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1.
싸움이 시작된 즉시 시우는 양자 간의 까마득한 격차를 다시금 헤아렸다.먼저 시우의 무장.
키벨레 페리윙클의 네잎클로버 3장.
세 번까지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여분의 생명줄.
플로라 아라베스크가 만들어낸 방호 망토.
어디까지 방어가 가능한 것인지 시험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22 위계의 대마녀가 만들어낸 ‘예장’이라면 시제품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터.
마지막으로 약 25% 정도로 기능을 통제한 붉은가지.
왜곡장을 제어하는 정도로밖에 사용할 수 없으며 특유의 자유분방한 결계는 다루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시우는 싸움의 유일한 승산을 붉은가지에 걸고 있었다.
예소드 백작과 연구하는 과정에서 고장 난 오르골을 살펴본 적이 있다.
최상위 아티펙트인만큼 여러 오염 상황에 대처가 가능한 기믹이 있었음에도 회로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다.리본을 뚫고 나온 아주 미미한 왜곡장 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비앙카 벨릴리의 자성마법은 여러 마도구를 자기화하는 것.
그녀의 능력이 마도구에 치중되어 있다면 유일한 활로를 찾아낼 수 있는 비장의 한 수이다.
피아 간 거리는 100M 내외.
시우에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좁힐 수 있는 거리지만, 비앙카는 어느새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있었다.기습적인 돌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유로움에서 사냥꾼으로서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비앙카의 손에 들린 묵빛의 권총은 지극히 평범한 9mm 자동권총 K5.아티펙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안대를 벗은 시우의 눈에는 보였다.
뿌연 마력이 권총에 스며들고 비앙카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리는 순간 무언가 변했다는 사실을.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동체 시력은 일련의 과정을 슬로우모션처럼 인식한다.그러나 늘어진 시간 속에서 일직선을 그리는 총알은 찰나를 거니는 빛살 같다.
“흡!”
좌우로 피하거나 막는 것은 무리다.
시우는 장대 높이 뛰기를 하듯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창날을 바닥에 꽂아 위로 점프했다.
-쾅아슬아슬하게 갑주의 발끝을 스치며 지나간 탄환은 거대한 철조 기둥 하나를 우습게 우그러뜨리며 굉음을 일으켰다.
아직 안도하긴 일렀다.
몸은 아직 공중에 떠 있고, 시우가 아는 한 K5는 연속 사격이 가능한 자동권총이다.
-탕! 탕! 탕! 탕!
전차의 주포 같은 화력의 권총을 연달아 당기는 비앙카에게는 반동을 느끼는 낌새조차 없다.
양산형 권총으로 이만한 파괴력을 내면서도 사용자에겐 아무런 부담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부조리한 강화 능력.
-쉬리리 릭!
총구가 겨냥하는 궤적을 읽어낸다.
거미의 다리처럼 몸을 지탱한 8개의 리본에 매달려 곡예 하듯 총격을 빗겨낸 뒤 몸을 비앙카에게 내던졌다.
아무리 마녀라도 왜곡장을 풀풀 뿜는 창날에 찔린다면 무사하지 못할 터.
“충고 하나 해줄까? 난 너무 들이대는 남자. 싫어해.”
두 사람의 거리가 30M 남짓으로 좁혀졌을 때.
비앙카는 보란 듯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투박한 구형 휴대전화처럼 생긴 격발기.
그 아래 연결된 두 가닥의 전선은 각기 화물창의 구석으로 연결되어있다.M18A1.
통상 크레모아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대인용 산탄 지뢰의 뇌관과.
시우의 반응은 기민했다.
비앙카호손에 든 물;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망토를 이용해 몸 전체를 덮은 것이다.
고개를 숙여 충격에 대비하는 한편.
창을 쥐지 않은 건틀렛으로 뒷목을 감싼다.
-콰과과과과광!
검은 갑주는 물리적 조응력이 약한 그림자로 이루어졌지만, 흙의 원소와 불의 원소를 활용해 경도와 충격 흡수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물건이다.본디 700g 남짓한 C4의 폭굉과 비산하는 쇠구슬 따위는 시우의 검은 갑주를 꿰뚫지 못할 터.
그러나 이 크레모아는 비앙카의 마력으로 강화된 것.
좌우에서 휘몰아친 폭속 십수 킬로미터의 충격파와 은빛 강철 세례의 운동량은 공중에 떠 있는 시우의 움직임을 그대로 멈춰 세운다.
