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
1.
비앙카 베릴리는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우아하게 와인잔을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 놓인 수정구는 피떡이 된 채 마녀에게 연행되는 잭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호오, 이 정도라?”
비앙카는 부연할 필요도 없이 강자다.
자성마법으로나, 세력으로나,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보유 및 제작한 예장으로나.
어지간한 마녀는 그녀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실제로 두 자리 수의 마녀를 손수 매장시키고 그들의 예장과 아티펙트를 뺏어온 비앙카이니 말이다.
하지만 비앙카를 더욱 까다로운 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녀가 아무리 미력하고 힘없는 마녀를 상대할 때도 만전을 다하기 때문이다.
비앙카는 결단코 자신의 생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지 않았다.
목숨을 건 도박은 남의 것으로 충분했다.
설령 그 상대가 대마녀가 아닐지라도, 비록 일 대에 불과한 남자 마녀일지라도 방심하지 않는다.
1만 분의 1, 혹시라도 일어날 변수를 대비해 철두철미하게 상대를 분석하고 사냥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잭이라는 노예에게 호문쿨루스가 봉인된 보주(寶珠) 하나를 넘겼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 의식을 장악하는 빙의 형태의 호문쿨루스가 봉인된 보주였다.
이름을 남긴 호문쿨루스처럼 까다로운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쓸만한 녀석이라 여겼는데.
신시우는 너무나도 쉽게 패 죽여버렸다.
티페레트 공작에게 무투술을 사사 받았다더니 그 값을 하는 모양이다.
“생각보다는 강하네.”
“으… 으으… 으으….”
비앙카의 앞에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수정구를 바라보던 에아.
이지(理智)가 흐려지고 지성마저 퇴화한 끝에 말 잘 듣는 애완견으로 변해버린 에아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한시도 수정구 속 남자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증오를 감추지 못하다니.
얼마나 미워하면 이럴 수 있을까?
“어휴, 더럽기는. 이리 와 봐.”
“에으…으…. 주, 주인니임….”
비앙카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아의 턱밑에 흐르는 침을 닦아주었다.
에아는 반사적으로 비앙카에게 안기며 매달린다.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얼마 전 에아 사달멜리크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매서운 독기로 빛나던 붉은 눈동자는 자폐아처럼 탁하게 변해버렸고, 이제는 버튼만 누르면 편리하게 성욕을 배출할 수 있는 자판기일 뿐이다.
역시 자율방어를 제거하고 마약을 들이부은 것이 패착이었을까?
앙칼진 그녀의 모습도 사랑스럽다 여기던 비앙카는 씁쓸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아직 즐길거리가 잔뜩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런 모습의 에아도 마음에 든다.
“나중에 질린다면….”
그땐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이고.
아무튼 이것으로 전력 분석은 끝났다.
남자 마녀인 주제에 저 정도 능력.
더욱 수집하고 싶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의 옆에 찰떡처럼 붙어있는 티페레트 공작만 잠깐 밖으로 빼놓을 수 있다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다.
아마도 즐거운 이벤트가 되겠지.
“에아, 이리 온. 같이 침대로 갈까?”
“네에, 네에 주인님….”
비앙카는 주사기 하나를 꺼내든 채 에아의 손목을 잡고 침대로 향했다.
2.
오늘 있던 일련의 사건.
매일 한 부씩 발매되는 보더타운의 간이 신문 카나르에 ‘칼잡이 잭의 봉기’라고 명명된 이 사건은 단순하게 마무리되었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칼잡이 잭이 호문쿨루스에게 몸을 빼앗겨 같은 십인장을 죽여버렸으며 그 과정에서 예소드 가의 견습마녀가 습격당했으나 예소드 백작의 손에 의해 퇴치되었다.
보면 알겠지만, 사실과는 다른 점이 몇 부분 있다.
우선 디아나를 습격한 이유가 윤간을 위해서라는 부분이 누락되었고,
시우가 아닌 백작이 사건을 진압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엄마한테는 비밀로 해야 해요….’
‘네? 그러셔도 괜찮겠어요?’
‘저희 엄마가 공적이 되면 어떡해요….’
‘아….’
