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1.
이제껏 제한된 정보와 교육을 통해 남성에 대해 알지 못했던 디아나.
그녀는 최근 엄마가 집필한 관능 소설을 통해 ‘성’에 대해 알았고.
바로 어제 어머니와 그가 사랑을 나누기 전 애무 행각까지 엿보고 말았다.
이전까지는 더럽다 불결하더라고만 여기며 고개를 돌렸던 행위는 어느덧 은밀한 호기심이 되었고.
그 호기심은 자연스럽게 곁에 있는 유일한 남자 신시우를 향했다.
디아나는 이 모든 것을 무의식중에 부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침대에서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근육질이던 그의 알몸이 떠올랐고, 이후 상상은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움켜쥐고 있던 그의 남성기까지 옮겨갔다.
바로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지금 그와 나란히 걷고 있는 이 순간이 몹시도 불편했다.
“이봐요.”
“네, 디아나 아가씨.”
“좀 가까운 곳으로 가면 안 돼요?”
“기왕이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도 좋잖아요. 오늘은 여기서 이것저것 현세 물품을 보여드리고 설명해 드릴 거에요.”
금일 야외활동 구간으로 선정된 곳은 가장 현세와 가까이 맞닿은 타운.
경계의 도시 보더타운이다.
사실 무난하게 사격이나 해볼까 했지만 디아나가 한 번도 보더 타운에 직접 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이곳으로 결정했다.
밀수꾼들의 접선소에는 다양한 현세 물품이 있고 쌍둥이들은 확실히 좋아했으니 말이다.
디아나가 현세의 과자와 음료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도 선정 이유 중 하나였다.
“하아….”
그러나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나 보다.
우중충하게 내리는 안개비에 입술을 삐죽 내밀고 우산을 받쳐 든 디아나.
그 표정은 함께 낚시를 떠났을 때보다 안 좋았다.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현세는 위험한 곳이잖아요.”
“그래도 신기한 물건이 많을 거예요. 둘러보다 보면 즐거워하실 부분도 있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보더 타운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내려오면서 살짝 후회됐다.
우산을 써도 안개처럼 내리는 비는 옷깃을 무겁게 적셨고, 제대로 포장되지 않은 노면은 진흙처럼 질척거렸다.
디아나의 하얀 구두가 진흙으로 더럽혀질 때마다 내심 가슴이 철렁했다.
“…….”
하지만 생각 외로 디아나는 입을 조개처럼 다문 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제 됐어요! 갈래요! 기분 상했어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대충 이런 느낌의 말로 불평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쪽입니다.”
하루종일 부려지는 노예가 보이는 선착장까지 내려온 뒤 미리 알아두었던 접선소로 그녀를 안내했다.
일전에 낚시용품을 구매했던 ‘뚱뚱한 인어 접선소’였다.
창고형 마트처럼 층고가 높게 지어진 단층 건물 안에 다양한 현세 물품이 쌓인 진열대가 미로처럼 놓여있다.
아무나 턱턱 들어올 수 있는 곳인 만큼 고가의 물품은 딱히 없었지만, 디아나에게는 이것저것 신기한 물건들이 아닐까 했는데.
“디아나 님이 좋아하신다는 과자도 있네요. 한 박스 살까요?”
“…어차피 집에 있어요.”
“이건 어떤가요?”
“관심 없어요.”
이것마저 조금 실수한 것 같다.
디아나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기나 할 뿐 어떤 신기한 기색이나 감탄도 내뱉지 않았다.
그래도 낚시할 때는 꽤 흥미진진한 눈으로 시우를 지켜봤는데 말이다.
상황이 상황이고 계약이 계약이니 어쩔 수 없이 발돋움하고야 있지만.
뭘 해도 의욕 없어 보이는 상대를 즐겁게 해야 한다는 것은 꽤 고된 일이다.
속으로 한숨을 삼킬 무렵.
“저기요.”
디아나가 별안간 시우를 불러세웠다.
“네, 아가씨.”
먼저 불러세웠으면서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문 디아나.
프릴이 치렁치렁한 소공녀처럼 차려입은 그녀는 더러워진 구두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과외, 재밌어요?”
