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87화 (387/917)

#387

1.

“그럼 그대도 들어가 보게나.”

“네, 공작님. 안녕히 주무셔요.”

엘로아는 샤론을 배웅한 뒤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이따금 술을 들고 엘로아를 찾아왔다.

엘로아에게서 사정을 듣고 딱하게 여겨 공감해주었던 샤론인만큼 지속적으로 말동무 겸 소통창구를 자처하는 것이다.

시우에게 잘 어울리는 착한 마녀다.

샤론은 시우에 대해 독점욕을 내세우지 않았다.

오늘만해도 술자리가 술자리가 무르익으면 제안하지 않았던가?

모든 진실을 시우에게 솔직히 밝히고 이야기 해보라고.

엘로아는 그것을 담담히 거절했다.

그는 엘로아가 라피 대신 마음속에 품은 제자이다.

그저 지금처럼 수련을 봐주고 행복하게 잘 지내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겁쟁이일 뿐이지….”

하지만 알고 있다.

엘로아의 몸도, 진심도.

그를 기억하며 그리워한다.

밤마다 시우의 모습이 떠오르고 뒤척이며 그의 품에 안기던 순간을 꿈꾸며 잠이 든다.

그의 곁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변명은, 엘로아의 드높은 도덕적 잣대에 어긋나지 않는 거짓말일 따름이다.

달빛이 부서지는 창가에 선 엘로아는 시우가 사준 파자마로 갈아입고 머리를 풀었다.

연분홍빛 장발이 흐드러지며 옷을 타고 흐른다.

술이 들어간 탓일까? 조금 분별없는 정신과 느슨해진 이성.

그 틈새를 타고 기억이 흘렀다.

거칠게 엘로아의 허리를 움켜잡던 그의 손길과, 귀 바로 뒤에서 들려오던 거친 호흡이 떠오른다.

“…시우….”

엘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고 미혹을 떨쳐냈다.

아무래도 오늘도 찬물 샤워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욕실로 발길을 옮기려던 엘로아의 눈길에 서류봉투가 걸렸다.

그 순간 엘로아를 어지럽히던 술기운과 잡생각이 알코올이 증발하듯 삽시간에 사라졌다.

“…….”

어느새 손에 들린 계약검.

책상 위에 보란 듯이 놓인 봉투.

이건 샤론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술자리를 함께하던 사이 이 방 안을 드나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약한다.”

엘로아의 눈에 연분홍빛 광채가 떠돈다.

미혹과 거짓을 꿰뚫는 시선이 주변을 샅샅이 훑는다.

수상한 이는 없다.

이곳은 게헨나, 그중에서도 높은 보안을 자랑하는 제머나이 저택.

20 위계의 대마녀 샤론과 23 위계의 엘로아의 이목을 속이고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엘로아는 한치의 방심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아무런 마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 나온 것은 세 장의 사진.

“이건….”

엘로아의 동공이 경악으로 좁아졌다.

종이상자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허름한 건물과 그 사이로 촘촘하게 드리워진 네온사인 간판.

저마다 먹거리를 손에 쥐고 북적이는 군중 가운데 찍힌 한 마녀.

어깨 위에서 짧게 쳐진 단발.

저주받은 홍옥처럼 붉은 눈동자.

엘로아 티페레트가 생을 불태워 복수하려 했던 공적.

에아 사달멜리크.

모두 그녀를 몰래 촬영한 듯한 사진이었다.

황급히 사진의 뒤를 보니 장소와 시간이 쓰여있다.

일자는 바로 어제, 장소는 홍콩 카오룽의 불야성.

네이선 거리가 가로지르는 몽콕.

“…….”

엘로아는 자신이 생각보다 침착한 것을 깨닫고 놀랐다.

예전이었더라면 일말의 재고도 없이 이 사진 뒤에 적힌 장소로 뛰어나갔을 것이다.

모든 것을 불태울 격렬한 증오가 그녀를 사로잡았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차분히 전후의 상황을 고려하고 있다.

삼엄한 마법적 경비를 뚫고 엘로아의 책상 위에 놓인 에아의 사진.

선의를 품은 익명의 제보라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은 필요 없다.

그 말은 이 사진을 전달한 자가 정식적인 절차를 밟을 수 없는 마녀라는 것.

매우 높은 확률로 함정이다.

“시우.”

뚫어지라 사진을 바라보던 엘로아는 문득 시우를 떠올렸다.

시우가 이곳에 있더라면 엘로아를 말렸겠지.

만약 사랑스러운 제자 신시우가 이 도발을 무시하고 신중을 기하자고 간언했더라면 곧이 곧대로 들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얼굴은 뒤늦게 격류처럼 쏟아지는 분노로 흐려진다.

함정인지 아닌지의 여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녀의 역린을 가지고 장난을 치려는 마녀가 있다면 베어 숙청할 뿐.

함정이 있다해도 통째로 무너뜨리면 그만이다.

엘로아의 몸이 쏘아지듯 포탈로 향했다.

2.

클라라의 도움으로 상처를 회복하게 된 이후.

아멜리아와 클라라의 관계는 한결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더는 뭉뚱그려 넘어갈 수 없는 일이란 것이 있다.

“클라라.”

“응!”

“왜, 이렇게 막는 건가요?”

“응? 뭐가?”

아멜리아는 테이블 위에 열심히 요리를 늘어놓는 클라라에게 물었다.

“당신은…. 저를 붙잡으려 하잖아요.”

숨 돌릴 틈 없는 사냥 일정에 맞닥뜨린 마력 결핍.

아멜리아는 자율방어를 해제하고 클라라에게 정제된 마력을 받아 가까스로 회복했다.

