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1.
부산 영도 조선소에는 드라이 도크 내에서 조립을 끝내고 진수(進水)를 앞둔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정박해 있다.
길이 400M, 높이 35M, 폭 621VL 20피트 컨테이너를 23000여 개 적재 가능한 탑재량.
아직 명명식도 거치지 않은 세계 최대 크기 이 컨테이너선은 쇠퇴를 거듭하는 한국 조선업에 새로운 부흥기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비앙카가 타카쇼를 잡아온 곳은 컨테이너선의 내부 화물창.
아직 건조가 완료되지 않은 만큼 컨테이너가 들어차지 않아 가이드레일을 드러낸 선내는 오직 강철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숲을 연상시킨다.
파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시간과 장소.
참가자와 장소를 선별하는 것만 봐도 주최자의 센스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앙카는 자신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생선 가시처럼 빽빽한 골조 사이에서 펼쳐지는 삶과 죽음의 무도회.
어찌 멋지지 않을쏘냐?
“흐응, 흐음
비앙카는 타카쇼가 일어나기 전까지 열심히 배를 돌아다니며 그럴듯한 장식을 끝냈다.
다만 지나치게 삭막하지 않도록, 적당히 극적인 흥취를 돋아주도록 조금 인테리어를 손봐준 비앙카는 마침 주위에 굴러다니던 쇠사슬에 묶어 매달아둔 타카쇼의 앞에 섰다.
“크윽, 큭… 여기는…?”
“모범 답안과 같은 대사네.”
마법으로 의식을 날려버린 지 어언 한 시간.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타카쇼 앞에서 비앙카는 미소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팬티 한 장 차림인 제 몸을 보고, 비로소 비앙카를 바라본 타카쇼.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설레는 마음으로 타카쇼를 바라보는 비앙카.
얼굴 꽤나 반반한 일본인은 갑자기 곡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녀님…! 저는 젊었을 적부터 담배도 피우고 호스트바 일하면서 술도 양동이째 마신지라 간도 쓰레기입니다…!”
비앙카는 김이 빠져 콧방귀를 끼었다.
참으로 아무런 흥이 나지 않는 멍청해 보이는 대사였다.
눈치 빠른 친구인 만큼 깨어나자마자 오돌오돌 떨어댈 줄 알았는데.
“부디 저를 보내주십시오! 여기서 있던 일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평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러니?”
“네! 그게 아니라 외로운 술자리의 말벗을 원하셨던 것이라면 저 미마야 타카쇼 지원하겠습니다! 마녀님께서 한순간의 따분함도 느끼실 수 없게 열과 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자기 PR0| 능수능란하구나.”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앙카의 고개가 갸우뚱해진 다.조금 뒤늦게 감탄했다.
신시우의 친우, 저 일본인은 비앙카가 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호텔방에서 마주쳤던 때 직감만으로 짐작했던 눈치 빠른 친구이다.
이 상황을 보면 그 의혹이 확신으로 굳어졌을 텐데도 뻔뻔하게 혓바닥을 놀렸다.
호들갑과 엄살, 그리고 상황에 맞지 않는 재기발랄한 말솜씨로 흥미를 끌어낸다.약자가, 약자이기에 취할 수 있는 영악한 생존전략.
“재밌는 친구였네.”
“마녀님의 미소를 위해 노력할 뿐이지요!”
풀어주기만 해도 구두를 핥으러 기어올 것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비앙카를 바라보는 타카쇼.그런 그에게 넌지시 희망을 던져주듯 말한다.
“살고 싶니?”
“마녀님,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눈치챘잖니? 내가 실은 착한 요정이 아니라는 거.”
“하하, 농담하지 마시죠. 마녀님처럼 고귀한 품위를 지니시는 분이 나쁜 마녀님이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요 녀석 봐라?”
단순히 영악한 것만이 아니라 대담하기까지 해서 비앙카는 더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기왕 가지고 놀 장난감이라면 조금 더 싱싱한 편이 좋지 않겠는가?
넉살 좋게도 생글생글 웃음을 띠던 그의 얼굴이.
한 사람의 이름과 함께 굳는다.
“신시우.”
“...네?”
“너 신시우 친구잖아. 어디 있는지 알지?”
상승하는 체온.
바짝 굳는 입꼬리와 좁아지는 동공.
반사적으로 마른 입술을 핥는 혀와 좌우로 위를 향하는 눈동자.
