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1.
현세의 업무를 보기 위해 출장을 나와 있던 알비레오 제머나이.
현세와 게헨나 사이의 통신을 연결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과 설비가 필요하지만 제머나이 백작은 기꺼이 그 비용을 감수했다.
그녀가 현세에 나와 있는 동안에도 굳이 왕복할 필요 없이 가문의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반대로 가문에 있을 때 현세의 사업가들과 연락할 수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귀여운 쌍둥이와 영상 통화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값비싼 통신장비를 통해 갈리나 시녀장에게 보고받은 알비레오는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요?”
“시우 군이요?”
“왜요…? 아, 이건 갈리나도 모르겠네요.”
“일단 알았어요. 번거롭겠지만 금고 은행에 직접 방문해 한 번만 더 확인해주세요. 항상 수고가 많아요.”
통신을 끊었다.
알비레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고작 1시간 전.
시우에게 주었던 신용증서를 통해 대량의 금화가 빠져나갔다는 보고 날아왔다.
좋은 술을 위해서라면 수 억 원을 턱턱 써도 딱히 아깝지 않은 백작조차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세상에나, 이게 어쩐 일이람?”
알비레오는 시우에게 한도 없는 신용증서를 맡겼다.
그러나 설마 기존에 약조했던 보상액의 두 배가 넘는 돈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일시금으로 써버릴 줄이야….
레노먼드 타운에 있는 성이라도 매입한 걸까?
아닐 것이다.
게헨나의 최고 알짜배기 땅에 서 있는 성을 사들여도 이 정도의 돈을 쓰긴 어렵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당장 꿍꿍이를 짐작하려 들었겠지만.
시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알비레오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
적어도 거액의 돈이 들어왔다고 흥청망청 사용하는 망나니가 아니다.
평소 성품과 주변 상황을 조합해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먹고 튀려나?’라는 추론은 한없이 가능성이 작다는 의미였다.
“이상한데….”
도리어 수상함을 느낀다.
은행에 갑자기 거액의 현금을 인출하려하면 보이스 피싱을 의심할 수 있는 것처럼.
이쪽의 양해를 구하지도 의견을 묻지도 않고 갑자기 저런 거액을 사용했다는 것은….알비레오는 즉각 원격 수정구를 재가동시켰다.
“응, 데네브. 확인해 줄 게 있어.”
2.
아멜리아는 멍하니 굳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껏 그녀가 사냥하며 떠돌았던 곳은 죄다 극지이자 무인지역.
따라서 현세의 대도시를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인파와 귀를 울리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게헨나의 가장 큰 나무보다도 거대한 빌딩이 유리창을 무섭게 번쩍이며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원래 아멜리아는 사냥에 나섰을 때 다른 것에 눈 돌리지 않았다.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너질 것처럼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한국.
시우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스레 눈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마냥 감상에 젖어 있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비앙카 벨릴리의 위치라고 기록된 곳은 한국의 항구도시 부산.
클라라를 재워 둔 채 홀로 여행을 떠난 아멜리아는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척 곤란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지? 코스프렌가?”
“와...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지?”
“사진 찍어달라고 할까?”
먼저 쏟아지는 시선들과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말말말 들.
마녀 사이에서도 빼어나기로 유명한 아멜리아는 멀거니 서 있는 것만으로 이목을 끌어모았다.
평소라면 즉시 기척을 죽였겠지만 쏟아지는 소음과 생전 처음 접하는 방대한 정보에 어지럼증마저 느끼고 있던 아멜리아는 뒤늦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즉시 아멜리아의 존재가 지워진 것처럼 사람들은 그녀에게 관심을 잃는다.
하지만 정말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우선 사람이 너무 많다.
살생부는 마녀의 정확한 위치를 기술해주지 않는다.
아멜리아가 이제껏 공적을 찾던 방법은 마력 입자를 일부러 흩뿌리며 공적이 먼저 달려들도록 하는 것인데….이렇게 인파가 모인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지나친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입자 하나하나의 존재감을 지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고.
