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85화 (385/917)

#385

1.

쌓여있는 책의 탑 위에 손수건을 얹어 의자 삼은 디아나.

그녀는 다리를 까딱이며 꽤 예전 일을 끄집어냈다.

“예전에 왜 게으름 피우냐고 물었던 적 있죠?”

“아, 낚시 갔을 때 말씀이시군요.”

무릎을 끌어안으며 작게 끄덕이는 디아나.

이미 말하겠다고 결심한 것 같은데도 마치 콤플렉스를 보여주듯 주저한다.

“현상 유지 편향이 뭔지 알죠?”

왜 이렇게 게으름만 피우냐는 시우의 질문에 디아나가 궤변이랍시고 늘어놓았던 단어.

“그건 변화를 피하고 싶어하는 편향이에요. 내일도 오늘처럼, 내일 모래도 내일처럼 계속되었으면 하는 바람. 달라지는 건 싫어요. 제가 마녀가 되는 것도 싫어요. 그렇게 해서 엄마가 사라지는 것도….”

서점 밖 창가로 고개를 슬쩍 돌린 디아나.

“… 정말 싫어요.”

쉬었던 말을 마저 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잠겨있는 것이 보였다.

“엄마한테 부지런해진 딸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그냥 조금만 열심히 하면 돼요.”

“…….”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엄마는 없어지겠죠? 저는 혼자 남을 거에요.”

“…….”

“그러니까 이대로 영원히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마녀 사회에서 ‘계승’이란 자랑스러운 것이다.

계승이란 수백 혹은 수천 년까지도 전해 내려온 비전을 물려받을 수 있는 영광이다.

이미 성취가 막혔음에도 견습마녀에게 낙인을 물려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혹은 반대로 충분히 물려받을 자격이 됨에도 스승을 잃을까 그것을 회피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자격 미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해괴한 것을 바라보듯 볼 것 같은 그의 표정이 무섭다.

괜히 말을 꺼낸 것은 아닌가 하는 뒤늦은 후회가 찰랑인다.

“이상하죠?”

“조금요.”

“…꼴사납다는 건 알아요.”

역시나 예상대로.

맘 편히 이해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혼자서만 끌어안던 이 고민을 갑자기 그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아뇨, 그 부분이 아니라…. 디아나 아가씨는 예소드 가의 견습마녀시잖아요. 상당히 스테레오 타입의 마녀라는 인상이 있었거든요.”

디아나는 휙 시우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예상했던 이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표정도 없었다.

평소처럼 순한 얼굴로 한쪽 눈을 끔뻑이기나 할 뿐.

“이게…. 안 이상해요?”

“자식이 부모님 생각하는 게 어때서요. 저도 저희 부모님 만수무강하시길 바랐었는데요, 뭘.”

“왜요? 저는 견습마녀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담담한 반응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혹시 처세의 일환으로 무덤덤한 척하는 것은 아닐지, 디아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마녀는 뭐 사람 아닌가요?”

어깨를 으쓱한 그의 모습에 디아나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말 못했던 비밀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는데 어째서인지 남는 것은 달아오르는 두 뺨뿐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디아나의 은밀한 콤플렉스를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신시우에게 털어놓다니.

게다가 이해를 구하려 들고 이해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이렇게 기쁘다니.

사실 보더 타운에서 돌아온 날부터 이상했다.

악몽을 꾸려다가도 그의 뒷모습이 튀어나와 지켜주고.

누구보다 사랑할 엄마를 괜히 미워하게 되고.

약점을 잡는다는 것을 빌미로 기습 키스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돌이켜 보자면.

디아나 예소드는 꽤 오래 전부터 이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이기에 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쉽지는 않았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꾸며내야 하는 것처럼 거부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 역시 소중하니까.

말해야 했다.

“시우 씨가 엄마를 푹 빠지게 해준다면…. 어쩌면 엄마는 이 세상에 더 남아있을 거에요. 저에게 낙인을 물려주지 않고요.”

“이게 그렇게 이어지는군요….”

디아나는 손수 고른 책을 시우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이건 엄마가 좋아하는 책들이에요.”

“전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요.”

“일단 받아요.”

시우의 품에 차곡차곡 쌓이는 책들.

“이걸 읽고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서 대화하라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넓은 의미로 보면 그렇죠. 아마 당신도 좋아할걸요?”

디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시우도 감이 올 것 같았다.

하지만 냉큼 알았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첫째, 견습마녀는 반영체다.

마녀의 영체와는 달리 성장을 하며 인간에 비해 매우 느리지만, 노화도 진행된다.

즉, 만약 예소드 백작이 차일피일 계승을 미루더라도 그것이 현상유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디아나의 저 생각에 백작님이 동의할 거라는 생각도 쉬이 들지 않았다.

마녀의 망딸리떼는 강력하다.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쌍둥이조차 계승에는 아무런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00년이 넘게 정통파 마녀로서 살아온 백작이 디아나가 마녀가 되지 못한 채 죽는 것을 바랄까?

아니라고 본다.

둘째, 어쨌거나 이건 백작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 백작 역시 이 관계를 마음에 들어 하니 그녀를 꼬시는 거야 괜찮다 해도,

사랑도 무엇도 없는 상태에서 디아나의 부탁만 듣고 작업을 친다?

썩 내키지 않는다.

이 둘을 종합해보자면.

어찌 됐건 이 일이 모녀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간에 시우가 껴봐야 서로가 서로의 마음도 알지 못하고 헛돌 뿐이다.

“맨입으로 부탁할 생각은 없어요.”

