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1.
언제부터 있던 걸까.
나무늘보처럼 힘겹게 난간을 넘어 도망간 디아나를 쫓아가 해명 또는 설명 또는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인사불성이 된 백작을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아….”
쪽팔리긴 해도 의외로 몇 번 있던 일이다.
그 뒤로 딱히 별일 없었고 말이다.
그냥 이런 운명인가 보지.
시우는 한숨을 쉬고 뒷정리를 위해 방을 돌아다녔다.
이 층은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모든 방이 다 침실이었다.
그러니까 복도가 따로 없이 계단 앞의 메인 홀만 지나면 각기 다른 침실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구조라는 의미다.
침실마다 인테리어의 디자인과 침대의 모양이 달랐기 때문에 조금 감탄했다.
그중 사이사이에 있는 욕실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수건을 적셔 백작의 몸을 정성껏 닦아 주었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백작의 몸.
좀 진정됐다고 생각했는데 닦아주는 것만으로 발기를 참기 힘들다.
진짜 아름다운 몸의 엉덩이를 때려가며 아기씨를 퍼부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흠…흐음….”
가랑이 사이에서 흐르는 애액에 희석된 정액까지 깨끗하게 닦아주고 침실도 옮겼다.
백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예쁜 자홍빛 눈동자를 내비쳤다.
“어머, 시우 씨….?”
“깨어나셨네요.”
눈을 끔뻑이더니 알몸으로 그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깨닫고 황급하게 이불로 몸을 가리는 백작.
“제가 어, 언제부터…. 아….”
그리고 밤새 있던 일을 떠올린 것인지 얼굴이 홍시처럼 익어간다.
시우도 괜히 멋쩍어 이불로 하반신을 가렸다.
생각해보니 백작을 돌보는데 정신 팔려 아직 팬티밖에 입지 않고 있던 것이다.
“…….”
“…….”
이불을 껴안은 채 쑥스러워하는 백작과 마찬가지로 어색하게 수건을 쥐는 시우.
광기의 밤은 햇볕에 자취를 감추고 남은 건 어색한 남녀 뿐이다.
데구르르 구른 백작의 눈이 시우의 손에 든 수건을 향한다.
“시우 씨가… 닦아주셨나요?”
“그렇습니다.”
디아나가 엿보았던 것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전긍긍하며 굳어있던 것뿐인데…
그런 모습이 백작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해석된 모양이다.
머뭇머뭇거리던 예소드 백작은 살며시 이불을 껴안았던 팔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무척이나 안심한 듯한 모습이었다.
“날이 밝을 때 시우 씨와 밤의 시우 씨는 아주 다른 사람이네요.”
요염하게 눈을 흘기는 백작.
시우는 헛기침했다.
분위기를 너무 타버린 나머지 온갖 변태 짓을 다 했으니 뒤늦게 들어온 지적이 남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잡아먹히는 줄 알았지 뭐예요? 엉덩이는 또 얼마나 아프다고요.”
아하.
시우는 평상시의 모습대로 그를 놀려대려는 백작의 모습이 의태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촉촉하게 물든 그녀의 시선이 이리저리 시우와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두 뺨에 돋은 홍조는 어떻고.
어제 일이 떠오르고 너무나도 부끄러운 나머지 도리어 시우를 놀리려는 것이다.
실로 알기 쉬운 위장이었다.
“어디 한 번 볼까요?”
“꺄…!”
시우가 짐짓 이불을 들치는 시늉을 하자 비명 지르며 몸을 움츠리는 백작.
백작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시우의 표정을 뒤늦게 발견하고 발끈했다.
“시우 씨! 장난치지 말아요! 저 화낼 거에요!”
백작님.
귀엽다.
“백작님이야말로 보기보다 훨씬 귀여우시네요.”
“귀여우시다? 하…! 시우 씨, 저를 편하게 대하는 건 좋지만 저는 이래 봬도 게헨나의 백작이에요. 최소한의 예우와 규범은 지켜주시길 바랄게요.”
근엄하게 미간을 모으며 선언하는 백작.
