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62화 (362/917)

#362

1.

“디아나 아가씨. 오늘 어쩐지 집중을 못 하시네요.”

어제는 야외활동을 했으니 오늘은 위치보드 교육.

갑작스러운 시우의 말에 디아나는 퍼득 정신을 차렸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평상시에 놓치지 않으시던 부분을 놓치시길래 말입니다. 컨디션이 안 좋으시면 조금 쉬시겠어요?”

사실 그의 말대로였다.

평상시 디아나와 시우의 경기는 250~300수 정도의 장기전 끝에 끝난다.

하지만 오늘은 죄다 100수 내외.

빠를 때는 50수 만에도 패배한 것이다.

더군다나 디아나는 오늘 시우에게 게임 종료 후 복기를 통한 피드백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기계적으로 플레이하고 한 게임이 끝나면 곧장 추가 게임을 하는 식으로 하며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적어도 위치보드에 한해서는 시우를 인정하고 한 수 배우려던 디아나였는데 말이다.

디아나는 시우를 빤히 보았다.

오늘 3시간 넘게 같이 게임을 했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

복잡한 심경.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리고 은은한 걱정을 품은 눈동자에 디아나는 속에 응어리진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네, 좀 쉴게요.”

“고생하셨습니다.”

맥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디아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인체공학적으로 완벽한 설계를 자랑하는 맞춤형 침대.

치렁치렁 천개를 늘어뜨려 공주님 침대처럼 꾸며 진 자신만의 아지트에 털썩 몸을 뉜다.

“하아…. 뭐죠 이 기분은….”

어제 가정교사 신시우와 어머니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깨닫게 된 뒤.

디아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을 느꼈다.

소설 속 엄마의 단정치 못한 모습.

그리고 디아나에게 가정교사를 붙인다는 구실로 그를 옆에 둔 거짓말에 일말의 충격을 느끼긴 했지만 그건 어제 자면서 정리했다.

디아나도 사랑이 무엇인지는 글로나마 읽었다.

비록 앞에서는 그토록 남자를 조심하라던 어머니가 그런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전부 이해하려 노력했다.

디아나 탓에.

주변의 시선 탓에.

본심을 솔직하게 내보이지 못하고 골방에서 관능 소설을 쓰며 해소하는 모습이 안쓰럽게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죽 외롭고 고독했으면 그랬겠냐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디아나는 분명 어머니의 사정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새삼 어머니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 디아나 몰래 밀애(密愛)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디아나가 불편해할 이유는 없었다.

조금 놀랍고 씁쓸하긴 해도 ‘잘됐네요’ ‘다행이네요’라고 읊조리면 그뿐인 사소한 일.

마음을 잘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을 터다.

어젯밤도 별다른 뒤척임 없이 꿀 같은 단잠을 맛보았을 터다.

그런 디아나의 마음에 파문이 일어난 것은 오늘도 여지없이 디아나를 찾아온 시우를 마주하면서부터였다.

“으…으으….”

디아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수영을 하는 것처럼 침대를 팡팡 찼다.

여전히 깔끔한 집사 복을 차려입고 온 시우.

문을 열고 그를 거실로 들인 순간부터 소설 속 글귀가 머리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와는 달리 2차 성징부터 툭 튀어나오는 목젖.

살며시 올라간 셔츠 커프 사이로 엿보이는 탄탄한 팔뚝.

진지하게 위치보드를 내려다보는 눈빛까지.

소설 묘사와 완벽하게 합치한다.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이 되어 입을 꾹 닫을 무렵.

그가 오늘 밤에도 엄마의 ‘개인과외’를 받게 될 것임을 자각했을 무렵.

디아나는 또 다른 불편함을 찾아냈다.

“이상해요….”

불쾌했다.

소중한 엄마를 빼앗는 그가.

디아나도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을 알고 있는 그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속삭임처럼 떠오른 아주 작은 불만은 시우만을 향하지 않았다.

내 가정교사인데.

내가 먼저 알았는데.

나한테는 남자는 다 늑대라고 했으면서.

스스로 이해할 수도 없고 어처구니도 없지만.