동시에 전신을 야구방망이로 난타하는 듯한 맹렬한 충격에 아득해지는 정신.
비명을 내지를 순간조차 없었다.
폭발이 가시고 몸이 움직일 수 있게 되자마자 망토에서 몸을 빼내며 뒤로 세 발짝 물러섰다.매서운 충격에 정신이 혼미해진 탓에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후우…후우…후우…”
왼쪽 관자놀이를 타고 미지근한 액체가 흘렀다.
망토 안으로 머리를 숙이는 순간이 늦은 탓일까?
투구는 쪼개져 바닥을 나뒹굴고 묵직한 둔통이 뒤늦게 옆 통수를 울리고 있었다.
추가로 왼쪽 고막이 나간 것 같다.
시선을 돌려 힐끗 팔찌를 바라보니 클로버는 세 장이 모두 남아있다.
차라리 행운을 믿고 달려들었어야 했나?부상의 축적은 이롭지 못하다.
뭐라뭐라 말을 늘어놓는 비앙카의 모습.
하지만 날카로운 이명이 남아있어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서명한 이상 여긴 우리만의 무대거든. 이제 와서 후회한 들 도망칠 수 없어. 너도, 나도.”
고막이 나갔다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먹먹하게 변한 이명 속에서 나불거리는 비앙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타카쇼는 너무 시끄러웠는데. 너는 너무 조용하네.”
“대답할 가치가 없으니까.”
구태여 타카쇼를 언급하며 도발하려 드는 비앙카의 수작에 어울린 것은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앙카가 지금까지 사용한 무기 중 ‘아티팩트’라 불릴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공장에서 찍어 내는 흔하디흔한 재래식 병기를 살짝 강화한 것에 불과하다.그녀가 다룰 수 있는 화력의 총량을 따지자면 장난감 수준이겠지.
“겨우 장난감 따위에 절절매는 주제에 나더러 목숨을 걸라고? 농담이 지나쳐.”
그 장난감에 벌써 이 꼴이다.
망토와 갑주가 충격을 흡수해주었기에 목숨은 건졌지만 까마득한 격차의 방증이었다.
이것이 22 위계의 공적.
한참이나 성장하고 세 가지 예장으로 무장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수준 차이.
하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새수확인했다;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얌전히 항복하는 건 어떠니? 섹스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실험에만 잘 협조해 준다면 내 치마폭 아래서 허우적거리게 해줄게. 네 얼굴은 반반하니취향이기도 하고.”
그래도, 일전의 격돌로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비앙카는 이쪽을 생포할 예정이다.
만약 목숨을 거둬가고 싶었으면 크레모어를 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아직 남아있는 총알을 쏟아 부었겠지.그랬더라면 클로버 석 장이 순식간에 날아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사실 이 정도 거리에서 대치를 해주는 것 자체가 비앙카가 시우를 만만하게 보고 있으며, 죽일 의도가 없다는 방증이었다.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다면 시우가 식별할 수도 없는 거리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포격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너한테 박아줄 건, 이거뿐이야.”
창을 내밀어 비앙카를 겨냥한다.
“사양할게, 그렇게 긴 건 아파서 싫거든.”
너스레를 떠는 비앙카의 등 뒤로 마름모꼴의 금속판이 떠올랐다.
크기는 손바닥만 한 정도이지만 모서리마다 총 네 개의 눈알이 뒤룩뒤룩 굴러다니고 있다.
나왔다.
기록서에 적혀있던 다섯 예장 중 첫 번째.
‘사상의 관측안’.
표적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꿰뚫어보며 술자의 조준을 보조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번 관측된 적이라면 수백 킬로미터 밖에 있어도 정확하게 저격할 수 있는, 말하자면 월핵이 포함된 에임핵이다.
반쯤 웅크렸던 시우의 몸이 폭발하듯 펴지며 앞으로 쏘아졌다.
최초 도약이 시작된 지점에 묵직한 발자국이 새겨지며 50M부터 시작한 간격이 다시금 좁혀졌다.
무조건 붙어야 한다.
전투 양상이 장거리 교전으로 교착된다면 일말의 승산도 찾을 수 없다.리본은 접고 입자 형태의 그림자를 날개처럼 분사해 전력 추진했다.
-탕 탕 탕 탕!
조금 전까지 지향사격에 불과했던 비앙카의 조준에 날카로운 정교함이 깃들었다.
한 발 한 발이 급소를 향해.
피할 수 없는 각도와 타이밍에 날아온다.