“과외라면…. 지금 저희가 하는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위치보드랑?”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흔드는 디아나.
“아, 예소드 백작님과 하는 과외 말씀이시군요.”
디아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구두에 묻은 진흙이 신경 쓰이는 듯 가지런히 모인 발끝만을 바라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죠. 백작님께서는 역장 마법의 일인자이신걸요. 매일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그거 말고는요?”
“그거 말고라뇨?”
처음으로 디아나의 자홍빛 시선이 올곧게 시우를 향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버겁다는 듯, 어쩐지 버거워 보였다.
“…숨기는 거 없어요?”
뭐지?
디아나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어쩐지 은은하게 화가 난 것처럼도 보인달까.
가장 큰 문제는 시우는 그녀가 왜 화났는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딱히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의뭉을 떠는 그의 모습에 디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으면서, 개인과외라는 명목으로 매일 그런 짓을 벌이면서.
디아나의 질문에는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분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시우와 디아나의 관계는 가정교사와 제자다.
그것도 진지한 사제관계 따위가 아닌 ‘놀이 선생’이라는 얼핏 웃음이 나오는 관계인 것이다.
거짓말을 하건 말건 딱히 신경 쓸 일도 아니고, 더 나아가 엄마랑 어떤 관계이건 굳이 보고 받을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엄마의 비밀을 떠벌리지 않고 지켜주는 모습을 높이 사는 것이 타당했다.
디아나는 시우가 싫었다.
자꾸 귀찮은 활동에 끌고 다니는 것도 싫었고, 얄미울 정도로 위치보드를 잘하는 것도 싫었고, 엄마의 비밀 애인이라는 것도 싫었다.
아무튼 그냥 싫었다.
그래도 최근엔 이것저것 말도 통하고, 의외로 섬세하게 배려하는 부분도 있어서 ‘조금 괜찮은 사람인가?’라고 생각했는데.
평소에 잘해주고 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엄마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라니.
즉, 디아나는 징검다리일 뿐이라는 말.
결국 이 남자도 어머니가 알려준 남자와 똑같은 족속이었다.
디아나만 착각하고 있던 것일 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자 섣부른 기대에 대한 배신감이 줄기줄기 뻗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술을 비튼 채 그를 비난하고 있었다.
“…가증스러워요.”
“네?”
“당신 엄청 짜증 난다고요.”
“갑자기요?”
어안이 벙벙해진 그의 표정은 도저히 연기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랐던 디아나였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 디아나는 더욱 시우가 싫었다.
“최초의 남자 마녀라고 해서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 같아요? 그래봤자 저희 예소드 가문의 후광 앞에서는 반딧불이 수준이라는 거 잊지 마세요.”
“그거야 뭐, 당연한 이야기죠.”
차라리 화라도 내거나 얼굴이라도 굳는다면 잠시 저열한 통쾌함이라도 맛볼 수 있을 텐데.
그는 눈이나 멍청히 끔뻑거릴 줄 알지 한 치의 악의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손바닥 안이었다 이거지.
그 모습이 실로 부아가 치민다.
“됐어요, 오늘은 갈래요.”
“네? 혹시 제가 뭔가 잘못 말한 게 있나요?”
“없어요!”
성큼성큼 걸어 접선소를 나서려니 따라붙는 신시우.
참다못한 디아나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따라오기만 해요. 내일 당장 잘라줄 테니까.”
어차피 엄마의 총애를 받는 남자를 디아나의 말 한마디로 자를 수는 없겠지만.
이거라도 말하지 않는다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멈칫 멈춰선 시우를 뒤로하고 디아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접선소를 나섰다.
2.
“후우….”
“꿀꺽….”
한숨과 침을 삼키는 소리.
긴장감 때문에 흐른 식은땀이 퀴퀴한 냄새와 함께 피부에 스며든다.
스무 쌍의 시선은 보더타운의 풍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마녀를 쫓고 있었다.
“저년 맞지?”
“맞아, 사진이랑 완전 똑같이 생겼어.”
얼마 전 비앙카와 마주했던 칼잡이 잭을 포함한 십인장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상자나 건물 잔해 따위에 몸을 감춘 채 바짝 굳은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대장 어떻게 할 거야? 정말 해?”
