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1.
-쿠구구구구궁!
격돌의 시작은 파동이었다.
엉키는 두 마리 용처럼 허공에서 어우러지는 붉은창과 검은 밤하늘.
집약된 공간과 범람하는 왜곡장의 충돌은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세상의 색이 사라진다.
존재하는 것은 흑색 혹은 백색.
그 사이로 중력을 거스른 바닷물이 크고 작은 방울이 되어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듯 넘실거렸다.아주 느릿하게 번진 흰빛 광채는 보석처럼 흩뿌려진 물방울을 투과해 일곱 가지의 광채로 변하고.중력의 축조차 기이하게 비틀린다.
이따금 자연적으로 발생한 강렬한 마력의 폭풍이 일으키는 현상.
공간의 난수화.
왜구장;격돌한 커다란 충격은 결계 내부의 자연현상마저 비틀어 버린 것이다.
비앙카는 생각했다.
아직 마력이 남아있다.
싸우고자 하면 더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미 외경(外經).
물은 아래서 위로 떨어진다는 기초적인 상식조차 부정되는 미관측 지점에서 마법 행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불을 피워 올리는 간단한 마법이 어긋나 전신을 불사를지도 모른다.
마포를 쏘는 단순한 행위가 굴절된 공간에 의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전방으로 전개한 방어진의 성질이 뒤틀려 자해마법으로 돌변해버릴지 모른다.
적어도 이 뒤틀림이 진정될 때까지는 손가락 까딱하는 것조차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리고 비앙카는 보았다.
촛불이 꺼지듯 완벽하게 상쇄된 서로 다른 두 힘.
소름 끼치는 적막과 흑백 속에서.
갑옷 하나가 금빛 마력 반사광을 여명처럼 등진 채 날아올랐다.
그 종착지는 적이라 인식한 마녀.
순수한 정념은 죽음의 공포조차 잊게 한다.
생전 처음 보는 기현상도, 사방에서 몸을 잡아끄는 중력 축의 뒤틀림도.만신창이가 된 그의 발걸음을 잡아끌 수는 없다.
누군가는 끝나지 않은 싸움 속 목숨의 보전을.
누군가는 미지의 위협 속 목숨을 도외시한 한 걸음을.
승패의 갈림길은 우습게도 마법의 성취가 아닌 마음가짐에서 갈렸다.
“이런.”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차하는 두 사람.
번뜩이는 창날에 잘려나간 날개와 함께, 비앙카는 추락하는 깃털처럼 좌우로 살랑이며 가라앉았다.
2.
신시우는 체내의 상태를 점검했다.
왜곡장에 영향을 받다 못해 골수까지 절여진 상태.
신시우는 우선 ‘계약’을 활용해 존재를 확립시키는 것으로 영체의 붕괴에 대처했다.
전신의 기력은 다하고 한 줌의 마력조차 짜내기 힘들다.
거듭 증폭을 활용한 마력 충전 역시 걸레짝이 된 회로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새로운 마법의 지평을 열어 줄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눈앞에 있다.
눈앞에 보이는 마녀의 마법을 강탈하고 거기서부터 마력을 증폭한다.
“놀, 랍네….
부서진 바다 위에 떠다니는 비앙카에게는 이미 저항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비테게의 방패조차 없이 두들겨 맞아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
한 가지 의외인 점이 있다면 최후의 순간 이카로스의 날개를 잘라낸 신시우가 곧장 그녀의 목숨을 가져가지 않았다는 것이다.평지를 걷듯 차박차박 바다 위를 걸어온 신시우를 보고 비앙카는 깨달았다.
“내 마법도 뺏어가려고?”
그는 인명 존중 따위의 같잖은 이유로 비앙카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냉혹하고 비정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선과 마주하자 잠시 미뤄두었던 사실이 떠오른다.
에아 사달멜리크를 13 위계까지 떨어뜨렸다던 신시우.
그는 다른 마녀의 마법을 성교를 수단으로 강탈하는 고유 능력이 있다고 전해 들었다.
그 능력 자체는 얼핏 우습지만, 결과까지 비웃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채로 마법이 뺏긴다는 게 어떤 비극인지는 에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녀로선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선선히 받아들인다.
“좋아, 마음껏 범하도록 해. 대신… 목숨만은 살려 줘.”
갑옷까지 해제한 신시우가 마침내 비앙카의 앞에 섰다.
격돌의 충격 탓에 제구실을 거의 못하게 된 비앙카의 옷은 풍만한 가슴과 허벅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많은 왕들이 침대 위에서 흑수의 칼날에 유명을 달리했다.
여자의 치맛자락과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는 다리는 남자의 무장을 바닥까지 해제하기 마련.
비앙카의 도발적인 눈빛이 시우를 향한다.
그 눈꼬리에는 비취색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날 먹어치워 봐.”
그녀가 등을 맞댄 수면 아래.
그곳에는 모든 마력을 짜내 만들어 낸 비장의 한 수가 남아있다.
추락하는 그 순간 모든 마력을 쥐어짜네 안배한 아티팩트.
-촤아아악!!!
마찬가지로 기력이 다한 시우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다 수면을 가르고 나타난 이형(異形)의 입.밀집대형을 유지한 창병의 창살처럼 빽빽한 이빨이 벌레를 잡아먹는 식충 생물처럼 사방에서 다물렸다.
“나도 널 먹어치울 테니까.”
마지막 순간의 방심을 틈타.
비앙카와 시우 모두를 으적으적 씹어먹으려던 이빨이 우뚝 굳었다.
난데없이 쏟아지는 비.
그것은 시우와 비앙카, 그리고 아티팩트의 입을 덮어내며 사방을 덮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 빗물이 떨어진 곳은 마법의 작용이 정지한다.어떤 제어도 용납하지 않은 채 묵직하게 마력을 빨아들였다.
“이건 또 무슨….”
비앙카의 황망한 시선 속 그녀의 몸이 천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꽃과 꽃과 꽃.
피부를 꿰뚫고 몸을 찢으며 피어나는 야생화는 물결이 이는 바다 위, 아티팩트, 마녀의 몸을 가리지 않고 돋아났다.
«=| =1 =1 »
아… 아아….
최후의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가고.
허망한 웃음을 짓는 비앙카의 몸이 한 더미의 꽃으로 변해 무너진 채 수면 위에 핑그르르 그 잔해를 남겼다.
시우는 몸을 일으켜 이 현상의 원인을 찾아내었다.
막 먹잇감을 먹어치우려던 때 갑작스레 난입해 방해한 방해꾼을 찾아내려던 그의 눈길에.
뻣뻣하게 굳어 있는 금발의 마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