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1.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좆됐군.”
시우는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했다.
백작이 나간 뒤 처음엔 그저 어이가 없었다.
누가 먼저 유혹했는데 도중에 줄행랑을 쳐버리다니.
체취는 들이마실 대로 마시어 버렸는데 막상 핸드잡으로 찍 싼 게 끝이니 너무 감질났다.
그렇게 멀뚱히 백작의 개인 서고에 서 있다 옷을 걸쳐 입고 나왔을 무렵에는 성욕이 좀 가라앉으며 냉철한 사고가 돌아왔다.
“내가 왜 그랬지?”
예소드 백작이 먼저 ‘은혜 갚기’를 들먹이며 유혹한 것은 사실이다.
알몸으로 비비적거리는 거 오케이.
입으로 봉사 받는 것도 오케이.
섹스도 뭐, 그 정도 갔으면 남녀 사이에 한판 뛸 수 있으니 오케이.
근데 백작을 묶어 놓고 싼다아앗! 같은 말을 하게 하고 실제로 애액을 철퍽철퍽 튀어가며 그녀의 꼴사나운 자태를 감상했다?
그것도 백작이 싫다며 몇 번이고 밝혔는데?
여기부터는 NG의 연속인 것이다.
“하아….”
담배를 물었다.
사실 이건 지나친 흥분만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지금껏 함께했던 여자들은 섹스의 중반에 이르면 다소 강압적인 플레이를 해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그 누구도 일본 야동에서 들리는 ‘야메떼!’를 스탑 사인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처럼.
경험적으로 섹스 중 ‘그만! 힘들어요!’를 듣기 좋은 추임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모두가 행복해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시 예소드 백작은 달랐고, 예상은 틀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보인 치태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후 직접적으로 시우에게 분노를 쏟아내거나 힐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게 긍정적인 사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다음 날 디아나의 놀이 교육을 위해 저택을 찾았을 때 정중한 축객령을 듣고 말았으니 말이다.
표면상으로는 ‘예소드 백작께선 사업차 현세로 나가셨습니다’라는 전언이었으나, 사흘이 지난 지금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는 건 곧 가정교사 직책에서 잘렸다고 봐도 좋겠지.
그냥 얌전히 시키는 대로만 했더라면 아무런 문제 없었을 텐데.
괜히 객기를 부리며 백작 앞에서 나부대며 그녀의 치부를 깊이 찌른 나머지 좆된 것이다.
붉은가지에 대한 해석은 추산하건대 25% 남짓이었고 백작의 도움이 더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악의 형태로 결렬이 나버리니 자신의 한심함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백작이 뒤끝을 품은 것 같진 않다.
만약 진지하게 시우의 행동을 문제 삼고 싶었더라면 무언가 조치라도 취하거나 정식으로 불러들여 항의했겠지.
흥분했다고 한들 원하지 않는 행위를 거듭해 산통을 깬 것은 시우다.
제대로 얼굴을 보고 사과하고 싶었다.
2.
명목상 현세에 출장을 떠난 것으로 되어있는 예소드 백작은 디아나와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듯 접시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으면서도 칼같이 테이블 매너를 지키는 것은, 귀족으로 살아오며 예의범절이 몸에 당연하듯 배어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냥 밥을 먹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딸 디아나의 눈까지는 속일 수 없었다.
평상시와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엄마.”
멍하게 풀려있던 백작의 눈이 사랑스러운 딸을 향한다.
“왜 그러니? 우리 딸?”
디아나는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시우 씨…. 그만뒀나요?”
디아나로선 며칠 간의 고민 끝에 입에 올린 질문이었다.
사흘 전부터 수업을 나오지 않는 신시우.
모처럼 예쁘게 꾸미고 기다렸는데 들리지 않던 노크 소리에 디아나는 그날 저녁 엄마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그때 어머니의 대답은.
‘그, 글쎄? 오늘은 바쁘시다고 했거든.’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으로 이리 답했었지.
당시에만 해도 그러려니 했었던 디아나다.
그러나 사흘이 지난 지금도 시우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는 건 조금 이상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일이 길어지시나?”
“그래요?”
“그렇단다. 밥은 맛있니?”
“네….”
게다가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가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어떤 일을 해도 똑 부러지게 처리하는 엄마가 가정교사의 행방을 제대로 모른다?
디아나가 자세히 파고드는 것을 회피하려는 듯 은근히 흘리는 화제.
최종적으로 요즘 따라 멍하니 딴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 더해지면 어딘가 단단히 이상한 것이다.
“엄마는 할 일이 많아서 먼저 일어나 볼게. 우리 딸 맛있게 먹고 잘 자렴.”
“네, 엄마.”
멀어지는 백작의 뒷모습을 쫓는 디아나의 시선에는 의혹이 잔뜩 서려 있었다.
디아나가 알기로 시우와 어머니는 은밀한 내연 관계이다.
신시우를 디아나의 가정교사 삼은 것도 그가 저택에 드나들 구실을 주기 위해서이다.
엄마의 진짜 목적은 10시에 단둘이 나누는 밀회이고 말이다.
