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96화 (396/917)

#3961.

마녀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마도의 길을 걷기를 택한 자.범속(凡俗)을 넘어서 신성한 칭송을 받아 마땅한 선택받은 존재.그 육신은 세월의 풍파조차 빗겨가며,

그 입술의 달싹임은 인과의 순리조차 틀어간다.

자신만의 의무를 짊어진 특별한 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특별한 권리가 주어진다.짐승에게 인간의 도덕적 잣대를 가져다 대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듯.

마녀에게 범속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부조리를 넘어선 불경이다.

굴레를 벗고 신비로 나아가는 마녀는 범속한 인간과 ‘다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시우.역사상 최초의 남자 마녀.그는 어떠한가?

하나부터 열까지 범속하기 짝이 없다.

인간을 볼모로 잡은 이런 시시한 인질극에 놀아난다는 것부터가 비속(卑俗)함의 증거였다.

무릇 숙원을 짊어진 마녀의 생명이라면 일개 인간 생명보다 것보다 훨씬 무거울 터.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친구를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오는 것은 예상대로였으며,그러기에 내심 실망감을 느꼈다.

하면 지금은 어떠한가?

제 목숨마저 도외시하고.

얼핏 보아도 목숨을 앗아갈 왜곡장의 폭풍을 헤집으며 칼을 들이미는 일격.

이 검날에 담긴 각오 역시

뺨을 한 뼘이나 찢어 J며 기어이 비앙카의 피를 흩뿌린 기개마저,범속함일 뿐인가?

소나기가 내리는 수면 아래를 들여보는 것처럼 흔들리는 시야.

극도의 어지럼증을 이겨내며 휘두른 검은 끝내 비앙카의 목숨을 끊지 못했다.

“하아…하아…. 우웩….”

정신없이 구토를 거듭한 뒤 고개를 들자 제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는 비앙카가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검날은 그녀의 뺨을 깊숙하게 도려낸 뒤였다.

22 위계의 마녀에게 검상을 입혔다.

임기응변의 기책의 성공이자 믿지 못할 쾌거라고 봐도 좋다.

허나 시우는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멀쩡히 서 있다는 것은 도박수가 실패했다는 의미다.여기서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

붉은가지의 폭주를 이용해 일시적인 기능정지를 유도하고, 또 그 안을 가로지르며 기습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 시우가 마련한 비장의 카드.흔들린 칼날이 뺨이 아니라 목을 스쳤더라면 이 승부의 결과는 뒤바뀌었을 것이다.

감히 일개 남자 마녀 따위가! 라며 길길이 날뛸 것 같았던 비앙카는 무서우리만치 침착하게 시우를 바라보았다.그리고는 조금의 악의도, 적의도 없는 순수한 눈빛으로 시우를 바라본다.

“넌 대단해.”

싸움 중 대화를 늘어놓는 것은 그녀의 나쁜 습관이다.

시우가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셈이었으니.

즉각 소모를 점검했다.

클로버 두 개가 시들어 사라졌다.

이로서 남은 여분의 목숨은 단 하나.

망토가 거의 넝마 짝이 되어버렸다.

든든하게 몸을 지켜주던 방호 성능도 2할 밑으로 떨어진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악재를 다 합쳐도 시우의 몸 상태보다 최악인 것은 아니다.

무리할 정도의 마력 강화로 인해 관절부가 녹아내릴 것 같다.

왜곡장과 붉은 결계에 엉망진창으로 물어뜯긴 마력 회로 중 동원 가능한 부분은 5할 미만.

이 이상 무리를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될지도 모른다고 온몸을 들쑤시는 격통이 경고한다.

“...욱!”

간신히 토혈을 되 삼킨다.

“널 나의 적으로 인정할게.”

반면, 비앙카의 부상은 작은 생채기가 고작이다.

일시적으로 왜곡장에 휘말려 통제를 일었던 비테게의 방패, 시성선, 사상의 관측안 모두 순식간에 제 기능을 되찾았다.

즉, 상대의 소모는 0.

이쪽은 파산 직전.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결과가 보인다.

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절망적인 격차가 벌어졌더라도, 손도 쓸 수 없는 비관적인 상황이라도, 끝까지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것.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존중.

고통 속에서도 의리를 지켰던 친우를 향한 위령.

아낌없는 신뢰를 보내주는 연인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의지.

미래를 향한 도약.

-펄럭!

비앙카가 사라졌다.

아니다.

그녀는 시우가 잠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사이 저 밤하늘로 날아올랐을 뿐이다.가까스로 고개를 올려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장난처럼 싸움에 임하던 그녀의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호적수를 상대하는 진지한 눈빛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달이 뜨지 않은 컴컴한 하늘에 순백의 날개가 교교한 그믐달처럼 대신 떠올랐다.

천사의 날개처럼 하얀 깃털을 펄럭이는 것은 공적 기록서에 적혔던 네 번째 예장.

‘이카로스의 날개’.

좌우를 활짝 펼치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날개는 그 이름이 기원한 신화와는 달리 추락하는 법을 모른다.

최고 속력은 마하 30.

중력, 관성 및 온갖 물리법칙의 사슬마저 벗어던진 날개는 극초음속의 속도를 유지하며 온갖 회피기동과 곡예비행까지 가능하다지.단순히 비행만으로 어지간한 마법을 회피할 수 있다.

“네게 경의를 표할게. 이것까지 꺼내게 될 줄은 몰랐어.”

충분한 거리를 확보한 비앙카가 새카만 밤하늘을 등진 채 꺼내 든 것은 거대한 활.

다른 예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벨릴리’의 예장이었으며, 또한 가장 강력한 병기.

‘아크하트의 활’.

