사태를 깨달은 데네브와 샤론이 거의 죽을 뻔한 시우를 바다에서 건져내고, 그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할 때까지도 사랑스러운 제자가 그런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또 한 번 같은 실수로.
또 하나의 사랑스러운 제자를 잃을 뻔한 것이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 큰 시우를 있는 힘을 다해 껴안던 엘로아.
본신의 무위와는 달리 물새처럼 가녀린 몸이 파들파들 떨린다.
잔잔히 시작된 울음은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고 엘로아는 거듭 시우의 옷깃에 눈물 자국을 남겼다.
“미안, 하네….”
“아닙니다, 제가 다 자초한 일이기도 하고….”
“미안하네….”
라피의 원수를 갚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만약 에아가 살아있다면 엘로아는 또 한 번 수라의 검을 쥐길 마다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는 시우가 있다.
엘로아 티페레트의 사랑하는 제자 신시우가 있다.
2.
조금은 진정된 엘로아와 시우는 정원으로 나섰다.
한밤중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침엽수.
뾰족한 잎끝을 타고 꼬마전구처럼 매달린 고드름을 톡톡 건드리며 오랜만에 두 사제는 함께 산책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자취가 묻어나는 정원에서 시우는 엘로아로부터 그녀가 왜 즉각 도우러 올 수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아무래도 그 악독한 비앙카는 스승님을 떼어 놓기 위해 에아를 미끼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시우가 꺼내려던 주제와도 상통하는 구석이 있는 주제였다.
“스승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말하게나.”
기억의 궁전에서 시우는 엘로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어찌 보면 그것보다 더욱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엘로아의의 견습마녀를 죽였던 에아 사달멜리크.
시우에게 마법을 강탈당한 그녀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진실 말이다.
“이번에 의식을 찾기 전에, 기억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기억’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엘로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살짝 뒷짐을 진 채 뚜방뚜방 엷게 덮인 눈 위를 밟던 엘로아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선 것이다.
“기억...을?”
조용히 시우를 올려보는 엘로아의 눈빛은 평소 근엄하고 자애롭던 눈빛이 아니었다.
걱정하는.
기대하는.
그런 기대를 품은 자신에게 실망해버리고 마는.
조용히 뜨거운 연모의 감정을 삼키는.
촉촉한 마젠타색 눈동자.
기억 속 그녀의 모습과 꼭 겹친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선 이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것이겠지.
“에아 사달멜리크가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일변했다.
하지만 시우가 앞서 예상했던 것보다 격렬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 주겠나?”
도리어 차분하고 침착한 눈으로 시우의 보고를 듣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뿐.
격정에 가까운 반응이 나오는 것은 아닐지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멀쩡했기에 조금 놀랐다.
“알고… 계셨나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짐작은 했네.”
탄식처럼 말꼬리를 늘인 엘로아는 우선 알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웠다.
처음에 비하면 한결 분위기가 유해지고 부드러워진 스승님이지만 시우는 분노로 일그러진 매서운 표정으로 간에 붕권을 꽂아넣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는가?”
“생각보다 너무, 음….”
“당장 큰일을 당할 뻔한 그대가 곁에 있는데. 당장 복수가 대수겠는가?”
엘로아는 싱긋 웃고 넘겼지만, 그 눈동자가 평소보다 깊다는 것은 시우라도 알 수 있었다.
당장 시우가 위기에 처했다 돌아온 탓에 호들갑 떨지 않을 뿐 내심 심경이 복잡한 것이겠지.
사실 오늘 스승님을 만나면 그녀가 봉인한 기억이 떠올랐다는 말도 함께 전하려 했다.그녀와 사랑을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고, 고백 역시 떠올랐노라고.
사실 말해서 뭐 어쩌게라는 생각은 있다.
시우의 옆에는 이미 쌍둥이도 있고 샤론도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이런저런 여자들과도 난잡하게 얽혀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속앓이만 하는 그녀를 내버려두는 것이 맞을까?
“스승님, 몸이 식습니다. 들어갈까요?”
“그러게나.”
“오랜만에 제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은근히 심각해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막상 말을 꺼내기는 어렵다.이제 벽난로 앞에서 조금 언 발을 녹이며 술이나 주고받을까 하던 차에.엘로아가 머뭇머뭇 물어왔다.
“시우.”
“네.”
“혹시 달리 떠오른 기억은 없는겐가?”
엘로아는 이 말을 꺼낸 것 자체를 후회하는 듯했다.
괜한 미련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스승님, 우선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그것만으로 충분히 대답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아니면 그사이에 놓인 어떤 감정인지.
엉망이 되어가는 엘로아의 표정을 보니 그간 마음고생이 짐작 가서 더 딱해 보였다.
엘로아는 제 머리카락 색처럼 분홍빛 얼굴이 되었다.