또한 평소처럼 적을 꾀어낼 경우 선공을 내주는 것도 적잖은 문제였다.
살생부에 따르면 비앙카 벨릴리는 장거리 저격에 능한 마녀이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22 위계의 강력한 공적.
저격수에게 선공권을 내주고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부담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웅!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함을 느끼는 아멜리아의 감각에.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걸린다.
아주 멀리서 들려온 파동임에도 묵직한 마력의 준동에 반응해 저릿함을 느끼는 마력회로.
하늘색의 푸르른 눈동자가 먼 곳을 향한다.
-퉁!
아까 느꼈다는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듯 또다시 들려오는 충격.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소란은 없다.
이 정도의 파동이 이면결계 내부에서 새어 나왔다는 의미다.
좀처럼 있는 일이 아니다.
&멜;아느즉시 입자로 몸을 감싸 그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3.
“...큭!”
비앙카는 곤혹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공간을 찢고 튀어나온 신시우.
그가 휘두른 참격은 이카로스의 날개 한쪽을 베어냈다.
평범한 날개였더라면 균형을 잃고 추락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카로스의 날개는 예장이다.
속도는 조금 떨어졌을지언정 관성을 무시하는 회피기동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자연스럽게 시작된 공중전.
비앙카는 끈질기게 추격해오는 그를 떨쳐내기 위해 온갖 아티팩트 쏟아내었다.
“쏘아라!”
흩뿌려지는 꽃 형태의 폭발형 아티팩트, 나비 형태로 적을 느릿하게 추적하며 동선을 제약하는 아티팩트, 바짝 뒤쫓는 적을 떨쳐내기 위해 흩뿌려지는 플레어 형태의 아티팩트, 레이저 형태의 빔을 쏘아내는 아티팩트 등등등.
종류만 해도 수십
투사체 자체의 개수는 이미 헤아리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많을진대.
-쇄 애애 액!
집요한 추적자가 된 신시우는 결코 비앙카를 놓치지 않는다.
시성선을 펼치고 온갖 수단을 활용해 기껏 거리를 벌렸다 싶으면,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진 시우의 몸이 어딘가 허공을 뚫고 다가온다.
선형의 이동기가 아닌, 점과 점을 뛰어넘는 공간도약.
‘문’의 도움을 받지 않고 공간을 접어 달리는 것만으로 경악스러운 판국에 그런 고위 자성마법을 왜곡장 범벅인 붉은가지를 든 채 행사하고 있다.
비앙카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파츠츠츠측!
비행과 공간 도약으로 비앙카를 쫓고. 수백 가닥의 리본으로 공중전을 벌이고, 낭비에 가까운 방식으로 마력을 펑펑 쏟아내다 보면 금방 마력이 바닥나기마련이다.
“피어라.”
그러나 이제는 지쳐 나가떨어지겠거니 할 때마다 이는 황금빛 마력의 폭발.
거의 소진되어가던 마력이 다시 전부 차오른다.
반면 비앙카는 완만히 마력이 소모되고 있는 상태.
지구전에 자신 있는 비앙카도 슬슬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크으윽…!”
아크하트의 활의 유일한 약점을 꼽자면 사출 시 발생하는 인터벌.비앙카는 처음으로 그 한계를 느꼈다.
평상시에는 의식할 필요조차 없는 단점이기 때문이다.
귀찮게 달라붙는 적이라면 시성선으로 날려버리면 된다.
적의 원거리 공격이 방해된다면 이카로스의 날개로 짧게는 수십, 길게는 수 천 킬로미터의 간격을 벌린 뒤 사상의 관측안으로 저격하면 된다.활을 당기는 동안 생기는 빈틈은 비테게의 방패가 커버해준다.
하나하나는 결함이 있으나 합쳐지면 완전무결한 다섯 개의 신기.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비앙카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약점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무도회의 명부와 투기장의 깃발.
비앙카는 그가 중도에 도주하지 못하도록, 이 전투가 타인에게 발각되지 못하도록 안배를 설계했다.
투기장의 깃발이 만들어내는 전장의 반경은 은폐 성능을 최대로 볼 수 있는 3km 남짓.
