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86화 (386/917)

#386

1.

“하….”

타로 타운에서 책을 잔뜩 사 들고 돌아온 디아나는 침대 위에 엎드려 베개에 턱을 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생각이 복잡해져서 약 3시간 내내 부동자세로 혼잣말이나 하고 있다.

“생각해보니까…. 첫 키스네요….”

처음이란 아주 많은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 일등만 기억하는 것도.

최초, 원조 따위의 말이 으뜸으로 취급받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디아나는 첫 키스가 가지는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엄마 소설에서 많이 봤으니까.

사실 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키스란 아주 불결한 행위였다.

재채기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불쾌해지는 이유가 뭔가?

모욕하고 싶은 상대의 얼굴이나 옷에 침을 뱉는 이유가 뭔가?

바로 타액이 더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타액의 항아리 입구나 다름없는 입술을 맞대는 것.

더 나아가 그 타액으로 찐덕거리는 혀를 섞는다는 것이 사랑의 표식이라는 건 디아나 인생의 가장 큰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도대체 그게 뭐가 좋다고?

디아나는 팔을 뻗어 제 입술을 꼬집었다.

그와 입을 맞대던 순간이 떠오른다.

디아나가 목에 매달려도 거뜬히 버텨내던 시우.

말랑하고 부드럽고 유달리 뜨겁게 닿았던 살짝 까슬한 입술.

고장 난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

어느 것 하나 불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던 의문을 자연스럽게 이해시키는 마법과 같았다.

“…….”

약점을 잡는다는 변명.

그렇다 변명이다.

신시우는 이미 여러 방법으로 디아나에게 신뢰를 증명했다.

그리고 디아나는 악수만으로 시우와의 약속을 믿고 있었다.

구태여 그에게 입술박치기를 한 이유는 그것이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뒤죽박죽이에요….”

그렇다면 왜 그에게 어머니를 유혹해 달라고 부탁했는가?

왜 그의 손에 공략집까지 쥐여주며 빼앗기기 싫었던 가정교사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말았는가.

잔류하는 키스의 뒷맛을 곱씹는 지금조차 디아나는 어머니를 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없는 독점욕을 느끼고 있었다.

“술이나 마셔야겠어요.”

이런 모순적인 행동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이 신시우를 향한 감정보다 앞섰기 때문이겠지.

현재로써 디아나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여기까지였다.

2.

디아나와의 당돌하고도 해괴한 제안은 답변을 유보한 채 일단락되었다.

“…이게 참, 뭐랄까.”

어머니를 유혹하는 대가로 몸을 주겠다는 딸이라니.

패륜적인 제안이었다.

물론 급발진하면 온갖 기행을 벌이는 디아나의 성정을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제안이 상당히 단락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예상 하고 있다.

남녀 관계에 대해 순진무구한 디아나로서는.

문제 1) 엄마가 사라지는 게 싫다.

해결 1) 엄마한테 새 남자친구가 생기면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 2) 엄마를 꼬시게 하려면 좋은 조건을 걸어야 한다.

해결 2) 몸을 준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하려다 보니 다소 엉뚱한 답이 나온 것이겠지.

가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들이 제시한 해결 방안이 다소 섬뜩한 것처럼 말이다.

“이건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디아나가 어째서 개선 없는 게으름을 고수하는 이유.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예소드 백작에게 전해줘야 하는지, 아니면 디아나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침묵해야 하나.

이게 참 고민이다.

예소드 백작이 개인적으로 마련해 준 연구실.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시우의 눈에 테이블에 쌓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공적 기록서와 디아나가 골라준 십 수권의 책이다.

어차피 과외까지 시간도 애매한데 이것들이나 훑어볼까?

시우는 이제껏 제목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책 한 권을 펼쳤다.

“코코아보다 달콤한 것…. 로맨스 소설인가?”

손글씨가 아니라 인쇄기로 찍힌 듯한 이 책은 가죽 커버도 없고 하드커버조차 아니다.

그야말로 평민들이 부담 없이 볼 수 있을 로맨스 소설 같았다.

백작님이 이런 소녀소녀한 취미가 있다니.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를 일이다.

시우는 별 생각 없이 휘적휘적 책장을 읽어 넘겼다.

