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84화 (384/917)

#384

1.

제머나이 백작가의 객실이 그렇듯 디아나의 방은 말이 ‘방’이지 사실상 거실 두 개, 응접실 하나, 욕실 하나, 침실 하나에 프론트 가든까지 딸린 어마어마한 넓이를 자랑했다.

그리 넓은 만큼 어지간한 물품이 그녀의 방 내부에 갖춰져 있었다.

꽤 본격적으로 보이는 3단 구급상자가 선반에 놓여있었기에 그것을 꺼내왔다.

약점을 잡는다는 둥 큰소리를 치며 키스도 아니고 뽀뽀를 감행한 디아나.

그녀는 시우의 앞에서 도망치다 그림처럼 멋지게 미끄러졌고 발목이 퉁퉁 붓고 말았다.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디아나를 들어 올린 시우는 항상 위치보드를 두곤 하던 소파에 그녀를 눕혔다.

“괜찮으세요?”

“…….”

지레짐작으로 범행 자백 + 별안간 약점을 잡는다며 기습 뽀뽀 + 이후 도주하다 추하게 철퍼덕 풀콤보가 상당히 쪽팔렸던 것인지 아까부터 등받이 쿠션을 끌어안고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소파 팔걸이에 디아나의 다리를 올려놓고 양해를 구한 뒤 치마를 걷었다.

“어이구….”

퉁퉁 부어 빨갛게 변한 발목.

골절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이건 꽤 아프겠다.

반영체가 이 정도가 되려면 도대체 어떻게 다리가 꼬여야 하는 걸까.

디아나가 철푸덕 엎어질 때 들렸던 소리가 유달리 크긴 했지.

“아프시면 말해주세요.”

스승님과 수련을 하면 어디 한 군데 삐끗하는 건 늘상 있는 일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마법적 처치법도 얼추 알고 있었다.

시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조심스레 감쌌다.

영체란 생각보다 조율이 어렵지 않다.

특히 주요 장기로부터 멀고 신체 말단에 가깝다면 시우 정도의 마력 조정으로도 컨트롤이 가능한 것이다.

“피어라.”

시우는 마력을 뽑아내어 디아나의 발목을 감쌌다.

붓기를 가라앉히고 놀란 근육을 진정시켜 줄 요량이다.

작업이 까다롭지는 않은데 시간이 조금 걸린다.

그나저나 발이 정말 예쁘다.

엄청 하얗고 깨끗해 보인다.

손바닥만큼이나 작으면서도 가느다랗게 뻗은 발가락에서 늘씬한 유전자의 편린을 찾을 수 있었다.

시우가 마력을 주입하기 위해 조금 단단히 잡자 아픔을 참는 듯 꼼지락거리는 발가락.

“왜 그러셨어요. 굳이 안 그래도 괜찮았는데요.”

“…….”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디아나는 여전히 쿠션으로 얼굴을 푹 가린 채로 웅얼거렸다.

“엄마가 안전한 협상을 위해서는 상대보다 많은 약점을 손에 쥐라고 하셨어요….”

“그, 그러셨군요.”

실로 마키아벨리즘적인 이유였다.

그렇다고 고른 선택지가 뽀뽀라는 것은 꽤 기묘한 이야기지만.

그러고 보니 일전 보더타운 때도 알 수 없는 이유로 혼자 뛰쳐나갔고….

가끔 종잡을 수 없는 아가씨다.

“…시우 씨.”

펄쩍펄쩍 날뛰던 모습이 인상 깊어서 그렇지 평소 디아나의 모습은 어엿한 귀족 영애다.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바뀐 호칭, 어머니를 따라 하는 듯한 그 호칭이 썩 낯설지 않았다.

“네.”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좋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조금,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어요.”

“…네, 뭐.”

아예 베개를 가면 삼아 대화를 이어가는 디아나.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한참을 머뭇거리던 디아나는 앙증맞은 발가락 사이를 벌렸다 오므렸다 하며 물었다.