“혹시 정말 화가 나신 건 아니죠…?”
“화났어요. 몹시요. 얼마나 아팠는데요.”
“좋아하셨잖아요. 그냥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러우신 건… 끄악!”
“하여간 진짜….”
백작이 냅다 허벅지 안쪽을 꼬집었기에 시우는 비명을 질렀다.
진짜 조금의 자비도 없이 멍이 들 정도로 꼬집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우를 보며 만연의 웃음을 짓던 백작이 지시했다.
“시우 씨, 옷을 입어야 하니 잠시 뒤 돌아 줄래요?”
-사라락!
이불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고 저절로 근처 옷장 문이 열리더니 속옷과 옷가지가 날아든다.
이젠 괜찮다는 사인을 듣고 뒤돌아봤을 땐 어느덧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은 백작님이 다리를 꼬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 전과 같은 격식있으면서도 섹시한 복장이지만 감상은 전혀 다르다.
그 아래 알몸을 속속들이 아는 시우로서는 도리어 어설프게 그녀의 몸을 가리는 옷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아침 식사라도 하고 가실래요?”
“그래도 괜찮나요?”
“그럼요. 저희 가문에 손님이신걸요.”
시시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머리를 빗어 올린 백작은 가벼운 화장까지 끝냈다.
옷만 입고 머리만 대충 올리고 입술에만 뭘 발랐을 뿐인데 순식간에 평소 백작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마치 마음까지도 깔끔하게 정리해 버린 모양새다.
“부탁드려요.”
“영광입니다.”
손등이 보이도록 살포시 손을 내미는 백작.
에스코트해달라는 의미인 것 같다.
시우는 그녀의 긴 손가락을 얹듯이 잡고 함께 식당으로 걸었다.
일전에 디아나와 함께 셋이서 식사를 한 적이 있으므로 길은 알고 있다.
별말 없이 복도를 함께 걸으며 힐끗 곁눈질로 백작을 살폈다.
뜨거운 밤과도, 오늘 이른 아침과도 완연히 다른 성숙한 모습과 분위기.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해야 하나?
하룻밤의 기억은 그날 묻는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하다.
서로 좀 겸연쩍을 줄 알았던 시우로서는 그녀의 태연한 태도가 신기할 정도였다.
“…….”
그때 마찬가지로 힐끗 곁눈질하던 백작과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라 헛기침하는 시우.
“크흠….”
마찬가지로 눈을 재빨리 피하며 목청을 가다듬는 백작.
“흠흠….”
아니구나.
백작이 워낙 태연하게 행동해서 정말 깔끔하게 씻어내렸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보통 그녀는 시우에게 이런저런 잡담을 걸며 놀려대기 바빴지.
즉, 일전의 기묘한 침묵 자체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시우 씨, 숙녀의 옆모습을 힐끗거리는 건 예의에 어긋난답니다.”
“백작님도 절 보시지 않았던가요?”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는걸요? 뭘 그렇게 빤히 보나 궁금해서 봤을 뿐이죠.”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어제랑은 너무 다르셔서. 악! 자꾸 꼬집지 마세요!”
“지금부터 어제 얘기는 금지에요. 아시겠어요?”
“넵….”
옆구리를 힘껏 비틀어 꼬집는 백작.
이것도 신체접촉의 일종이라면 조금은 거리감이 줄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침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복도.
회랑과 복도가 이어지는 그늘 아래 들어섰을 때.
백작은 별안간 우뚝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신가요?”
“시우 씨.”
몸을 돌려 시우와 마주 본 백작은 빨갛게 빛나는 도톰한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조금 바빠요. 시우 씨 과외 시간이야 당연히 남겨뒀지만요.”
“네.”
“사실, 아침 식사할 시간도 잘 없단 말이죠.”
“그러시군요.”
먼저 밥을 먹자고 한 사람 입에서 나오기엔 뜬금없는 주제다.