그 사건 이후로 클라라는 아멜리아를 공방에 데려와 온종일 색다른 요리들을 선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아멜리아를 쉬게 하려는 의도라고 여겼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다.

마치 아멜리아가 살생부를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는 듯.

며칠 내내 요리 공세를 퍼부었다.

처음엔 클라라의 호의를 감사히 여기던 아멜리아가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아직 너는 충분히 쉬지 못했으니까.”

“휴식은 충분해요. 마력도 거의 회복했고요.”

“…….”

“….다음 사냥감과 아는 사이인가요?”

여기서 아멜리아가 떠올린 것은 클라라와 다음 살생부에 기재된 공적 비앙카 벨릴리가 지인인 경우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클라라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

너무도 다행이었다.

만약 아멜리아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클라라의 지인이 다음 사냥감이었더라면….

어떻게 상황이 꼬였을지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다만…. 욕망의 마녀는 위험해.”

“위험?”

“아멜리아, 이번엔 네가 당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네가 가능한 오랫동안 쉬어줬으면 좋겠어….”

클라라의 말에서 아멜리아는 걱정과 배려를 느꼈다.

아멜리아의 의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클라라로서는 요 며칠 간 요리 퍼레이드가 그녀 나름의 은유적인 만류였던 셈이다.

그것이 사뭇 고맙다.

“고마워요.”

“…고마울 거 뭐 있어? 다 돕고 사는 거지….”

이후 별다른 대화 없이 마무리된 식사.

클라라와 아멜리아는 각기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쳤다.

이렇게 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게 된 것도 모두 클라라의 자연스러운 배려 덕택이다.

클라라가 작게 코를 골며 잠자리에 들자 아멜리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

“흠냐….”

한계도 모르고 홀로 부서져 가던 아멜리아.

그런 그녀의 곁에 신체적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모두 클라라의 덕택이다.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서는 조금 더 함께 있어 주고 싶지만, 아직 주어진 일은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살생부의 끝을 보기 전까진 시우의 얼굴을 보러 갈 면목이 없다.

그렇다고 클라라에게 기대기만 한다면 그녀 역시 부담감을 느끼겠지.

이미 호의는 충분히 받았다.

“고마워요.”

클라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아멜리아는 품에서 그녀를 위해 만든 향수 한 병을 내려놓았다.

이젠 다시 각오를 다질 시간이다.

아멜리아는 스승님의 유품인 망토를 걸치고 밤길을 나섰다.

3.

“이게 성공한 사업가의 삶인가?”

5성급 호텔 페리윙클 서울의 로열 스위트 룸.

프레지던트 룸까지는 아니어도 어지간한 월급으론 꿈도 못 꿀 호화 객실에서 타카쇼는 야경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신시우의 소개로 만난 키벨레 페리윙클은 약속을 지켜주었다.

자칫 망할뻔했던 호스트바를 내공이 묻어나오는 컨설팅으로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고급 주류를 반입을 위한 유통책까지 소개해 주었으니.

이주일 간의 현세 행을 허가받은 타카쇼는 아도나이 백작가의 밀수꾼들과 동행한 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로즈 글래스에 납품되어야 하는 주류는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는 물품이어서는 곤란했다.

따라서 해외 유명 주조 업체와 직공급 계약을 체결함은 물론, 이 바닥에 뼈가 굵은 경매 대리업자 셋을 소개받아 고용했다.

안 그래도 하이엔드 급 주류가 모자라 매출이 제한되고 있는 지금 이 계약은 순풍에 돛단 격으로 사업 수준을 끌어올려 줄 것이다.

페리윙클의 인맥을 빌리고 아도나이 백작의 후광을 입은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까지 계약을 이끈 것은 그간의 영업 실적을 타카쇼 나름대로 잘 어필했기 때문이다.

“어찌 축배를 들지 않고 배길쏘냐.”

비록 함께 술잔을 나눌 사람도 침대 위에서 축하해줄 여자도 없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타카쇼는 흐뭇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노예로 일할 때 이런 호텔은커녕 현세로 나오는 것도 상상도 못 했는데.

이게 따지고 보면 모두 시우 덕분이다.

“하… 진짜 이 은혜를 어찌갚냐 시우야.”

옆에 있으면 농담 안 하고 성심성의껏 빨아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타카쇼는 와인에 취하고 친우의 고향 야경에 취한다.

“남은 하루 동안은 쇼핑이나 하면서 샤론 씨 선물이나 사가야겠다.”

시간이 늦었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잔을 내려놓고 침대로 향하던 중 타카쇼는 뜻밖의 인물이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마녀다.

커튼처럼 풍성하게 웨이브가 진 상앗빛 금발.

어둠 속에서도 야경을 받아 표표히 빛나는 비취색의 눈동자.

타카쇼는 즉시 상대가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마녀들 눈칫밥을 먹고 산 게 6년이다.

저 흠잡을 곳 없는 외모가 마녀가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일 테지.

원래라면 아무리 당황스러운 상황이라도, 설령 초면의 마녀가 호텔 방에 떡하니 들어서 있더라도 언제든지 정중하게 응대할 준비가 된 타카쇼였다.

하지만 침을 삼키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눈을 깜빡이는 작은 행동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인형을 쏙 빼닮은 저 마녀에게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질척함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객실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공기가 사린가스로 뒤바뀌는 듯한 위기감이 뇌내의 경종을 두들긴다.

꼼짝도 못 하고 굳은 타카쇼를 보며 그 마녀는 배시시 웃었다.

“감이 좋구나?”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마녀는 쓱 일어선 뒤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실현해 주는 착한 요정. 비앙카 베릴리라고 해.”

어둠 속에서 비취색 안광이 섬광처럼 터져 나온다.

“널 데리러 왔어.”

EP.390 #84_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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