“엄마랑은 얼마나 됐어요?”

“…중요한 질문…이겠죠?”

“네, 몹시요.”

막상 대답하기에는 중간이 없는 질문이고, 굉장히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입 다물고 있기도 뭐하다.

“하루 됐습니다.”

“거짓말, 다들 저한테 거짓말만 해요.”

“거짓말이 아니에요. 어제가 처음입니다.”

“…정말요?”

디아나의 얼굴을 가리던 쿠션이 슬그머니 내려간다.

진위를 판별하려는 곧은 두 눈이 시우에게 향했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더라도 모녀는 모녀인가 보다.

눈썹에 힘이 들어간 모양새가 예소드 백작의 것과 쏙 빼닮았다.

“우리 엄마… 마음에 드나요?”

“…….”

터프한 질문.

답변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입에 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엄마도 시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죠?”

“…황송하게도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답이 끝나자 다시 쏙 하고 쿠션이 디아나의 얼굴을 가린다.

때마침 치료도 끝났다.

“됐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따지고 따지고 따지다보면 제 책임도 있는 걸요.”

마법적 의미의 부상이 아니라면 외상 정도야 쉽게 낫는 것이 영체의 편리함이다.

붓기는 전부 가라앉았고 발목을 유연하게 돌려본 디아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 씨.”

치맛자락이 뒤집히지 않게 조신하게 몸을 일으켜 옆에 앉은 디아나는 어째서인지 굉장히 침착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는 잔뜩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저희 엄마를 완전히…. 유혹할 수 있어요? 푹 빠지게.”

“네?”

잘못 들었나?

“제대로 들었어요. 엄마를 유혹해 달라는 말했어요.”

“아닙니다. 잘못 들은 거 맞는 것 같아요.”

대뜸 엄마를 유혹해 달라니.

방금 전까지는 풋풋한 러브코미디 전개였는데 갑자기 막장 드라마로 드리프트가 되었다.

작게 중얼거린 디아나는 시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제 의사를 굳혔다.

“해주세요.”

2.

오늘의 디아나의 메인 코디는 세이블 롱코트였다.

으레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들이 걸치곤 하는 털이 복슬복슬한 갈색 코트가 세이블 코트이다.

그마저도 순수 세이블로 만들면 너무 비싸져 밍크나 캐시미어를 잔뜩 섞고 말이다.

게다가 디아나의 코트는 흑담비의 모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첫눈처럼 새하얗다.

물어보니 알비노 개체의 가죽을 벗겨 만들었다고 한다.

얼마나 비쌀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아무튼 분수에 맞지 않은 사람이 입었다가는 순식간에 졸부로 보일만 한 코디.

디아나는 그런 복장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해내며 타로 타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어머니를 유혹해 달라는 디아나의 생뚱맞은 제안.

그게 도대체 무슨 물음에 제대로 답도 받지 못하고 광장시장으로 나오게 되었다.

계절이 계절이고 간밤에 비까지 내린 덕에 쌀쌀해진 거리.

가도의 홈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은 겹겹이 얼음 장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광장 시장은 여느 때의 활기를 보여주고 있다.

“올겨울 내내 땔 수 있는 잘 마른 땔감이 한 짐에 10페니! 지금 사시면 부싯돌도 드립니다!”

“흰 얼굴을 더 하얗게 만들어주는 장미물이에요! 사모님들 들여가세요!”

“사람들! 여기 보시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오리입니다!”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호객 행위.

가도 좌우로 늘어선 천막 앞까지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잡상인 탓에 발 디딜 곳도 부족했고 굉장히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양산을 쓴 디아나와 양복을 갖춘 시우가 나아가면 거짓말처럼 길이 트였다.

알비노니 담비 코트니 잘 모르는 시민들이 보기에도 디아나의 옷은 비싸보였겠지.