다만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쏘는 활’이라는 두루뭉술한 설명만이 존재할 뿐.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만큼 많이 사용한 적이 없거나, 사용한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는 적은 모조리 죽었거나.

-기익

처음에는 그저 거슬리는 진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아직 이명이 전부 회복되지 않았던 것이라 치부했다.

-기이이익

그러나 그녀의 손끝이 천천히 활시위를 당김에 따라 시우는 볼 수 있었다.

올려다본 하늘이 휘어진다.

하늘이 말려 들어간다.

이상한 설명이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마치 평평하게 펼친 손수건의 중앙을 잡아 장미 모형을 만드는 것처럼.

총총히 빛나던 별들과 그 별에서 흘러나오던 빛마저 극점을 향해 응축된다.억지로 쥐어 뜯긴 공기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른다.

-기이이이익!!!

시우는 이해했다.

기록서에 기술되었던 하늘을 쏘는 활.

그것은 시우가 생각했던 두루뭉술한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천공 그 자체를 접어 화살로 삼는다는 아주 직관적인 설명이었다.

-기이이이이이이이익!!!!

비앙카는 생각했다

지금 그의 상태는 만신창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비앙카는 시우를 생포하기를 포기했다.

그의 발버둥을 지켜보던 사상의 관측안이 말해주고 있다.

어중간한 손대중으로 생포하려 든다면 반드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리라는 것을.범속하기 짝이 없는 저 남자에게는 일반적인 범속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비앙카가 해야 할 일은 그녀의 호적수에게 경의를 표하며 최고의 한 수로 상대하는 것.

시우는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할까?

오랫동안 고민할 시간은 없다.

리본을 링 터널 형태로 배치한 뒤 역장을 생성한 뒤 화살의 궤도를 틀자.

“그것만으론 부족해.”

전신을 가릴 방패를 직조하고 몸을 웅크린 뒤 남아있는 망토의 방호력과 클로버를 최후의 보루로 삼는다.

“그걸로도 부족해.”

무리다.

세계를 잠식하는 듯한 중후한 마력의 떨림이 증거다.

밤하늘로 직조된 저 화살은 고작 그런 것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우에 눈에 들어온 것은 폭주를 끝내고 흉흉한 붉은빛으로 번들거 리는 붉은가지.

아직 완전히 진정된 것은 아니었다.

전방위로 왜곡장을 방사하던 붉은가지가 되려 그 힘을 응축한 채 잠깐의 휴지기를 가지고 있을 뿐.

지금껏 다뤘던 통제식이 장착된 리본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다.

재빨리 망토를 벗어 심장에서 먼 오른팔에 감고 붉은 가지를 쥐었다.

시우는 팔이 통째로 타들어 가는 듯한 격통에 어금니를 물었다.

망토의 방호로 일차적인 파동을 걸렀음에도 멈추지 않는 왜곡장의 범람.제 것인 양 몸을 휘젓고 멋대로 망가뜨리려는 왜곡의 강렬한 충격.

제어할 수 없다.

근육이 펄펄 끓는다. 뼈가 휘어진다. 혈액이 혈관을 역류한다. 심장이 엇박자로 뛴다. 폐가 쪼그라든다. 내장이 뒤틀린다. 마력회로에 노이즈를 넘어선 스파크가 작렬한다.

그저 격렬한 통증에 그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정말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어하려고 하면 제어할수록 막아내려면 막아낼수록.격렬한 저항이 몸 안을 뒤트는 듯했다.

“후우..,”

낙인도 없던 풋내기 시절 라티푼디움.

시우는 그림자 고양이를 잡기 위해 7종류의 마력 수액을 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때처럼.

거스르지 않고 유도한다.

몸을 하나의 통로로써 활용한다.

이 정도의 왜곡장이 몸 안에서 날뛰게 놔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어차피 가만히 앉아 죽을 목숨이라면.

한 몸을 불살라 한 방 먹여주는 것이다.

붉은가지는 건방지게 자신을 통제하려 들었던 주인의 몸을 마구잡이로 들쑤시며 휘젓고 다녔다.

“좋아, 좋아, 착하지….”

그것을 유도하고, 유도하며 몸에서 회전시킨다.

치명적인 간섭을 피하게끔 주요장기를 피해, 다소 중요도가 덜한 체내를 놀이터로 제공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저앉은 채 부서진 철골 구조물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순식간에 다리에 하반신의 감각이 사라졌다.

시우는 마지막 마력을 끌어모아 리본의 형태로 직조한다.

‘제어’를 위한 형태가 아닌 ‘폭주’를 위한 제어식.

이걸 던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어깨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총 12가닥의 리본을 주변 철골 구조물에 나선을 그리며 엮어냈다.

이 배의 철골을 활대로 삼고 붉은가지를 화살로 삼은 채, 리본을 활시위처럼 당긴다.

그 모양새가 꼭 붉은 수술을 내놓은 검은 꽃과 같다.

-쿠우우우웅!

리본이 자아내는 어마어마한 장력과 우그러지는 철골.

더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왜곡장과 붉은 결계를 몸 안에 담고, 담고 또 담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클로버는 사라진 뒤였다.

-기이이이익!

완전히 활의 형태를 갖춘 밤하늘이 사출의 준비를 끝냈다.

한계까지 당겨진 아크하트의 활.

비앙카가 사용하고 단 한 번도 필살에 실패한 적 없던 최강의 예장.

“쏘아라.”

비앙카 벨릴리는 하늘을 향해 피어난 검은 꽃을 보며 나지막이 영창을 읊조리고.

“피어라.”

신시우는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미친 듯이 날뛰는 붉은가지를 해방한다.

밤하늘의 빛은 사라지고.

바다는 흐느끼듯 부서진다.

무너지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은 한 줄기의 검은 직선과.

그에 교차하는 붉은 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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