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92화 (392/917)

#392

1.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뜨거운 불똥을 통째로 삼킨 것처럼 속이 끓는다.

“타카쇼….”

노예 5년 생활 동안 누구보다 시우를 지지해주던 친구.

양아치라는 편견을 깨고 누구보다 멋지게 꿈을 향해 달려가던 친구.

그런 친구가 넝마 짝이 되어가고 있다.

한 버러지 같은 공적에 의해서.

비앙카가 보여준 원거리 통신용 수정구에 기록된 영상은 끝없는 고문의 시간을 조명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입안에서 쇠 맛이 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던 까닭이다.

“정말 가상하지 않아? 네 친구 말이야. 이 꼴이 될 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어. 사실 별 의미 없는 행동인데도 말이지.”

타카쇼를 고문하는 모습도.

그의 의리와 의지를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모습도.

죽이고 싶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향한 강렬한 살의를 느꼈다.

두루뭉술한 욕설 따위의 의미가 아닌, 단어 그대로의 날 것의 살의를.

일전 디아나와 함께 갔던 서고에서 얻은 공적기록서.

아직 녹화된 영상이 끝나지 않은 가운데 그 커다란 책을 펼친다.

뇌의 혈관이 끊어질 듯한 분노와는 별개로 머리는 이 상황을 정확히 재단하려 들었다.단순히 감정에 휘둘려 우왕좌왕하는 것은 하책이다.

이 영상의 의의는 단순히 악랄한 괴롭힘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신시우를 꾀어내기 위한 유인책이다.

그렇다면 대면해야 할 상대의 정보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기록서가 작성된 연도는 1972년.

지금으로부터 뚜려 50년이 넘는 옛 기간이지만 시우는 손쉽게 영상 속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빛바랜 흑백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마녀.

비앙카 벨릴리.

맥시코 최대 카르텔의 대모(大母)이자 클리포트 소속의 공적.

활동 기간은 I860년부터, 150년이 넘게 공적으로서 존재해 온 22 위계의 마녀.

“내가 원하는 건 붉은가지 그리고 신시우 너야. 친구를 위해 이렇게 열심히 버텨 준 타카쇼를 구하러 와야 하지 않겠어?”

자성마법은‘소유욕’.

일천이 넘는 아티팩트와 5개의 예장을 손에 넣은 수집가이다.

작금에 이르러 마공학의 한계는 뚜렷하다는 것이 마녀 간의 주론이지만 욕망의 마녀는 경우가 달랐다.

그녀는 수집가 임과 동시에 손에 들어온 아티팩트와 예장을 ‘자기화’하고 마개조 시킬 수 있는 뛰어난 공예가인 것이다.

“장소는 이곳. 부산 영도의 조선소, 시간은 흐음… 넉넉잡아 정오로 해줄게.”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계속되는 보유 예장과 아티팩트의 목록.

비앙카 벨릴리의 위험성을 서술하는 데만 이 커다란 책의 수십 페이지가 할애된다.심지어 이마저도 50년 전의 자료.

“단 아주 중요한 조건이 있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올 것.

인질 협상에 있어 일대일 교섭은 기본이잖니? 만약 다른 마녀에게 알리거나 함께 온 낌새라도 있다면 타카쇼는 죽을 거야.”

시우는 비앙카가 보유한 마도구의 목록과 그 효과가 기술된 페이지를 펄럭였다.

여유롭고 한가하게 정독할 시간은 없다.

사진을 찍듯이 페이지째로, 모든 정보를 뇌에 욱여넣었다.

“0| 제안이 마지막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 만약 이번에 오지 않는다면 다음은 네 소중한 사람을 하나하나 붙잡아 다시 묶어줄 테니까. 견습마녀 쌍둥이라든지, 샤론 에버그린이라든지.”

이성을 잃지 않고자 다잡은 마음.

분노는 차디차게 식어간다.

그리고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게. 행운을 빌어.”

욕망의 마녀는 생각 이상으로 이쪽의 사정을 꿰뚫고 있다.

에아 사달멜리크 때처럼 기습적인 습격이 아니라 충분한 조사를 바탕으로 시우를 불러들이고 있다.

게다가 상대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닌 최소 22 위계 이상의 공적.

50년 전 정보를 기술한 기록서만 봐도 얼마나 강할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하물며 저런 잔혹한 수법까지 동원하는 상대가 차 한잔 하자고 시우를 불러들이는 것은 아닐 터.

냉철하게 씻겨 나간 머릿속에서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도 있다.

외면하고자 하면 외면할 수도 있다.

“…타카쇼….”

그러나 모진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의리를 지키려 했던 친구를 못 본 척할 수 없다.

가야 한다.

그 이외의 ‘안전한’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박아넣은 정보를 분석하며 계획을 세웠다.

모든 계획은 욕망의 마녀와 싸우게 될 것을 상정한다.

시우가 혈혈단신으로 그녀의 앞에 서게 된들 비앙카가 순순히 약속을 지키리라는 보장은 없다.

타카쇼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전투 준비는 필요하다.

시우는 시계를 보았다.