“아시죠? 영체는 식사를 통한 영양 보급이 딱히 필요 없답니다. 아침 식사라는 행위 자체도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하루의 루틴을 설정하는…. 어찌 보면 주술적인 행위죠. 저녁 식사나 수면도 마찬가지고요.”
“그렇죠?”
점점 오리무중으로 흘러가는 대화.
복도 한쪽에서 멀거니 서서 할 정도로 중요한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니까 꼭 식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아.
감이 온다.
“제가 업무를 보러 가기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는데…. 그 안에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슬며시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눈치를 보듯 말하는 백작.
그 전의 의태는 간데없다.
전보다 더욱 농염해진 것 같은 체취를 물씬 풍기는 마망이 서 있을 뿐.
디아나와 눈이 마주친 것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그 사실을 백작에게 전달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체취를 듬뿍 마신 것도 아닌데.
여기서 또 넘어가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그냥 발정 난 개다.
부드럽게 뻗은 손이 시우의 가슴에 닿는다.
그렇게 벽으로 시우를 밀친 백작은 까치발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시우 씨, 저 침실에 놓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입술이 달싹거릴 때마다 귓불을 간질이는 숨결.
“같이 찾아 주실래요?”
“백작님, 저는 발정 난 개입니다.”
“어머나?”
시우는 백작을 들쳐메고 침실로 달렸다.
2.
“어쩌죠… 어쩌죠…. 어쩌면 좋죠….”
제 방 침실로 돌아온 디아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오후가 다가올 때까지 염불처럼 ‘어쩌죠’를 반복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큰일이다.
디아나 예소드의 견습마녀 인생 중 가장 거대한 난관이다.
하필이면 거기서 그에게 딱 걸려버리다니.
물론 첫 수음을 성공리에 끝낸 이후이기 때문에 그 장면 자체가 들킨 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농담이 아니라 그냥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머니와 밀회를 보낸 장면을 훔쳐보고 있던 모습이 들켰다는 것.
그것도 테라스를 넘어가 각 잡고 구경하다가 걸렸다는 것.
이게 가장 큰 문제이다.
신시우를 멋대로 독점하려 드는 어머니에게 잠깐 느꼈던 짜증과 분노도 희석된 지 오래였다.
원래 사람의 감정이란 게 당면한 에피소드 중 가장 주요한 사건에서 기인하기 마련이다.
질투심 비스름한 감정은 밀회 장면을 엿보는 순간 강렬한 배덕감과 아찔한 성적 호기심으로 이어졌고.
신시우와 눈이 마주친 뒤에는 당혹과 이 상황을 어떻게든 무마해야 한다는 황망함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구 떠오르는 회상들.
신시우의 근육으로 다부졌던 알몸과 엄마의 교성, 추태.
그리고 가랑이 사이를 창처럼 찌르던 남성기의 그림자, 생전 처음으로 느꼈던 오르가즘.
뇌를 포화상태에 이르게 하는 화학 및 전기적 작용에 디아나는 술에 취한 듯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한 50명 정도 되는 작은 디아나가 머릿속에서 일제히 떠들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잠깐 눈 깜빡할 사이 드는 생각을 의식의 흐름으로 나열하자면….
어머니가 알게 되면 안 되는데요. 완전 커다란 남근. 저렇게 마구잡이로 넣어도 되는 거 맞나요? 엄마가 그렇게나 좋아하시다니…. 믿기지 않아요….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설마 엄마가 이미 눈치챈 건 아니겠죠? 하필이면 그때 딱 들켜버려서… 망했어요…. 무슨 얼굴로 그의 얼굴을 보라고…. 가볍게 문질렀을 뿐인데 그렇게 기분이 좋다니…. 견습마녀는 당연히 남자를 멀리해야 해요! 만약 이걸로 빌미를 잡는다면 어쩌지…. 엄마에게는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데….
쑥덕쑥떡.
이러쿵저러쿵.
끝 없는 뇌내 회의에 눈이 핑핑 돌던 디아나.
그 혼란을 칼로 싹뚝 베어버리듯 차가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디아나 아가씨, 신시우입니다.”
EP.385 #83_공동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