디아나가 시우를 말렸기 때문이다.
만약 어마어마한 딸 바보인 예소드 백작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전후 사정에 상관없이 보더 타운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시우가 백작에게 반죽음이 된 잭을 인계하자마자 꿈에 나올까 무서운 얼굴로 그를 지하감옥에 처넣었다.
다른 마녀에게 하청 해서 배후를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부채를 구기며 ‘관리자 놈들….’이라 말하며 이를 갈던 백작의 모습은 감히 말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한기가 절절 흘렀다.
또한 ‘강간미수’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예소드 가의 견습마녀와 붙어 다닌다면 울릴 파장은 안 좋은 기억이 남았을 디아나에게 정서적으로 좋지 못할 것이라는 시우의 판단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적당히 입을 맞춘 두 사람은 ‘납치 및 강간 미수’에 대한 사실은 없던 일로 해버렸다.
두 번째 사안은 시우가 직접 백작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제가 했다는 건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 마녀라는 것만으로도 이목을 끌고 주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굳이 파란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단련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눈알 17개짜리 호문쿨루스 정도는 박살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신기하게 생긴 카츄샤도 얻었으니 여기서 만족해야지.
아무튼 큰일이 일어날 뻔했던 것은 분명하다.
예소드 백작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디아나의 침실에 들어가 사랑스러운 딸을 어르고 달래기 바빴다.
그때 흐른 백작의 눈물만 해도 백작의 개인 욕장의 반의 반 정도는 채웠으리라.
“후….”
사실 시우도 마냥 떳떳할 수는 없었다.
분명 사고였다.
보더 타운이 치안이 험악하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에 한한 이야기지 마녀만 되어도 어디가서 해코지당할 곳은 아니다.
여기는 호문쿨루스나 공적이 나돌아다니는 현세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디아나가 그런 일을 당하고 호문쿨루스에게 습격을 받은 것은 인솔 교사인 시우가 보더 타운에 디아나를 데려갔기 때문이다.
혹시나 백작의 분노가 여기까지 다다를지를 걱정하며 시우는 한숨을 푹 쉬었다.
3.
“우리 딸…. 정말 혼자 괜찮겠니?”
“됐어요 엄마, 이제는 정말 괜찮아요. 보세요! 특별히 다친 곳도 없잖아요.”
“허흐흐흑… 흐흑… 엄마가 옆에 못 있어 줘서 미안해….”
“정말 괜찮은데…. 엄마가 미안해할 일도 아니에요.”
디아나의 소식을 듣자마자 예소드 백작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새끼 용을 잃은 어미 용이 포효하듯 우렁찬 마력의 노성에 그녀가 업무를 보던 건물의 지붕이 날아가 버렸을 정도이다.
당장 보더 타운의 관리인들을 문책하고 문제의 원인이 되었던 보더타운의 존재 자체를 없애버릴 예정이었던 루시 백작이지만 지금은 디아나를 끌어안은 채 엉엉 울고 있었다.
“오늘은 엄마랑 꼭 같이 자자꾸나.”
“…네. 근데 저 낮잠 자고 싶어요. 좀 쉴게요.”
“혼자 괜찮겠니? 엄마가 같이 있을까?”
“아뇨, 정말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 괜찮아요.”
“그래 우리딸…. 씩씩하다! 장하다!”
겨우겨우 백작의 눈물을 멈추고 혼자 있고 싶다는 핑계로 어머니를 내보낸 디아나.
디아나는 엄마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숨 막힐 듯 목을 조여오는 어머니의 포옹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지만, 체력적으로는 버거웠기 때문이다.
“…….”
오늘 디아나는 죽을 위기를 넘겼다.
마녀로서 죽을 뻔했고, 실제로 날카로운 단도에 목이 찔리거나 호문쿨루스에 의해 죽을 뻔했다.
악취 나는 남자들의 손길이 차갑고 까칠한 바닥 위에 몸을 억누르던 장면이, 히죽거리는 누런 이빨과 욕망의 악취가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던 것이 떠오른다.
말로만 들었던 호문쿨루스가, 그것도 눈이 17개나 달린 놈이 목숨을 노리려 들었던 것도 생각난다.
