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78화 (378/917)

#378

1.

수업 정상 진행합니다. 붉은가지를 지참해 12시까지 개인 서고로 방문해주세요.

타카쇼도 하이엔드 급 주류 반입 계약을 위해 현세로 나가버린 가운데 달리 상담할 곳도 없이 혼자서 속앓이만 하던 시우.

백작에게서 온 짧은 편지를 요약하자면 위와 같은 내용이었다.

복잡하게 꼬인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던 시우에게는 동아줄이나 다름 없었다.

“다행이네….”

의외로 지난 밤의 일에 대해서 추궁하는 기색은 없다.

또한 오늘부로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같은 해고 통지도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이리저리 잘 풀렸다고 해도 되는 것이 아닐지.

이번 일로 함부로 고추를 휘두르지 말자라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백작을 만나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머리를 박고 사죄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으로도 천만다행이지.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시우는 노크 이후 백작의 개인 서고로 들어갔다.

“오랜만이네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창가.

빗방울이 부서지라 유리창을 두드리는 가운데 예소드 백작이 서 있었다.

“…….”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가 옷을 전부 벗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가슴의 촉감과 달콤한 입술을 촉감.

그리고 보기보다 방어력이 훨씬 낮았던 아래 입까지.

분명 엄한 생각 말고 잘 처리만 하자고 생각했건만 드레스를 걸친 그녀를 보자마자 음흉한 생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떨친다.

“시우 씨, 말도 없이 다녀와서 미안해요.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서요.”

“아닙니다, 공사다망하신 분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점잖은 미소를 지어 보인 백작은 시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대충이나마 의중을 읽자면 예소드 백작님은 전에 있던 일을 아예 없던 것으로 묻으려는 것은 아닐까?

지나치게 평소와 같은 태도가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사과하려면 지난번 일을 입에 담아야 하는데….

만약 백작이 원하는 것이 침묵이라면 구태여 과거 일을 들먹이는 것은 그녀의 해결방식을 무시하는 처사가 된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입 꾹 다물고 소파에 앉자 백작은 맞은 편에 앉아 수업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어디까지 했었죠?”

“붉은가지의 차폐율을 수치화하는 부분입니다.”

“아, 그랬죠? 그간 진전이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어머나, 역시 시우 씨 답네요.”

지나치게 평소 같은 대화와 수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몸매를 과시하는 옷차림을 선호하던 백작이 두꺼운 재질의 옷으로 몸을 꽁꽁 감싸고 있다는 것.

은근히 야릇한 장난을 치며 시우를 놀리지 않는다는 것.

절대로 옆에 오지 않고 맞은 편에서 종이를 주고받으며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 정도.

하지만 위액이 과다분비될 것 같은 불편함도 잠시.

흐지부지 지난 사건이 넘어간 듯하여지자 시우도 마음 놓고 그녀의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간 막혀 있던 문제도 많고, 질문할 점도 차곡차곡 정리해왔기에 평소보다 알찬 4시간짜리 수업이 끝났다.

“고생이 많았어요. 시우 씨, 내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출근하시면 됩니다.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네, 알겠습니다.”

꼭 입 밖으로 꺼내야 약속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들추지 않는다.

라는 것이 강의동안 정해진 두 사람 간의 암묵적 합의인 셈.

아주 조오금 아쉬운 감이 있는 걸 보면 스스로도 아직 제대로 정신 못 차렸구나 싶었다.

그때.

아주 불길한 이변이 일었다.

별안간 살랑살랑 불어오는 향기.

언제나 백작에게서 느껴지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크림 향이 넘실넘실 전해져 온 것이다.

시우가 간과하던 것이 있었다.

일전 시우는 마녀 영체 특유의 페르몬이 담긴 백작의 체취를 듬뿍 들이마셨다.

그것도 단순히 정수리에서 나오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랫도리에서 묻어나오는 진하디 진한 엑기스를 체내로 들이고 만 것이다.

이후로 그녀와 몸을 제대로 섞지도 못하고 끝나버렸던 관계.

시우의 몸은 아직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굶주린 짐승이 피 냄새를 맡은 것처럼.

평소보다 아주 미약한 체취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우는 불끈 솟은 하반신을 느꼈다.

그리고 멀어지는 이성.

“백작님.”

시우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예소드 백작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성은 분위기를 읽는 것에 능하다.

백작은 그의 말투나 분위기가 갑자기 뒤바뀌었음을 깨달았다.

“네, 시우 씨.”

“이 부분이 부족한 것 같은데. 이것만 알려주실 수 있나요?”

“이… 부분이요?”

“네.”

속앓이를 한 것은 시우뿐만이 아니었다.

백작 역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를 맞이했다.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도 낯 뜨거운 상대를 단둘이 독대하게 되었으니 어찌 마음이 편할쏘냐.

하지만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우 역시 불편한 흑역사를 들추지 않았다.

술 취했던 남녀가 속도위반을 해버리고 다음 날 어색하게 해장국을 먹는 느낌처럼 두 사람의 침묵 가운데 사태는 잘 마무리되는 듯했다.