3.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는 어색한 분위기 속 돌아온 응접실.
시우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엘로아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꼼지락 꼼지락 무릎 담요를 주물럭거리는 그녀의 손짓에서 당장에라도 숨고 싶은 곤혹스러움이 엿보인다.
“면목없지만 내가 먼저 말해도 되겠는가?”
“그럼요.”
그 옆에 비스듬히 마주 앉은 시우는 슬며시 얼어가던 발을 벽난로에 녹였다.
“우선 미안하네. 그대에게 분명 제대로 된 책임을 지겠다고 했음에도, 이리 도망치듯이…. 기억을 지워버린 것. 무책임한 행동이었네.”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제법 많이 생각한 듯 술술 나오는 엘로아의 말.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손을 대지 않아도 뜨끈뜨끈함이 느껴질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음은 물론이고 아까부터 담요를 꼬집던 손도 쉴새 없이 움직이는 중이다.
“다만 이해해 주길 부탁하겠네 일전에 말했던 대로…. 나는 그대를 연모하고 있네. 하지만 스승 된 몸으로 제자인 그대까지 부덕을 저지르게 할 수는 없었다네.”
엘로아의 손짓이 멎는다.
하얀 피부 아래 핏줄이 비쳐 보이는 손등.그 위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이날 용서해 줄 수 있겠나?”
이해?
못할 리가.
애초에 용서해야 할 이유조차 사실 잘 모르겠다.
엘로아가 시우를 얼마나 아끼고 위하는지는 그녀의 작은 눈짓에서조차 드러난다.
여태껏 대가 없이 받아 온 것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人스니 ”
사실 이럴 자격 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잠깐 망설이던 시우는 이내 팔을 벌려 엘로아를 살며시 끌어안았다.작고 푹신한 몸이 던져지듯 시우의 품에 안겼다.
“…나는 못난 스승일세….”
먹먹하게 잠긴 엘로아의 목소리.
시우는 그녀의 조그마한 뒤통수를 조심스레 손으로 감쌌다.
“제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모자라, 책임질 것이 두려워 기억을 지운 주제에….”
평소의 근엄한 모습은 간데없고 응석부리는 어린 애처럼 시우의 품을 자꾸자꾸 파고드는 엘로아.
“그대가 안아준 것만으로 주책없이 기뻐하다니….”
“아닙니다, 저도 진작에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어느 누구가 먼저 시작한 것은 아니다.
지금이라는 직감이 동시에 찾아온 것인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을 뿐.
서로를 끌어안던 중 엘로아의 입술이 조심스레 시우의 입술에 포개졌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그녀의 숨 냄새.
잘 익은 복숭아를 들어 향을 맡는 것 같은 프루티한 향기.
기억 속 그녀의 습관과 일치했다.
조심스레 뻗은 손으로 옷깃을 꽉 잡는 손길도.
시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무는 입술도.
긴장한 탓에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도.
모두 같다.
부드럽게 비벼지는 입술 사이로 뻗은 시우의 혀끝이 느껴졌을 때.
엘로아는 불현듯 정신을 차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시우의 팔이 그런 엘로아를 단단히 제지한다.
그리고 과감하게 입술을 부딪쳐 혀를 밀어 넣었다.
마취총을 맞은 사슴처럼 퍼득 몸을 떤 엘로아지만 이내 그립고 그리웠던 제자와의 키스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번에는 체취를 맡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상한 묘약의 효과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시우가 이렇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살짝 가빠진 호흡과 함께 두 사람의 입이 떨어졌다.흔들리며 시우를 바라보는 엘로아의 시선과.그런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시우.
“스승님.”“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스승님과 이런 관계가 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시우의 말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에게.
추억의 절반만 잘라 보관하며 혼자 괴로워해야 했을 그녀에게.
“저 역시 좀 모자란 놈이고…. 또 사실 제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여자관계도 복잡하죠.”“하지만 스승님이 절 생각하시는 것처럼, 저도 스승님에 대해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요.”시우는 말주변이 없다
번지1르하;’이해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조금 염치가 없을지라도 솔직한 진실을 털어놓을 뿐.
“그러니까 이번에는 도망치시지 말고 같이 있어 주세요.”“저도 제 나름의 책임을 져 볼게요.”
엘로아는 멍하니 굳었다.
마치 석화의 저주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빤히 시우만을 바라보던 얼굴이, 잔물결이 일듯 흩어진다.엘로아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미안하네….”
시우의 말에 대한 엘로아의 대답은 사과였다.
역시 이것으로는 그녀의 사제관을 바꾸기 부족했던 걸까.
살짝 낙담이 서릴 무렵.
“너무… 기뻐서….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손 틈새로 엘로아의 웃음이 보인다.
울음을 참고 있지만,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미소가.
그 미소는 시우가 봤던 엘로아의 표정 중 가장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