디아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차다.
보더 타운에서 시우에게 짜증을 냈던 것도 차마 어머니에게 불만을 표출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아무튼 지금까지 지켜본 봐 신시우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이다.
자연스럽게 타인을 배려하는 언행을 지니고 있을 뿐더러 말도 없이 가정교사 직책을 내팽개치고 사라질 위인은 절대 아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그 행방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죠….”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부자연스럽다.
침대에서 이리저리 궁리를 거쳐 디아나가 떠올린 가능성은 다음과 같았다.
엄마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디아나의 앞에 시우를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왜?
“물을 것도 없어요….”
바로 그를 독점하기 위해서.
하지만 디아나가 사고를 겪으며 시우와 친해진 이후.
둘의 사이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할 무렵 칼 같이 수업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소설에도 나오지 않던가?
남자를 독점하려는 여자들이.
디아나는 사랑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형태인지, 얼마나 뜨거운 온도인지.
어떤 달콤한 맛이 나고, 어떤 질감인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의 뒷공작에 의해 그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두루뭉술한 짜증과 적의를 심어주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서 기인한 감정을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디아나는 작금의 불쾌함과 적개심을 자신이 아는 감정의 범위 내에서 치환했다.
바로 독점욕이라는 감정으로.
“내 가정교사인데…. 왜 엄마가….”
디아나의 입술이 삐쭉 비틀어졌다.
3.
“하아….”
개인 서고로 돌아온 루시 예소드는 크게 한숨 쉬었다.
식사 중 별안간 튀어나온 디아나의 질문에 깜짝 놀라 자리를 피하고 나니 최근 그녀를 고민에 빠지게 하던 문제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흘 전 바로 이 방의 소파를 갈아치우게 했던 대 사건, 가정교사 신시우와의 뜨거운 불장난이.
“이걸 어쩜 좋담….”
백작은 시우를 유혹해 그와 몸을 섞었다.
처음엔 그저 좋았다.
예상대로 능숙하게 분위기를 리드했고 그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도권이 넘어간 이후부터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숫기 없는 청년으로만 알고 있던 그는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
능숙하게 여체를 주무르는 솜씨 앞에서 루시 예소드는 한 마리의 연약한 토끼였을 뿐이다.
그의 손가락이 날카롭게 비부를 휘저을 때.
예소드는 ‘쌀 것 같아요!’ 같은 천박한 말을 주문처럼 외우며 애액을 철퍽철퍽 싸고 말았다.
모처럼 마음에 들었던 소파와 그의 한쪽 팔이 체액으로 흥건해질 때까지 말이다.
날아갔던 이성을 다시 붙잡았을 때 백작이 느낀 것은 공포였다.
그녀가 알지 못했던 쾌감에 대한, 그녀가 알지 못했던 타락에 대한.
즉, 미지에 대한 두려움.
더 쉽게 표현하면 쫄았다고 보면 되겠다.
결국 관계 도중 후다닥 자리를 피했을뿐더러 그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디아나와 시우 모두에게 뻔한 핑계를 대며 지금 이 순간도 피하고 있고 말이다.
“어떻게 다시 보라고….”
그녀가 써왔던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망가지고 구겨지는 추태를 보였는데 그 광경을 만들어낸 사람을 다시 만나라니.
죽어도 쪽팔려 못 할 짓이다.
심지어 언제든 잡아먹을 수 있다는 양 팜므파탈 포스를 잔뜩 풍겨놓고 고작 손가락 두 개에 주사 맞는 아이처럼 울부짖었던 광경은 아마 예소드 백작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불킥 트리거로 남을 것이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데….”
최근 디아나는 조금씩 부지런해지고 있었다.
나름 자습도 하고 시우를 졸졸 따라다니며 부지런히 여가 활동에도 시간을 들인다.
그가 주어진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또한 시우는 디아나를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적이 있다.
물론 사고가 일어난 곳은 보더타운이었고 설령 그가 없더라도 무난하게 해결되었을 테지만, 일을 깔끔하게 해결한 것은 그의 공로다.
따라서 무작정 시우를 만나주지도 않고 관계를 끊는 것은 그의 모든 성과를 개인적인 수치심 하나로 무의미하게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시 예소드의 경영철학은 부당해고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를 다시 보기는 해야 한다는 말이다.
“…….”
끙끙 뒤척이던 백작은 편지지 한 장을 꺼내고 펜을 들었다.
“그래도 다시 만나기는 해야지.”
물론 다시 그와 뜨거운 밤을 보낼 생각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위험한 영역이 있다.
예를 들어 얼핏 손쉽게 행복과 쾌락을 얻을 수 있지만 대체로 말로가 좋지 않은 마약이라던가….
그리고 단언컨대 그와 계속 몸을 섞는 것은 일선을 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어디까지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키기 위한 방책일 뿐이다.
결코 다른 마음은 없다.
백작은 향수를 뿌린 편지지를 곱게 접고 녹인 촛농 위에 인장을 찍었다.
EP.380 #82_미망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