백작이 느낀 감정은 안도였으며, 또한 잔물결처럼 남는 아쉬움이었다.

오늘 단둘이 수업을 진행할 때 어쩌면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 혹은 ‘실수’.

그것이 일어나질 않길 빌었으면서 또 내심 바라왔던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황망해졌다.

말이 되나?

그렇게 쪽팔린 일을 겪고도 제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우의 부름에.

수업 때와는 명백히 다른 톤과 어조에 백작은 마른침을 삼키고 지면을 보았다.

“이 계산식을 말씀하시는 거면… 어떤 부분이 잘 모르겠다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그가 손끝으로 툭툭 두들기는 부분을 훑어봤지만 아무리 봐도 질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한참 전에 시우 나름대로 정립이 끝난.

즉, 굳이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아….”

“저는 조금 더 디테일하게 짜보고 싶어서요. 옆에 가도 괜찮을까요?”

허락도 받지 않고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자마자 보였다.

이미 모양도, 온도도, 단단함도 알고 있는 그의 물건이 터질 듯이 부풀어 24인용 텐트를 치고 있는 것이.

백작은 머리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차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가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착석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시, 시우 씨….”

“네?”

게다가 백작이 시우를 골리기 위해 앉았을 때처럼 허벅지가 맞닿는 가까운 거리.

백작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린다.

설마 그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분명 백작으로서는 은유적으로나마 의사를 밝혔는데 말이다.

“왜 그러시나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 시우.

그의 팔이 태연하게 백작의 허리를 감싼다.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애초에 이런 행동이 당연시되는 연인 사이 같았다.

“시, 시우 씨?”

백작은 어찌해야 하나 망설이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백작은 무서웠다.

오랫동안 몸에 배어 온 예절도 예의도 교양도.

그의 손에 잡히면 모두 헛것이 된다.

발정 난 암컷처럼 헐떡이며 온갖 추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다.

원치 않는 채식만 하다 고기 한 점을 맛보게 된 그녀의 머릿속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 한 점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백작의 숨은 욕망을 시우가 캐치하고 있다는 것도.

그 증거로 뱀처럼 기어 온 그의 손이 백작의 엉덩이를 손으로 쓰다듬는다.

허락받지 않은 명백한 성희롱.

백작 역시 거기에 역정을 내기는커녕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을 뿐이다.

아녀자의 몸을 함부로 더듬다니.

아무리 성실한 피고용인이자 은인이라도 허락해 줄 행위가 아니었다.

평소의 백작이었더라면, 그가 다른 남자였더라면 역정을 내며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감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같은 호통을 치며 말이다.

“사실 조금 아쉬웠습니다. 저번에 백작님께서 말씀 주셨던 수업, 제대로 끝내지 못했잖아요.”

태연하게 그녀의 엉덩이를 주물럭거리며 귓가에 속삭이는 남자.

이전 백작이 시우에게 장난을 칠 때와는 전혀 반대인, 그림 같은 공수역전이었다.

“백작님의 몸에 관해 공부하기로 했었죠?”

“시우 씨, 그때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그리 가벼이 입에 담을 말은…. 읏…!”

“너무 섭섭하네요. 저번에 도망치셨던 이후 다시 부르시기에 마음의 준비를 끝내셨다 여겼는데요.”

아플 정도로 꽉 쥐어지는 엉덩이.

마치 꾸짖는 것 같은 행동에 백작은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며 엄숙하게 말했다.

“…무례하네요. 저 루시 예소드를 헤픈 여자로 보시는 건가요? 아무 때나 몸을 주무를 수 있는 술집 여급이라고?”

“설마요, 백작님을 보며 무례한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냉랭하게 말하는 중에도 느낄 수 있었다.

백작 자신의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불안함에 그에 못지않은 기대감에.

“그저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고 있을 뿐이죠.”

“시우 씨 웁…!”

어찌 됐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려던 백작의 입술이 가볍게 막힌다.

뿌리치려던 손목을 도리어 움켜쥔 시우가 키스해 온 것이다.

입술에 포개지는 다소 얇고 거친 입술.

백작은 저도 모르게 얌전히 혀를 내빼어 그의 것을 받아들였다.

키스와 키스와 키스.

입 안에 퍼지는 황홀하고 무서웠던 그날 밤의 기억.

걸치고 있던 옷이 한 자락씩 벗겨진다.

아니, 벗긴다는 느낌보다는 찢는다는 느낌에 가깝다.

더욱 우스운 것은 정작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례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떨쳐낼 수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의 앞에 발가벗겨졌다.

그의 앞에서 제 손으로 옷을 벗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심.

백작의 도자기 같은 피부 위로는 불긋한 홍조가 돋았다.

“오늘 수업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시우의 손이 와락 백작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두 사람의 몸이 새로 장만한 소파 위에 포개졌다.

이 공간에 잡아먹고 싶은 수컷과 잡아 먹히고 싶은 암컷만이 존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EP.381 #82_미망의 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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