예정된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약 5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아마 수정구를 늦게 확인할 가능성과 게헨나 통관 절차를 고려해 넉넉한 시간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나 시간을 주고 ‘인질과 함께 기다린다’라는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은.

시우가 다른 조력자와 동행해도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자투리 시간은 시우가 활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덧없이 흘러가게 놔두기엔 일분일초가 아깝다.

시우는 곧장 붉은가지를 챙겼다.

검은 리본에 둘러싸인 묵직한 예장의 손맛을 느끼며 시우는 즉시 좌표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구하러 테니까.”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낮게 읊조린 시우의 몸이 파란빛의 마력의 분류와 함께 사라졌다.

2.

순리와 묘리를 비틀어 세계의 당위성까지 거스를 수 있는 대마녀의 경지, 20 위계.

비앙카 벨릴리는 그보다 두 단계나 더 높다.

여지껏 시우가 상대했던 그 어떤 적보다도 강적이다.

샤론에게 원소 마법을 배워 그림자의 법칙을 강화하였다 한들.

스승님께 근접전투를 배워 만병지왕의 계약을 한계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들.

시우는 아직 신출내기 마녀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승산은 0%에 한없이 수렴, 개죽음당할 목숨 하나를 얹을 뿐이다.

추가적인 사전준비가 필요했다.

시우가 찾은 곳은 일전에 주소를 받아두었던, 키벨레 페리윙클이 머무는 저택.

저택에 한가로이 앉아 업무를 보던 페리윙클은 기별도 없이 나타난 시우를 반갑게 반겨주었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야?”

“오랜만입니다. 페리윙클 님.”

페리윙클이 만든 행운의 네잎클로버.

그것은 소유한 자의 행운을 유도할 뿐 아니라 죽음의 운명조차도 빗겨나가게 한다.

목숨을 걸게 될지도 모르는 싸움에서 그 클로버는 기사회생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연락도 없이 왜 그냥 왔어. 약속 지키러 온 거야?”

시우는 지체하지 않고 페리윙클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페리윙클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우에게 안기려 들었지만, 이내 제지당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야, 섹스하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왜 왔어.”

사뭇 다른 시우의 분위기에 페리윙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스트바 컨설팅을 대가로 왔겠거니 싶었는데, 뻣뻣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전에 주셨던 네잎클로버 최대한 많이 주실 수 있나요?”

“갑자기?”

당황스러운 요구에 다소 황망해진 페리윙클은 시우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그게 아무한테나 턱턱 주는 건 줄 알아?”

“다음에 어떤 조건이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뭐야? 엄청 진지한 척하네.”

“부탁드립니다.”

페리윙클의 시선이 시우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훑었다.

가치를 측정함과 동시에 상황을 탐지하는 듯한 눈빛.

여유가 없는 표정과 숨길 수 없는 긴장감.

그리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어둠까지 확실하게 포착했다.

“네 번.”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페리윙클의 분위기가 일변한다.그녀는 푸욱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개입해 한 사람의 운명을 극적으로 바뀔 수 있는 최대치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

“제게 남은 건 세 번이라는 의미네요.”

“이미 줄 것처럼 말하는 게 열 받기는 한데. 뭐, 나쁜 조건도 아니니까.”

페리윙클은 눈을 감았다.

꼭 쥐고 있던 주먹 새로 현묘한 무지갯빛이 빛나며 거대한 마력의 맥동이 울렸다.그녀가 손을 펼쳤을 땐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세 장의 네잎클로버가 놓여 있었다.마력을 짜내다 시피 사용한 페리윙클은 피로를 느낀 듯이 머리를 붕붕 저었다.

“0| 클로버 한 장에 담긴 값어치를 아니?”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소유하고만 있어도 천운을 끌어들인다.

연애운, 금전운, 사업운 일일이 망라하기도 어려운 무수한 행운을 손에 쥐여준다.

그것이 여섯 장이나 있다.

대충 치킨집만 열어도 세계적인 프렌차이즈로 성장할 것이다.

변변찮은 외모라도 여자가 벌처럼 꼬이고, 심심해서 사는 로또마다 당첨된다 해도 이상할 일은 없다.

“세상의 모든 마법은 객체와 주체로 나뉘어.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될 때보다 객체를 대상으로 마법을 발현시키는 편이 난이도가 훨씬 높아. 그리고 나는 내자성마법을 완벽하게 타인에게 적용하는 게 가능하지.”

“네 알고 있습니 다 ”

“그래서 Lfe 절대 이 클로버를 아무한테나 주지 않아. 행여 공적의 손에 잘못 들어가버린다면, 그 마녀를 만났을 때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거든. 완벽히 동일한 자성마법은 서로 상쇄되니까.”

페리윙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력으로 클로버를 엮어 팔찌처럼 만들어주었다.그것을 시우의 팔목에 끼워주고는 까치발을 들어 작게 이마에 키스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묻지 않겠지만. 못된 사람한테 빼앗기지 말고 무사히 돌아오렴.”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3뭘.V가처럼 열심히 갚아야 할 텐데.”엉덩이를 팡 두들겨 맞은 시우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플로라 양장점으로 좌표이동식을 사용했다.아직 한 가지 준비가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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