흙탕물이라도 튀긴다면 족히 삼대는 세탁비를 마련하기 위해 인생을 저당 잡혀야 할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왜 여기까지 오셨나요?”

“일단 따라오세요.”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 꽤 재미난 것이 있었지만 가장 시우를 놀랍게 하는 것은 이 외출을 제안한 사람이 디아나였다는 것이다.

거미줄처럼 빽빽한 골목을 따라가자 으슥한 건물들이 나왔다.

디아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3층짜리 건물을 골라잡고 들어섰다.

“오, 책방이네요.”

“한번 와 보려고 눈여겨 뒀어요.”

게헨나 시민들은 꽤 중세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평균 생활 수준을 고려하면 실제 그 당시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마법을 통한 수도관 보급으로 위생 수준이 높고, 영아 사망률도 1%대에 불과하며, 범죄율도 현저히 낮다.

마녀의 편의를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인 만큼 어지간한 제 3세계보다 안락한 환경을 보장받는 것이다.

저렇게 사람이 바글거리는 시장에 거지 한 명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아무튼 기초 교육 또한 원활히 이루어졌기에 책을 취미 삼아 읽는 시민들도 꽤 존재했다.

이 책방은 그런 시민들을 위한 책방이다.

입구부터 제대로 진열되지도 않은 채 탑을 이룬 책더미를 비롯, 건물 전체에 들어선 책꽂이에는 묵은 종이 냄새가 전해졌다.

어둑한 실내를 어스름이 비추는 램프 등의 불빛에 유유히 떠도는 먼지 입자들이 보였다.

시우도 일찍이 존재를 알고 있던 책방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용해 본 적은 없었다.

노예 시절엔 소설을 읽을 시간도 없었고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또 드문드문 숨어 있는 마법책을 뒤적이자기엔 이미 시우의 근무처가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마법 도서관이였다.

구태여 발길을 들일 필요가 없던 것이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신 건가요?”

“기다려요.”

디아나는 대답도 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책방 주인을 지나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왕 여기까지 왔겠다.

시우도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며 시간을 보냈다.

별의별 책이 다 있다.

기초적인 약초지식에 관한 책.

종이가 아까웠던 것인지 조잡한 손글씨로 빼곡히 쓰인 음식 레시피.

심지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일기도 있었다.

“흐음….”

적어도 만권은 족히 넘을 것 같은 책더미 사이에서 디아나는 코트에 먼지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책을 골랐다.

벌써 몇 권 정도는 옆구리에 끼고 있다.

“음?”

시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달리 커다랗고 먼지가 듬뿍 쌓인 책.

책장 뒤로 거의 넘어가 있어 그대로 방치된 듯했다.

낡고 해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글씨, 먼지를 손으로 쓱 닦고 보자 제목이 보였다.

[공적 기록서]

“오.”

띠지처럼 책을 묶고 있던 가죽끈을 풀고 책을 펼치자 생각보다 멀끔한 책장이 보였다.

제목 그대로 갖은 공적들에 관해 기록한 책이었다.

그들의 행적과 주요 사건, 위계, 심지어 사용 자성 마법이나 예장 일부까지.

위치포인트의 DB처럼 나름 공적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책인 모양이다.

“…….”

벌써 살면서 물병자리의 마녀, 비겁의 마녀 두 명과 얽혔다.

앞으로도 원치 않게 만나는 일이 많을 것이다.

RPG게임도 보스 패턴을 알고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이런 책이라도 들춰보다 보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아마 큰 도움은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시우가 쓸만한 책 한 권을 찾았을 때.

디아나는 거의 10권의 책을 한가득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뭐가 많네요?”

디아나는 빤히 시우를 바라보았다.

이 말을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는 모습.

몇 번이나 입술을 꾹꾹 깨물던 디아나가 입술을 달싹인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것도…. 둘만의 비밀이에요. 알았죠?”

EP.387 #83_공동 비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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