대충 앞부분 스토리를 일컫자면 견습마녀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한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마녀의 이야기인 것 같다.

이런 부류의 소설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제법 재밌다.

어휘도 풍부하고 문체도 좋다.

섬세한 감정선을 자아내는 표현들이 군데군데 박혀 있어 심심하지도 않았다.

“응?”

그리고 책의 4분의 1지점을 막 지나쳤을 때 나오는 노골적인 성애씬.

“뭐, 그럴 수 있지.”

인간의 기저 욕망 중 하나에 성욕이 자리 잡은 만큼 그 욕구를 긁어주는 요소는 대중문화에 쉽게 녹아드는 법이다.

당장 한국의 판소리나 민요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지난 밤 예소드 백작을 안으며 느꼈던 것은 그녀 역시 한 명의 여자라는 것이었다.

깐깐하기 짝이 없는 정통파 마녀의 이미지가 다소 흐려진 지금 백작님이 이런 류의 소설을 즐겨 읽는다 하여 새삼 경악할 것은 없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은 점차 시우의 이해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사건을 거쳐 피학의 쾌감에 눈을 뜬 마녀.

그리고 남자 주인공의 하녀를 자처하며 그에게 정복당하는 이야기.

“뭐야 이거.”

별의별 플레이가 다 나온다.

개조한 마편으로 엉덩이를 두들겨 맞거나, 야외노출 플레이를 한다든가 심지어 현세에서 공수한 성인용품으로 이렇고 저런 조교 플레이를 하는 것도 나왔다.

단순히 달달한 로맨스를 넘어 질척하고 노골적인 성애씬이 연달아 나온다?

“…야설이잖아?”

시우는 혹시나 싶어 다른 책들도 후루룩 훑어 보았다.

이제 보니 다들 제목이 심상치 않다.

귀축배달부, 심심한 마녀의 위험한 장난, 빚투성이 마녀의 탕감 생활, 나비꽃이 지는 법….

하나같이 굉장한 고수위였다.

그리고 모든 작품의 공통점이 있다면 지배하는 남성과 지배당하는 마녀.

이 구도를 확연하게 띤다는 것이다.

문체를 비롯해 취향까지.

동일한 작가가 쓴 것은 분명했다.

“어질어질하네.”

백작님에게 이런 비밀스러운 취향이 있다고?

그보다 이 책을 골라온 것은 디아나다.

그럼 시우의 예상과는 달리 디아나도 알 건 다 알고 있다는 얘기인데….

하지만 일전 호스트바에서 쌍둥이와 키스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디아나의 반응은 연기라고 여기긴 힘들었다.

그새 알게 된 걸까?

시우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시우 씨? 계시나요?”

백작이 들어왔다.

3.

예소드 백작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보더 타운의 슈리야를 만난 이후 데네브 제머나이 백작과 함께 오찬.

이후 에렐림 공작을 만나 학술회의 조직도 개편 논의.

현세 사업의 세부 사항을 조율해주는 대리인을 만나 보고를 받고 향후 업무 지시.

디아나와 함께 저녁식사.

여기까지 와서야 백작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 기대리고 기다리던 시우와의 개인 교습만이 남았다.

사실 오늘은 조금 ‘색다른 연구’가 예정되어 있었다.

“성교를 통한 마력 충전이라….”

어젯밤과 오늘 아침.

백작은 시우가 사정할 때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관측했다.

흡수당하는 마력과 동시에 몇 번이나 복제되어 돌아오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력.

그의 말에 따르면 질내사정을 하게 되면 발생하는 일이라고 한다.

마녀마다 저장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은 죄다 다르다.

위계와 무관히 낙인과 자성 마법의 체제에 따라 마력 수용량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대마녀 급이 되면 모든 마력을 소진하고 흡수하여 ‘자기화’하기까지는 짧게는 2주 길게는 한 달 이상도 걸린다.

마력수를 사용해 단축해도 일주일 이내로는 힘든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우의 사정을 통한 충전은 그런 ‘상식’을 가볍게 비트는 것이었다.

만약 백작의 마력이 텅 비어 있더라도 완전 충전되었을 것이다.

루시 예소드는 마녀다.