디아나는 걸터앉던 책으로부터 깡총 떨어졌다.

“만약 엄마를 유혹하는 데 성공한다면….”

디아나의 촉촉이 젖은 눈이 시우를 향한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확실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풍겨오는 관능의 기운은 과연 모전자전이라 일컬어도 좋을까.

“그때는 정말…. 뒤로라도 하게… 아얏!”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하지만 훤히 드러난 디아나의 둥근 이마에 돌아온 것은 시우의 딱밤이었다.

제법 힘을 줬기 때문에 디아나의 고개가 틱 뒤로 밀린다.

“때…! 날 때렸어?!”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팔짝 뛰는 디아나.

살면서 손바닥 한번 안 맞아본 디아나에게 딱밤은 믿을 수 없는 체벌이었다.

“일단 돌아가실까요?”

“제 제안은요?”

“조금 진정하고 대화를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좀 격앙된 상태신 것 같습니다.”

“그, 그런…! 힘들게 말한 건데!”

“압니다, 압니다.”

하여간.

엄마를 유혹하는 대가로 몸을 주겠다는 딸이라니….

무슨 막장 야설도 아니고.

하지만 마냥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시우는 이미 디아나가 혼자 고민하다가 폭주하는 성향이라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저 내용도 곰곰이 생각하다 영 아니다 싶어 하겠지.

이마를 문지르는 디아나를 이끌고 책을 구매한 시우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2.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모처럼 활기를 되찾게 해준 신시우와의 뜨거운 밀회.

그건 백작의 입매를 평소보다 부드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포탈을 거쳐 보더 타운에 들어선 순간 백작의 표정이 뒤바뀐다.

위엄 넘치는 귀족의 모습을 비쳐야 하는 것이 둘째요, 첫 번째 이유는 지금은 느긋한 감상이나 품을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안개비가 내리는 보더 타운의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묵혀 두고 있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 올랐으니.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내려와 도토리나무가 무성한 구름버섯 빌리지로 향했다.

멀쩡한 인간이 호문쿨루스로 변이한 ‘칼잡이 잭의 반란’.

그 주제도 모르는 전직 사형수는 디아나를 공격했고 그 신병은 보더 타운 경비대를 거쳐 백작에게 인계되었다.

그리고 백작은 그것을 다시 한 마녀에게 넘겼다.

문자 그대로 마녀의 숲처럼 변한 빌리지 한쪽에 사고의 참사를 피한 마녀의 공방이 있다.

백작은 일말의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예소드 백작님. 오셨군요.”

“마음이 급해서요.”

그런 백작을 맞아주는 것은 강령술과 정신 마법에 정통한 18 위계의 마녀 슈리야 시탈라.

마음 같아서는 직접 잭이라는 작자를 심문하고 싶었지만, 중요할 일일수록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는 법이다.

슈리야는 이미 게헨나 내부의 여러 범죄를 해결한 적이 있으니 더욱 신뢰할 만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어수선한 공방을 거쳐 지하실로 난 계단을 내려간다.

슈리야에게는 실례되는 말이겠지만 굉장히 음침하고 스산해 보였다.

철문을 열자 구속 의자에 앉아있는 한 백인 남성이 보인다.

근육이 전부 쪼그라든 것처럼 흐물거리는 사지.

자해를 막기 위해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고 안구는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백작이 들어왔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식물인간처럼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으니까.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지만 고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했어도 문제 삼진 않았을 테지만요.”

백작은 의자 주위를 빙빙 돌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심문을 시작하자마자 뇌가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뇌피질부터 변연계까지 15초도 걸리지 않았고, 이후 즉각 근육과 관절이 녹아내리더군요.”

“흐음….”

인간이 호문쿨루스가 되는 일은 아예 없는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호문쿨루스가 존재했고,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차원의 틈새에서 잠든 호문쿨루스도 존재한다.

그 중에는 인간의 몸을 차지하는 호문쿨루스도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호문쿨루스의 운동량을 버티지 못한다.

그들의 명운은 호문쿨루스가 신체의 잠재력을 끌어올릴 때까지다.

숙주의 신체가 한계에 달했음을 깨달은 호문쿨루스가 빠져나가게 된다면 운이 좋아야 폐인, 보통은 목숨을 잃는다.

따라서 잭이 이 몰골이 되었어도 어색할 것은 없다.

“말 한마디도 못 해봤다…. 이상하네요. 금제(禁制)의 가능성은?”

“더 자세히 확인해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갈라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심증은 뚜렷하지요.”

“확률은?”

“9할 이상입니다.”

하지만 심문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잭은 의식이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

심문이 시작되자마자 상태가 급속히 악화하였다는 것, 그것도 15초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극히 부자연스럽다.

즉, 이번 습격은 의도적인 마녀의 개입이 끼어있을 가능성이 크다.

“단서를 더 모을 수 있을까요?”

“현재 밀수꾼들의 적하목록과 사건 전후로 목격자를 훑어보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케테르 공작.

수상쩍은 공적들의 움직임에 술렁이는 현세.

최근 1년 사이 두 번이나 벌어진 게헨나 침입.

사실 이번 사건 자체는 가벼이 넘겨도 될지 모르는 사안이지만 예소드는 일련의 흐름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사업가로서의 직감이었다.

“이것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슈리야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잭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나요?”

“그럼 분부하신 대로,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채증을 위해 사용토록 하겠습니다.”

“어머나?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백작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 나섰다.

자칫 디아나를 죽일 뻔한 범죄자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EP.388 #83_공동 비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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