혼란을 느끼는 인간이 보이는 대표적인 반응들.
비앙카는 먹잇감을 보는 뱀의 눈으로 타카쇼를 바라보았다.
“네가 그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참 기쁘겠는데 말이지.”
사실 비앙카는 이미 그의 소재를 알고 있다.위치뿐만이 아니다.
이 최초의 고추 달린 마녀와 인연 깊은 마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중에 위험한 마녀는 누구이며 인간관계는 어떻게 되는지.대인관계, 외모, 성격, 상황, 전투력까지 제법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위험이 되리라 판단한 티페레트 공작을 에아를 미끼 삼아 떨어뜨려 놓고 계획에 시동을 걸었다.
다른 마녀가 협력한다면 도중에라도 몸을 뺄 수 있지만 티페레트 공작이 달라붙는다면 위험도가 급격히 올라가니까.
아무튼 변함없는 사실은, 비앙카가 굳이 타카쇼에게 그의 위치를 캐물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어디까지나 유흥이며, 정 많고 마음 따뜻한 청년이 눈 뒤집힐만한 영상을 뽑기 위한 바람잡이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신시우가 누구인가요? 그나저나 호텔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들어주는 마녀라고 하셨는데.”
비앙카는 말을 돌리는 타카쇼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상식적으로 이 상황에서 자신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에 눈치를 챘을 것이다.
비앙카의 위험성은 진작에 눈치챘을 것이고.
그런데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는다.
그 거짓의 대가가 죽음일지도 모르는데.
“그래?”
비앙카의 미소와 함께 마른 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
동시에 등 뒤로 묶여 있던 타카쇼의 손가락 하나가 기이한 각도로 비틀어진다.
손은 신체 다른 기관보다 섬세하고 따라서 민감하다.
정으로 두들겨 맞은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타카쇼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며 쇠사슬이 짤랑였다.
“신시우 알지?”
그제야 타카쇼의 표정에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갑자기 과묵해졌네. 따분한 남자는 싫은데.
-빠직 빠직 빠직
“쿠아 오오우 1111”
연이어 들려오는 생뼈가 부러지는 소리.
깔끔한 골절이나 탈구 따위가 아니다.
가능한 극한의 고통을 느낄 수 있게끔 절묘한 안배가 들어간 손가락 부러뜨리기다.
입을 다물려던 타카쇼도 괴상한 표정으로 침을 튀기며 비명을 질러댔다.
“친구... 맞아요 왜요 뭐 볼일 있습니까!”
“그래 솔직한 게 좋잖아. 이제 위치를 알려줘 평소 어디에서 지내는지만 알려주면 돼. 쉽지?”
“말해주면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잡아서 실험동물로 삼아야지. 모처럼 귀중한 샘플인 걸.”
예상대로의 질문이었는지 타카쇼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한참 침묵을 고수하던 타카쇼는 한숨과 함께 사나운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 애~미 씨팔 팔자 존나 사납네.”
비앙카가 놀란 것은 단지 타카쇼가 욕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철저히 을이다.
단순히 이해득실을 따지는 갑을관계가 아니라 생사여탈이 달린 상하 관계이다.
게헨나에서 마녀들 뒷구멍을 빨아 출세한 그라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런 상황에서 욕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출.
허나 이해한다.
아직 손가락 네개가 부러졌을 뿐이다.
“아하, 사무라이 정신 그런 거지? 이해해. 여기서 덜컥 말해버리면 폼이 안 살잖아. 친구는 팔 수 없어! 차라리 날 죽여! 이런 대사를 할 기회가 살면서 몇이나 되겠어.”
비앙카는 타카쇼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민망하지 않게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고문해줄게. 네 스스로에게도 변명거리가 될 정도로.”
타카쇼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했다 한들 고통까지 두렵지 않을까?
연인도 아닌 일개 친구를 위해 어디까지 공포를 견딜 수 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줘. 서로 편하게 가면 좋잖아? 신시우를 잡아들이면 넌 풀어줄게.”
“여보쇼. 아줌마.”
싱긋거리며 살살 타카쇼를 꾀던 비앙카의 미소에 금이 간다.
“홋카이도의 남아 미마야 타카쇼가 친구를 팔 것 같아?”“그러지 말고 시원하게 떡이나 칩시다. 사람들의 욕망을 이뤄주는 착한 요정이라며! 나 섹스 좀 시켜줘! 보지 보여 줘! 내가 시우보다 고추는 작아도 테크닉은 더 좋아!”