직선의 힘을 흘려내기 가장 좋은 방법은 회전.
고우의 S이 3이처럼 회전동시에 끌&당긴 망토가 갑주를 감쌌다.
원체 뛰어난 방호 성능에 회전이 더해지자.
-키이잉! 키이잉! 키이잉!
그라인더로 금속을 갈아내는 굉음과 함께 도탄된 탄환 조각이 흩날렸다.회전하던 발이 단단히 땅에 맞닿는 그 순간.
-쿠웅!
선체를 울리는 진각과 더불어 시우의 몸이 재가속한다.
낭비되는 힘 없이 집결되고 응축된 힘은 일전보다 배는 빠르다.
이번 한 수를 위해 숨겨두었던 갑작스러운 변속은 최후의 한 발 탄환마저 빗겨냈다.창의 사거리까지는 고작 한 두 걸음 남짓.
“말했잖아, 사양한다고.”
-웅! 우웅! 우우우웅!
심장을 향해 올곧게 뻗어 가던 적색의 창은 은빛의 방패 앞에 허무하게 멈춰 섰다.
그것은 기이하리만치 이상한 광경이었다.
음속을 넘어서 공기를 터뜨리던 창끝이 고작 손바닥 두 개 크기의 방패에 맞닿자마자 급정지하다니.
충돌로 인한 충격도, 그 뒤의 여파도, 아무것도 없다.
처음부터 창을 방패에 맞대고 있던 것처럼 고요함만이 가득하다.
창격을 막아낸 방패는 제 소임을 다했다는 양 비앙카의 주위를 공전했다.기록서에 존재하던 두번째 예장.
‘비테게의 방패’.
자율방어의 상위 호환 개념.
외부에서 가해진 모든 에너지를 0으로 돌려버리는 절대 방어의 방패.
거기에 ‘사상의 관측안’의 백업이 더해진다면 비앙카 벨릴리에게 사각 따위는 없으나 다름없다.
아직이다.
멈춰선 창날이 움직인다.
호를 그리며 비테게의 방패 위를 쉴새 없이 두드리는 창대와 창날은 흉흉한 소리와 함께 공기를 찢어발긴다.
그러나.
분명 소나기 같은 연격을 퍼붓고 있음에도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으레 들리는 격돌음이나 충격파 손에 느껴지는 반동이 없는 까닭이다.
비앙카가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연격을 비테게의 방패가 막아서고 있었다.
창끝에 맺혀 있는 미약한 왜곡장 따위는 비앙카의 마력으로 강화된 예장에 당장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비앙카는 슬며시 웃으며 부채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새하얀 깃털들이 부슬거리는 생김새.
“좀 떨어져 줄래?”
그것이 가볍게 팔락이는 순간.
인지를 뛰어넘는 기괴한 현상이 일어난다.
저 크기의 부채로는 시우의 격렬한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풍압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그럼에도 확실히 뺨에 맞닿은 바람을 느낀 즉시,간신히 좁혔던 거리가 일전보다 멀리 떨어져 나간다.
이것이 비앙카의 세 번째 예장.
‘시성선 (詩聖扇)’.
빗발치는 포화와 원거리 저격을 뚫고 비앙카 앞에 서게 되어도 의미가 없다.한 번의 부채질만으로 상대와의 간격을 아득히 벌려버리는 저 부채가 있으니.
하나하나 받아내기 힘들 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마법이 정확하게 급소에 꽂혀온다.
간신히 간격을 뚫고 가도 빈틈없는 방패가 기다리고 있으며, 거기서 잠시라도 지체했다간 또 간격이 벌려지며 첫 페이즈로 돌아가야 한다.
“더 해야 해? 보여줄 만큼 보여준 것 같은데.”
비앙카는 일련의 싸움이 벌써 지겨워졌다는 듯 살랑살랑 부채질한다.
그러나 시우로서도 비앙카로서도.
막 피아 간 탐색전을 끝냈을 뿐이다.
원거리에서 일방적으로 요격한다.
붙으면 사기적인 방어로 막는다.
다시 원거리로 이격한다.
언뜻 보기에 결점이 없어 보이는 완벽한 원 패턴을 파훼할 방법이 있을까?
“아직이야.”
타카쇼를 위해서라도 생명줄을 손에 쥐기 위해서라도.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할 수 있는 것이 더 남아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마력과 마력, 그리고 더욱 많은 마력.
“피어라.”
시우의 금안이 다시금 소용돌이가 되어 주변의 마력을 흡수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0시 늦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