비앙카의 최대 장점, 원거리에서의 일방적인 폭격이 이뤄지기엔 너무나도 좁다.
설마하니 이토록 치열한 접점을 펼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던지라 만전을 기했던 장치가 악재로 돌아와 비앙카의 목을 죄고 있다.
물론 비앙카의 능력은 아티팩트의 조율과 자기화.
조금만 시간을 들인다면 이 제약을 풀어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잠시의 빈틈도 없이 비앙카를 쪼아대는 신시우의 존재다.
다시금 비앙카를 따라잡은 시우.
붉은 나선이 호를 그리며 통렬하게 방패를 두들긴다.
-쾅! 콰앙! 콰아앙!
어떠한 물리적 에너지도 0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테게의 방패.
그 방패가 붉은가지에 두들겨 맞을 때마다 통렬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농축된 왜곡장에 의해 방호 성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점차 바스러지는 방패의 파편을 보며 비앙카는 결단의 때가 왔음을 느꼈다.
이대로 상황이 교착되어 버린다면 야금야금 마력을 소모 당하다 패배할 위험이 있다.
물론 그 전에 명백히 혹사 중인 그의 신체가 완전히 정지해 버린다면 버텨낸 비앙카의 승리겠지만.
패배.
패배라.
태어나 처음으로 입안에서 굴려보는 낯선 어감에 비앙카는 실소를 지었다.
“하아아압!”
비앙카는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지지부진한 푼돈을 버리며 누구의 판돈이 더 많은지 겨루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는다.도박에서 최후의 승부에 나설 것이라면 올인.
비앙카는 힘차게 시성선을 흔들었다.
곧장 결계의 끝 부분까지 튕겨 나가는 시우.
동시에 수억 개에 달하는 조그마한 입방체가 반경 3km의 공중을 가득 채운다.
아무리 비앙카라도 그렇게 많은 아티팩트를 일제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중력 공간을 유영하는 별의 파편처럼 아름다운 빛으로 반짝이는 그것은 ‘흉내쟁이의 주사위’.
아티팩트의 외양만을 복제해 적을 기만하는 디코이인 만큼 마력의 소모는 적다.
평상시라면 상대의 과잉대응을 유도해 소모전의 우위를 가져가는 기능이 전부지만, 이번에는 용도가 조금 달랐다.
관찰한바 그의 공간도약은 번번이 아무런 사물이 없는 곳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발 디딜 틈 없이 방해물이 유영하는 공간에서는 그 사기적인 블링크는 사용이 제한될 터.
그가 아무리 빠르게 이곳까지 도달한다 한들 아크하트의 활을 당기는 쪽이 더 빠르다.
-기기기기직!
다시 한 번 당겨지는 활.
단, 일전과는 형태가 다르다.
분열한 일흔 두개의 비테게의 방패가 원통형으로 늘어서며 포대를 이루었다.
신시우가 링터널을 이루어 화살을 흘리는 것을 보며 떠올린 구상.
비테게의 방패의 강력한 방호성능이 내부를 향하도록 만들어 힘의 분산을 최소화한다.
본래라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야 할 밤하늘의 화살이 방패의 방어력에 의해 압축되어 더더욱 일 점을 향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지금까지 쏘아왔던 것보다 월등하게 강력한 일격.
“과연 그렇게 나오시겠다?”
까마득히 먼 바다 위로 착지한 시우의 대응.비앙카의 의도가 그에게 전달된 것일까?그는 리본을 수비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쿠우우우웅!
대신 리본을 한껏 꽃처럼 펼쳐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작 12가닥에 불과했던 리본이 수십 가닥까지 늘어났다는 것.
바다 밑바닥부터 주위의 나뒹구는 크레인, 배의 잔해까지 활대로 삼은 리본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당겨진다.
조금 전 격돌의 추체험.
두 사준비한 최|의 일격이 마침내.
허공에서 맞닿는다.
©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만약 비앙카가 자유롭게 거리를 벌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뚜지성 시우가 졌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