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
1.
디아나의 가정교사 역할과 예소드의 개인과외가 시작된 이후.
시우는 잠자는 시간을 없앴다.
하루가 다르게 진도가 나가는 왜곡장 제어식을 공부하랴, 스승님과 스파링하랴 바빴기 때문이다.
늦은 밤.
홀로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금까지 배운 부분들을 종합 정리 중이다.
스탠드 아래에서 한 손에는 담배를, 한 손에는 펜을 잡고 새로이 습득한 이론을 정립했다.
아무래도 영감이나 즉흥적인 발상은 휘발성이어서 떠올린 그 날 바로 정리해 놓지 않으면 두루뭉술한 덩어리 형태로 무의식 속에 퇴적되어 버린다.
이제 영체도 되었으니 폐암 걱정도 없겠다.
돈도 쓸 만큼 충분하겠다.
재떨이에 타고 남은 꽁초를 칵테일 새우 놓듯 쌓아 올리며 하루 최소 6시간은 홀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밤이슬과 어우러져 내려앉은 적막이 무척 마음에 든다.
손님이 찾아왔다.
쌍둥이는 벌써 꿈나라에서 헤맬 시간.
종종 밤에 술자리를 같이했던 스승님은 기이하리만치 대작을 피했다.
티를 안 내려고 하는 눈치는 보이지만 워낙 요령이 없는 스승님인지라 눈에 다 보인다고 해야 하나….
굳이 이유는 묻지 않고 평소처럼 지내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하나뿐이다.
“똑똑.”
어두운 곳에서 보면 검게 보일 정도로 짙은 진녹색의 머리카락.
바라보기만 해도 상쾌함이 느껴지는 신비로운 시안 색 눈동자.
여리여리한 허리선에 어울리지 않는 다산형 골반과 탐스러운 가슴을 지닌 마녀.
뒷짐을 지고 슬쩍 몸을 기울인 샤론 에버그린이 서 있었다.
오늘 조금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엊그제도 봤는데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왔어?”
“응, 시우 보고 싶어서.”
첫인상 때문인지 샤론을 바라볼 때면 항상 길든 길고양이가 떠오른다.
딱히 목적이 없어도 연구실에 어슬렁어슬렁 찾아와 시우와 노닥거리고 가곤 했다.
손을 뻗어 환대하자 샤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뺨을 손바닥 위에 비볐다.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 단숨에 허물어지며 눈을 감고 애교를 피우는 샤론.
여봐라.
이 모양새도 꼭 애교 많은 고양이 같지 않은가?
“흐음, 담배 냄새.”
손바닥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던 샤론을 팔을 타고 타고 올라오더니 아예 셔츠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쉬었다.
“나 원래 담배 냄새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너 냄새랑 섞이면 기분이 좋더라.”
“또 머쓱한 말을 하네.”
“그럼 어떡해 사실인걸.”
시우는 한동안 샤론이 마음껏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팔을 벌려주었다.
샤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우력 게이지를 충전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하아…. 오늘도 충전 끝!”
샤론은 책상 위에 털썩 걸터앉아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수업은 어땠어? 또 디아나 아가씨가 말을 안 들어?”
시우가 바쁜 만큼 샤론도 바쁘다.
불완전계승을 극복한 이후 물려받게 된 자성마법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조율이 필요했다.
같은 낙인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신체의 크기, 심상의 정의 따위에 따라 자성마법을 조절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물려받은 옷을 길들이는 과정이랄까.
이러한 과정 때문에 견습마녀는 낙인을 물려받게 되면 최소 5년에서 10년 정도는 폐관 수련에 든다지.
그런데 샤론은 쌍둥이의 원소 수업까지 도맡고 있으니 바쁠 만도 하다.
어쨌건 그런 이유로 오늘 보더 타운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은 아직 샤론의 귀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일이었더라면 굳이 샤론에게 말하지 않을 심정이었다.
“뭐? 눈 17개짜리 호문쿨루스?”