어젯밤까지는 그가 주는 쾌락에 정신 팔려 다소 소홀히 했지만, 그런 기현상은 충분히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따라서 오늘은 그와 과외가 끝나면 마력 충전 작용에 관해 탐구하기로 언약을 끝낸 것.

“어쩜….”

연구라지만 어쨌거나 본질은 섹스다.

오늘 밤 다시 그의 탄탄한 품에 안기면서 잔뜩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겠지.

연구를 빌미로 삼고 있기는 해도 이렇게 연달아 섹스를 요구하는 건 너무 밝히는 여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은 걱정은 있었다.

아직 과외 시간이 아닌데도 찾아가 애교를 부리는 것이 그의 눈에 어찌 비칠런지….

조금 부끄럽다.

“이건 연구니까….”

하지만 이건 연구를 위한 것!

예소드 백작은 대충 자기합리화를 끝낸 뒤 연구실 문을 열었다.

“시우 씨? 계시나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부산스러워진 시우의 모습이 보였다.

후다닥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너부러져 있던 것들이 거뭇한 리본에 휘감겨 사라진다.

“오, 오셨나요? 아직 시간이 이른데…. 일이 빨리 끝나셨나 봐요.”

게다가 어색하고 뻣뻣한 자세로 앉아 백작에게 억지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수상쩍다.

“어머나?”

백작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자 더욱 어색하게 변하는 그의 모습.

침대 위에만 올라가면 그렇게 거칠어지는데 이럴 때 보면 그냥 순둥이다.

그 갭이 백작을 더욱 달아오르게 하였지만.

“뭔가 숨긴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

“그럴… 리가요.”

씨익.

백작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서린다.

설마 백작을 떠올리며 자기 위로라도 하고 있던 걸까?

어쩌면 몰래 백작의 속옷 같은 것을 챙겨 왔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혼자 은밀한 일이라도 하고 계셨던 건 아닌가요?”

“그럴 리가요. 여기는 연구실이잖습니까.”

“그럼 뭘 숨겼는지 보여주실래요?”

“숨기다뇨….”

“다 봤는걸요? 제가 들어오자마자 리본으로 책상을 정리하는걸.”

백작은 또각또각 힐을 신고 시우가 앉은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책상 바로 아래 너부러진 책들.

종이의 질이나 제목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표지만 봐도 학술용으로 작성된 마법 서적은 아니었다.

“책이네요?”

“백작님, 다름이 아니라….”

백작의 시선이 책에 닿자마자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을 돌리려는 시우를 보며 백작은 미소를 지었다.

귀엽긴.

관능 소설이라도 읽고 있던 것일까?

“우리 시우 씨가 무슨 책을 그렇게 재미나게 보고 계셨을…?”

염동을 통해 책을 손에 잡은 백작.

“…까?”

제목을 보자마자 백작은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떨리는 눈동자로 나머지 책의 제목도 훑는다.

“……”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책상 아래 너부러진 책은 하나같이 예소드 백작이 직접 집필한 관능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 이걸 어떻게 시우 씨가?”

“…정말 이런 게 취향이신가요…?”

“아… 아니에요! 물론 제가 집필한 건 맞지만…! 창작 활동과 작가의 욕구는 분리되어있는걸요! 시우 씨! 감히! 저, 저, 루시 예소드를 모욕하려는 건가요?”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만….”

“아… 아아….”

백작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감쌌다.

어떤 경위로 저 작품들이 그의 손에 들어갔는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저 얼굴이 불타버릴 것만 같다.

일전에 썼던 소설 글귀 하나 장면 하나가 파라노마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혼자 자기 만족을 위해 썼던 부끄러운 취미를 시우가 다 보았다는 것 아닌가?

백작으로서의 품위.

연상녀로서의 위신.

그나마 지켜오던 체면이 와장창 조각나버리는 것이 느껴진다.

“…….”

디아나가 구해 준 책.

그것이 백작이 직접 집필한 소설일 줄이야.

시우는 조금 아연해졌다.

“저는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정말요.”

“…잠시만… 내버려 둬 주세요….”

시우는 백작의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그녀는 쪼그려 앉은 채 한참이나 부끄러움을 삼켜야 했다.

EP.389 #83_공동 비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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