디아나는 겁이 많다.
이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혼자 잠을 자는 것도 못 했고 아직도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이면 가끔 잠을 설친다.
스스로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다.
그런 성정에 비추어 본다면 원래 이것보다 훨씬 무서워야 했다.
훨씬 경악스럽고 충격스러워야 했다.
아직도 가슴이 꾹꾹 조여오는 공포스러운 느낌에 벌벌 떨어야 했고, 눈물을 흘리며 엄마의 품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
디아나는 자신이 이상하리만치 침착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위기의 순간 등장한 한 남자의 등 덕분이라는 것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신시우.
디아나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
마치 왕자님처럼 나타나 흉악한 도적 무리를 무찌른 영웅.
그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전개의 연속이었다.
낙인의 위치도 자궁이 아니라 왼 눈.
계승 받은 낙인도 없는 풋내기 마녀(근데 이제 위치보드에 능숙한).
여기까지가 신시우에 대한 디아나의 인상이었다.
총을 맞고 쓰러져 디아나의 옆에 내던져야 옳았다.
“…….”
디아나는 그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워낙에 급박했던 상황이고 디아나는 반쯤 패닉 상태였기에 정확한 것은 떠올릴 수 없었지만….
들어오자마자 했던 대사가….
‘감히 무슨 짓인가?’
‘아가씨에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나의 마법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 버러지들아..’
였나?
뭐 대충 비슷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피가 튀는 잔인한 장면이 조금 나오고.
무리 중 가장 악독했던 사람에게 인질에 잡혔을 무렵.
시우가 말했다.
‘디아나 아가씨 절 믿어주세요.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전 제 목숨이라도 내놓을 겁니다.’
이것도 대충 이런 뉘앙스였던 것 같다.
멋지게 흉악범에게 마법을 사용해 디아나를 구해낸 시우의 활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흉악범은 모종의 방법으로 호문쿨루스가 되었다.
디아나는 거기서 완전히 겁에 질리고 말았다.
일개 양아치들이야 마법으로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호문쿨루스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지니 말이다.
그때 그의 몸에 갑자기 멋진 검은 갑옷이 생겨났다.
흔히 책이나 삽화로 접할 수 있는 투박하고 촌스러운 갑옷이 아니다.
관절 이음매가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몸에 달라붙는 세련되고 아름다운 갑옷.
그는 더러운 말로 디아나를 협박하려던 남자를 넓은 등판으로 가리며 주옥같은 명대사들을 뽑아내었다.
‘아니,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 나한테 중요한 건 네 목이 어깨 위에 언제까지 달려있을까 뿐이니까.’
‘고작 이게 전부냐? 그렇다면 이제 내가 간다.’
그는 현란한 몸놀림으로 호문쿨루스를 요리했다.
사실 디아나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잔상이 남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는 시우와 펑펑 날아가는 호문쿨루스였지만 압도적인 양상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다.
믿어지는가?
일개 초짜 마녀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남자가 엄청 긴 창을 붕붕 휘두르며 호문쿨루스 한 마리를, 그것도 눈이 열 일곱 개나 달린 무시무시한 녀석을 두들겨 패버린 것이다.
“후우….”
모든 일이 끝나고 그의 듬직한 품에 안겨 엉엉 울던 것까지 생각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 순간 모든 두려움과 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던 것도 기억이 났다.
하루만에 벌어진 우여곡절이 완전히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슬슬 눈꺼풀이 감긴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든 하루였다.
“…….”
끔찍하고 무서웠던 기억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짙은 악의를 정면에서 받은 적도 없었고,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해본 적도 없었다.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자꾸만 눈길이 가던 ‘성욕’이라는 것이 인간의 외피를 얼마나 추악하게 뚫고 나올 수 있는지도 처음 알았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감겨있는 디아나의 눈꺼풀 뒤에서 짙은 어둠을 일소시켜버리는 커다란 등이 보였으니까.
악몽을 꾼다 하더라도 멋지게 나타나 구해줄 테니까.
얼마지나지 않아 디아나의 침대에선 색색거리는 작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EP.371 #80_히어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