“…….”
“백작가의 견습마녀라잖아.”
얼마 전 그들의 아지트에 찾아온 한 공적은 두 개의 아티펙트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한 가지 의뢰를 부탁했다.
“시발 가만히 있어 봐. 왜 이렇게 계집애처럼 발발 떨어. 백작가건 뭐건 어차피 걸리면 뒤지는 건 매한가진데.”
오합지졸 같은 부하들 사이에서 잭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던가.
마녀에 의해 잡혀 와 인간보다도 못한 삶을 살면서 기다려왔다.
당연한 듯이 턱을 치켜들고 다니는 마녀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그리고 소원은 이루어졌다.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마지막 죽창을 손에 얻은 것이다.
잭은 물끄러미 손에 든 카츄사를 내려보았다.
이것이 마녀에게 받은 송곳니 중 하나 ‘종속의 고리’.
자칭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실현해주는 착한 요정, 비앙카의 말에 따르면 자율방어가 없는 마녀에 한해 마력을 억제하고 어떤 명령도 복종하게 만든다고 한다.
하물며 일반 마녀보다 훨씬 약한 견습마녀는 말할 것도 없다.
즉, 머리에 이것을 씌우기만 하면 게임은 종료.
어려운 것도 없었다.
다만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이 쓰레기들이 끝까지 계획대로 수행해 주느냐의 문제였다.
아무리 잭이라도 명색이 마녀인 견습마녀를 혼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던 중 십인장 중 한 명이 덜덜 떠는 목소리로 우는 소리를 내었다.
“대장 그, 그냥 그만두면 안 되나?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자.”
여봐라.
벌써 집단에 불안감을 전이시키는 나약한 놈.
기껏 결사의 각오로 복수를 준비하는 집단을 와해시키는 불순분자이다.
그에 대한 잭의 대답은 간단했다.
“꾸억…!”
순식간에 꺼내든 단도를 목에 박아넣고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비틀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그엑…구에에…!”
기도가 헤집어진 놈은 변변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춤을 추다 죽어갔다.
잭은 뺨에 묻은 피를 소매로 닦으며 흉흉한 눈빛으로 주변을 훑는다.
어차피 이 계획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죽는 것은 매한가지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어영부영 미뤄진 계획 끝에 밀고자가 나오는 것.
오늘 결행을 다짐한 이상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뒤처리였다.
“또 다음에 하고 싶은 놈 있어?”
빳빳하게 굳은 십인장들에게 이빨을 드러내는 잭.
“이 겁쟁이 새끼들아. 너희가 하겠다고 한 거잖아. 마녀 따먹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새끼들이 모처럼 마녀한테 갚아줄 수 있게 됐는데 이제 와서 쫄려?”
방금 죽어간 시체를 눈앞에 두고 반박할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없었다.
“우릴 찾아온 마녀가 자원봉사자처럼 생겼디? 이런 마법 물품까지 주고 갔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고 하면 ‘아쉽네요, 줬던 물건은 다시 가져갈게요’하고 물러날 것 같아?”
“…….”
“그땐 아무것도 못 해보고 다 뒤지는 거야.”
“마, 맞아. 기왕 죽을 거면 견습마녀라도 따먹고 죽는 거지.”
하얗게 질려있던 돼지남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하자 다른 이들도 차차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어차피 벼랑 끝 인생을 살아온 막장 사형수들이다.
차곡차곡 쌓아온 분노를 성욕으로 치환해 견습마녀에게 풀고, 인생을 완전히 박살내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자들이다.
“돼지새끼 오랜만에 맞는 말하네.”
“조, 좋아… 시발 존나 강간하고 죽이자.”
“순서는 제비뽑기로 하는거지?”
흥분과 긴장 속에서 핏발이 선 눈은 벌써부터 발가벗겨진 듯한 견습마녀의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울분을 제대로 풀어주자고. 계획대로 해.”
마침 인적이 드문 곳으로 알아서 발걸음을 옮겨주는 견습마녀를 따라.
9명이 된 남자들은 쥐 죽은 듯 미행을 개시했다.
EP.367 #79_시궁쥐(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