시건방진 미소를 지으며 바락바락 대드는 꼴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죽고 싶은 거니?”
“마녀님도 몸이 근질근질해서 남자 납치하려는 거 아닙니까? 우리 솔직해집시다. 속박 플레이를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어서 절 풀어주시고 팬티 내리시죠. 후지산 봉우리까지 보내드릴게요.”
“아하하!”
비앙카는 웃었다.
그를 납치한 이유를 말하자마자, 친구를 팔라는 권유를 하자마자 급발진하는 타카쇼.이렇게 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그의 위치를 털어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앙카의 분노를 사려 들고 있다.비앙카가 건방진 행동을 참지 못하고 한 방에 보내 버리게끔.
죽음을 각오했다.
비록 그의 행동은 무의미할 테지만 그 기개만큼은 인정했다.
“아주 귀여운 말버릇이네.”
“늑J I 하
비앙카의 손이 타카쇼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음란하게 그의 물건을 주물럭거리며 노닥인다.
“이제야 제 마음을 알아주시네요. 이것도 좀 풀어주시지 않겠습니까악…!”“너무 강한 척하지 마렴.”
그의 시도는 훌륭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비앙카마저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도발이었음에.
나불대던 타카쇼의 입이 봉인됐다.
비앙카의 하얀 손이 그의 고환 하나를 단단히 움켜쥔 것이다.
“어이어이 마녀님, 농담이지…?”
하얗게 질리는 타카쇼의 얼굴.
비앙카가 목표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까닭이다.남성에게 가장 커다란 공포이자 고통를 선사하는 방법.비앙카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어디보자…. 작은 쪽으로 으깨줄 테니까. 죽으면 안 된다?”“끄아아아악…!”
손가락을 분지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비명이 컨테이너선의 화물창을 울린다.끔찍한 비명을 들으면서도 비앙카의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우웨에엑…! 에엑…! 우에에엑!”
흐르는 눈물과 콧물, 그리고 속이 뒤틀리는 고통에 흐르는 토사물.타카쇼의 몸은 경련과 경직을 반복하다 마침내 축 늘어졌다.
“0| 정도면 되겠지?”
손수건을 꺼내 타카쇼의 입가에 묻은 위액을 토닥토닥 닦아준 비앙카.그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이제 신시우가 어디 있는지 말해 줄래?”애그 … 그 그 그 … 그 히히히, a * I”
갑자기 들려오는 광소에 비앙카는 흠칫 놀랐다.
스멀스멀 올라온 공포를 억지로 밀어내려는 듯 폐를 쥐어짜 내는 웃음.
실성한 것처럼 웃어대는 반응은 비앙카가 예상했던 그 어떤 경우의 수에도 없던 것이었다.
“끄윽…. 말해줄게…. 말해줄 테니까…. 이리와 봐….”
“읊어 보렴.”
잡혀 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손가락 네 개가 으스러지고 한쪽 고환이 박살 난 인간.
늙고 병든 끝에 먼지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존재.
온갖 체액으로 엉망이 된 얼굴.
“아줌마, 내 우정은 불알 한쪽보다 훨씬 묵직하다고….”“...그러니까, 개 짓거리 말고, 그냥 죽여.”벌벌 떨리는 몸과 불안함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이면서도 저런 처참한 몰골이 되어서도.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나 방금가슴이 찡했어.”
그 말을 뱉는 것을 끝으로 기력이 다했는지 힘없이 늘어지는 타카쇼의 몸에 날카로운 채찍이 날아든다.
-부웅!
“그아아아악…!”
가볍게 살을 찢은 채찍에 타카쇼의 몸이 미친 듯이 떨린다.고작 채찍 한 대를 맞고 보이기에는 과한 반응이었다.
“이건 ‘참회의 채찍’이라는 별 볼 일 없는 아티펙트야. 맞은 사람은 일생에 느꼈던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을 다시 느끼게 된다나?”“후욱…! 후욱…! 후욱…!”
-부웅!
. . . .
“네 용기와 가상함에 박수를 보낼게. 어디까지 버티는지 보자고?”치아노제 반응이 일어나 보랏빛으로 물드는 입술, 눈의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붉게 물들고 앙다문 어금니에 금이 가는 압도적인 고통.그런 고통을 느끼면서도 타카쇼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