아주 잠깐 동안 어머니에게 불만스러운 마음을 품은 것이다.

“으…으아아아….”

이것도 저것도 도저히 알 수 없어진 디아나는 다시 한 번 팡팡 침대를 두드렸다.

2.

예소드 백작과의 개인과외는 항상 저녁에 이뤄진다.

하지만 오늘은 디아나가 평소보다 일찍 리타이어했고, 때마침 백작도 여유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후쯤 수업을 받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붉은가지를 통제하는 방법을 찾을 거예요. 실전 돌입인 셈이죠.”

“이론은 더 하지 않아도 괜찮은가요?”

“여기부터는 직접 부딪치면서 부족한 부분에 대해 보충 교육을 하는 편이 효율이 높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후후, 비밀이랍니다.”

항상 가는 개인 서고로 향할 줄 알았는데.

길이 조금 달랐다.

살짝 앞서나가는 백작의 뒷모습.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백작은 굉장히 꾸미기를 좋아하는 마녀였다.

하얀 코디를 선호한다는 것을 빼면 입는 옷도 매번 달라지고, 그 스타일도 언제나 발군이다.

옷값이 얼마나 들려나 하고 멍하니 있자니 살짝 앞서 나간 백작의 엉덩이가 살랑살랑 거리는 것이 보였다.

잘록한 허리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넓은 골반과 하이힐의 조화가 만들어낸 우아한 각선미.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에 눈길이 뺏겼는데….

“시우 씨, 레이디의 뒷모습을 너무 빤히 보는 건 실례랍니다.”

뒤를 돌아본 백작에게 들켰다.

그녀는 화를 내기는 커녕 요염해 보이는 눈웃음을 지으며 시우를 흘겨보았다.

할 말이 궁색해진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스타일이 눈에 익어서요. 혹시 플로라 양장점의 옷인가요?”

“흐음~ 그런 거였군요. 맞아요, 안목이 좋네요.”

백작은 알만하다는 웃음을 지었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 주제가 자연스럽게 양장점으로 옮겨갔다.

시우도 거기서 양복을 지어본 적이 있다는 둥, 게헨나의 귀족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옷을 맞춘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양장점의 주인인 플로라 아라베스크에게까지 화제가 옮겨갔다.

“플로라 아라베스크도 대단한 마녀죠. 2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보다 높은 위계의 마녀는 없었으니까요.”

금시초문이었기에 놀랐다.

“정말인가요?”

“네, 케테르 공작을 제외하면요. 아마 그녀가 계속해서 마법 연구에 매진했더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굉장히 높은 경지겠죠? 까마득한 옛날부터 22 위계였으니.”

나른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름 강자의 관록이었다는 건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인가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

“들어갈까요?”

당일 수업 교실의 입구를 본 시우는 멈추어 섰다.

아무리 봐도 욕탕의 입구였기 때문이다.

“여기 맞나요?”

“네, 제 개인 욕장이랍니다.”

혹시나 싶어 물어본 시우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백작.

개인과외를 왜 목욕탕에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백작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제 있나요?”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요?”

“어차피 이른 시각에 시작한 수업이니 앞서 혼욕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않나요?”

혼욕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시우의 본능이 예소드 백작의 몸을 훑었다.

어제 낚시가 데이트 비스름하긴 했지만 갑자기 혼욕?

몇 단계가 건너뛴 것 같은 느낌이다.

“욕조가 넓어서 두 사람이 들어가기 충분하답니다.”

슬며시 다가온 백작이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가 간지럽다.

며칠 전부터 살살 도발하는 건지 테스트를 하는 건지 헷갈리게 하는 예소드 백작은 잠시 후 시우의 얼빠진 반응을 보고 교교히 웃었다.

“농담이에요. 따라오세요.”

일전에 가봤던 대욕장만큼 화려하진 않았지만 아름답게 꾸며진 욕장.

욕실이라기보다는 근사한 호텔 라운지처럼 꾸며진 그녀의 개인 욕장은 그저 걷는 것만으로 힐링 되는 느낌을 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들어서자 두 사람은커녕 열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 원형 욕조 하나가 있다.