“별거 없었어. 그냥 개 패듯이 패니까 항복하더라.”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당연하지.”
구태여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허무하리만치 싱겁게 끝났으니 괜찮겠지.
살짝 자랑을 섞어서 오늘 있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내가 그래서 그냥 창으로 개 패듯이 팼더니.”
“우아… 우아… 정말? 그다음은?”
샤론의 리액션은 역시 진국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당시 모습을 서술하는 시우 앞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마치 할머니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말이다.
원래 남자라는 생물이 여자의 칭찬에는 사족을 못 쓰도록 프로그래밍 된 법이다.
별 생각 없던 시우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지.”
“잘했는데 그래도, 나한테 혼나야 할 거 있어.”
샤론은 짐짓 화가 난 듯이 미간을 좁히고 허리에 손을 얹어 보였다.
“너가 엄청 대단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막 함부로 싸우면 어떡해? 다쳤으면 어쩌려고.”
“행여 상대가 좀 빡셌어도 보더 타운이었잖아. 주변 마녀들이 도와주러 왔겠지.”
“이게이게 또 말대꾸야.”
손을 뻗어 뺨을 꼬집는 샤론.
그다지 진지하지 않았던 분위기였던 만큼 자연스레 두 사람 모두 웃게 되었다.
웃음이 잦아들자 샤론이 엉덩이를 당겨 조금 더 근처에 앉더니 묻는다.
“그래서, 뭐 좋은 거 얻었어?”
“아, 이거. 볼래?”
이번 호문쿨루스 사냥의 수확은 정말 별거 없었다.
다시 인간으로 변한 잭의 팔에 박혀있던 호문쿨루스의 결정뿐 아쉽게도 유산은 없었다.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잭이 범죄에 사용했던 물건을 건져왔다.
프릴로 장식된 머리띠이다.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머리에 씌우는 순간 아무런 마력도 운용할 수 없음 + 특정 인물(아마도 아티펙트의 주인)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게 되는 효과를 지녔다고 한다.
“아티펙트구나? 용도가 뭐야?”
“이걸 씌우면 명령에 거스를 수 없게 된대. 마력도 운용할 수 없고.”
“그래?”
생긴 것부터 여자가 쓰라고 만들어진 것인지 모양이 아주 예쁘다.
그래서인지 샤론도 관심 있는 눈으로 머리띠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써 볼까? 어울릴까?”
“너한테 안 어울리는 게 어딨어.”
아티펙트에도 격이 있다.
다곤의 피리, 붉은가지 같은 부류는 한 눈으로 봐도 위험성과 복잡성이 느껴진다.
하지만 시우가 눈으로 살핀 바 이 머리띠는 오르골처럼 시간과 돈만 충분하다면 양산할 수 있는 부류였다.
“자율 방어에 간섭하려고 하네.”
“뚫릴 것 같아?”
“턱도 없어.”
“그렇겠지.”
샤론이 저렇게 평온한 어조로 말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굳이 비유하자면 15 위계가 넘는 마녀에게 이 머리띠는 SM용 수갑의 위험 정도다.
손목이 까지지 않도록 복슬복슬한 털이 달린 수갑 말이다.
시험 삼아 써봤는데 따로 자율방어가 없는 시우조차도 간단하게 간섭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한동안 시선을 위로 올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던 샤론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시우야 그거 알아? 조만간 수확제야.”
“수확제? 벌써 그렇게 됐어?”
수확제.
매년 12월 셋째 주 월요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성대한 축제로 쉽게 말해 게헨나의 추수감사절이다.
보통 현세에서는 10월이나 11월쯤을 추수감사절로 잡지만 게헨나는 겨울 보리 파종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수확제를 올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지금이야 힘의 규모에서 상대가 되지 않지만, 과거부터 마녀는 각종 종교 단체와 대립해 왔고 그중에서도 기독교 종파와는 특히 갈등의 골이 깊었다.
그런 이유로 게헨나 초기에는 시민들의 각종 종교 행사를 금지했었다 한다.
그러나 게헨나에 초기 정착한 시민들은 질병조차 신의 징벌이라 맹신하는 중세인들이었다.
생활상과 망탈리테는 종교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의미다.
마녀의 통제에 보이지 않는 불만이 불거졌고 억압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마녀들은 방황하는 중세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교단도 교구도 없는 상태에서 구전만으로 신앙이 지속될 리 없었다.
더불어 코앞에 교전이 부정하는 존재가 어마어마한 신비를 보이는데 신앙이 멀쩡하다면 그것이 도리어 이상할 지경.
1세기도 지나지 않아 종교인들은 자연스럽게 소멸했고 매년 이어오던 성탄제는 성대한 축제라는 흔적만을 남긴 채 수확제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시우도 게헨나에서 5번의 수확제를 보낸 바 있다.
수확제가 되면 보더 타운의 광장에는 커다란 전나무 한 그루가 시계탑 광장 옆에 세워진다.
크리스마스트리의 유래도 모르는 시민들이지만 하나씩 촛대와 장식품을 들고 와 전나무를 장식하고, 커다란 불을 여럿 피워올리며 어깨를 감싸며 흥청거리는 음악에 맞춰 춤춘다.
아낙네들은 집에서 요리를 한가득 싸 와 밖으로 나오기에 길거리 어느 곳을 가도 따뜻한 음식 냄새가 피어나고, 맛 좋기로 소문난 맥주가 시청의 예산지원으로 무제한 제공된다.
듣기로는 레노먼트 타운이나 아르스 마그나 타운에서는 곳곳에서 근사한 무도회가 열리면서 골방에 틀어박힌 마녀들도 모처럼 축제 분위기를 즐긴다고 한다.
노예 생활하는 동안 몇 안 되는 즐거운 이벤트였다.
“응, 이제 3주도 안 남았지. 그래서 말인데 그날 같이 보낼래?”
흡사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는 말과 같다.
시우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난 좋지.”
“오딜이랑 오데트도 같이 와도 돼?”
사실 샤론이 말하지 않았다면 시우가 부탁할 심산이었긴 했지만 내심 놀랐다.
“그래도 괜찮겠어?”
샤론은 시우를 좋아한다, 쌍둥이도 시우를 좋아한다.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기에 세 명의 연인이 생긴 셈이고 쌍둥이에게도 샤론에게도 어느 정도 허락은 받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경쟁심이라는 게 있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샤론이 쌍둥이를 데리고 온다고 말을 꺼낸 것이다.
“안될 건 뭐야. 다 같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지.”
조금 더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더라면 이런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시우가 부담해야 할 조율까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준 샤론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것도 딱히 뻐기거나 특별한 일을 한 기색도 없이 말이다.
“아, 된 것 같다.”
고맙다고 말할 새도 없이 샤론은 화제를 돌렸다.
샤론은 손으로 자기 머리에 든 머리띠를 톡톡 건드렸다.
혼자 벗어보려고 하지만 마치 팬터마임을 하는 것처럼 끙끙거리기만 할 뿐 머리띠를 벗지 못한다.
“자율방어 해제했어.”
“응?”
샤론은 배시시 웃으며 슬그머니 시우에게 다가왔다.
“엄청 신기한 느낌이다. 엄청 어렸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야 마력이 조금도 안 움직여.”
“…….”
마녀에게 자율방어란 최후의 생명줄과 같다.
그리고 샤론은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시우의 앞에서 해제해 보였다.
그만큼 믿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제 꼼짝없이 시우가 시키는 대로 해야겠네.”
일전의 샤론과 지금의 샤론이 다른 점이 있다면.
이런 엉큼한 구석이 생겼다는 것이다.
멋대로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라….
이걸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는가?
시우는 샤론을 번쩍 들어 소파로 향했다.
EP.373 #80_히어로(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