욕조 안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중앙엔 시우가 백작에게 맡겨두었던 붉은가지가 잠겨있었다.

“붉은가지가 너무 날뛰어서 말이죠. 욕조 안은 영하 2도로 맞춰둔 순도 99.9%의 마력중수(魔力重水)로 채워져 있어요.”

“마력중수는 뭔가요?”

“어머, 연금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가르치는데 모르시는군요. 정제를 통해 반응성이 한없이 낮게 만든 마력수예요.

우선은 저 안에서 붉은가지를 다루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해요. 통제에 실패했을 때 저 물에 담가 버리기만 하면 완충장치 겸 감속재로 활용할 수 있는 거죠.”

확실히 일반 물과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수면에 의한 굴절도 없고 바닥 아래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보인다.

“마력중수 안에서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죠.”

“알겠습니다.”

“아, 그 전에.”

시우가 신발과 양말만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백작이 슬며시 시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윗옷은 벗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낮은 온도에 맞춰져 있다 보니 옷이 젖으면 더 추울 거예요.”

어쩐지 이상한 부탁이긴 했지만 뭐 여자도 아니고 고작 윗옷 정도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맨살끼리 맞댄 사이 아닌가?

재킷과 조끼, 셔츠를 벗은 뒤 한 걸음 한 걸음 욕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시우는 백작의 충고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정말 더럽게 차가웠다.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정말 이대로 잡아도 되나요?”

“네. 문제 없어요.”

허리 높이까지 차오른 물 안에서 시우는 중간에 거치된 붉은가지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윽!”

누전되는 배터리를 쥔 것처럼 붉은가지를 움켜쥔 손바닥이 찌릿거린다.

전에도 비슷한 것을 느꼈었는데 영체가 왜곡되려는 조짐이었다.

하지만 몸 전체가 박살이 날 것 같았던 이전의 통증과는 달리 지금은 손에 쥘 수준은 되었다.

더군다나 성가시기 짝이 없는 붉은 결계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만으로 훨씬 편안하다.

“준비했던 마법으로 감아서 수면 위로 빼 보실래요?”

“알겠습니다. 피어라.”

시우는 침착하게 리본 한 가닥을 꺼내 들었다.

차폐식과 통제식이 적용된 리본이다.

물뱀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리본이 붉은가지를 감싸고 시우는 신중히 그것을 마력중수 밖으로 꺼내었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칭칭 감듯이 봉인했던 이전과는 달리 고작 한 겹으로 이뤄진 얇은 포장.

마력중수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난동을 부릴지도 모른다.

마침내 물 밖으로 나온 붉은가지.

시우는 감동했다.

그동안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창이 아주 잠잠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라면 붉은가지를 들고도 좌표이동식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다.

“됐다!”

예소드 백작은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 상냥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기존 시우 씨가 사용하던 방식은 통상 상태에서 차폐율이 72% 남짓에 불과했어요. 당장 영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주위에 섬세한 아티펙트가 있다면 고장이 나는 정도죠. 지금은 거의 완벽한 차폐에 가깝네요.”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해요.”

“뭘요, 제가 한 거라곤 기본적인 조언밖에 없었는데요.”

시우의 싱글벙글한 웃음에 백작은 미소로 화답했다.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붉은가지는 충격에도 반응하잖아요.”

“그렇죠.”

적기사와 교전했을 때.

무기를 맞대는 것만으로 내장을 진탕으로 만드려 들던 왜곡장의 충격파를 잊을 수 없다.

백작의 말대로 통상 상태의 붉은가지는 무리 없이 통제할 수 있었지만, 무기 삼아 자유자재로 휘두르려면 더욱 정밀한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먼저 그 상태로 가볍게 충격을 주는 것으로 시작할까요?”

그래도 크나큰 발전이다.

앞으로도 더 발전할 자신이 있었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실험을 이어 나갔다.

3.

하아.

눈 호강한다.

윗옷을 벗고 붉은가지를 만지작 거리는 시우를 보며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P.365 #78_야외활동(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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