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61화 (361/917)

#361

1.

낚시는 즐거웠다.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서.

그보다는 조금 덜 반짝이는 물 위로 낚싯대를 드리우며 서로가 한 몸이 된 채 같은 시간을 공유한다.

비록 야릇한 이벤트는 없었고 야한 농담으로 그를 절절매게 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지만.

굉장히 즐거웠다.

이 경험을 표현하자면 어떤 단어가 좋을까?

밀회?

아니지, 그건 너무 농밀한 느낌이 강하다.

데이트.

그래 딱 이 정도의 풋풋하고 설레는 단어가 좋겠지.

으슬으슬한 어깨 위에 자켓을 걸쳐주는 섬세한 모습도.

살짝 떠보는 유혹에도 시선만 피하는 모습도.

심지어 체취를 들이마시는 게 부끄럽기 때문인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 입으로만 숨을 쉬는 모습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어서 그리웠고 반가웠다.

날은 이토록 쌀쌀한데 개인 서고로 돌아왔음에도 온기가 남아있는 기분이다.

아주 즐거운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들뜬 마음도 여전하다.

“조금은…. 응석 부려도 되려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외면했던 세월은 길었다.

디아나를 위해, 백작의 명예를 위해 비밀 서고에서 홀로 풀어낼 뿐이었다.

그것을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한다거나, 딱히 유감스럽게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네.”

백작은 쓴웃음을 짓고 비밀 서고에 앉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란 빠르게 그리고 쉴 새 없이 변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도 없던 ‘남자 마녀’를 가정교사로 삼은 뒤 불과 며칠 만에 눈독을 들이게 된 것처럼 말이다.

관계의 전환점.

키를 잡는 것은 루시 예소드다.

그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이 관계가 뒤바뀔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여튼… 소극적이라니까.”

오늘 함께 낚시할 때 갑자기 뒤에서 껴안는다거나 은근슬쩍 키스라도 시도해왔다면 그 정도는 눈 감고 허락해 주었을 텐데.

진짜 딱 하라는 행동까지만 할 줄이야.

또 그런 요령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지만 말이다.

“조금 더 여지를 줘야 했나?”

하지만 아쉬울 필요가 없다.

조금 애타는 마음은 있지만 이 역시 좋다.

뜨거운 홍차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식어 혀끝부터 적시는 홍차 또한 나름의 흥취가 있다.

더욱이 그것이 수십 년 만에 마시는 홍차라면 말이다.

테이블 위에는 귀축배달부 제3권이 보였다.

최근 루시 백작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동반자 같은 책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뭔가 노골적인 감정보다는 이 감상적인 여운에 잠겨 있고 싶다.

백작은 새로운 책을 꺼냈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텅 빈 책이다.

아마 이 책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비밀스러운 책이 되겠지.

두근거리던 그의 심장 박동을 떠올리며 오늘 있던 일을 일기 쓰듯이 적는다.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현실을 그대로 옮겨적은 글은 소설이라고 칭할 수 없다.

백작은 거기에 약간의 조미료와 다른 상황 전개를 집어넣었다.

견습마녀의 가정교사와 함께 밤낚시에 떠난 한 마녀.

뒤에서 낚싯대를 함께 잡아준 가정교사.

결국 예쁜 마녀의 유혹에 이기지 못한 가정교사는 와락 키스를 시도하고.

처음에는 새침하게 떨쳐내지만 결국 그의 혀를 받아들이는 마녀.

“흐음….”

백작은 쉴 새 없이 팔랑이며 움직이는 깃털과 함께 빠른 속도로 집필을 이어 나갔다.

만약 그가 이렇게 했더라면.

만약 그가 이렇게 나왔더라면.

을 기반으로 한 픽션.

아주 오래된 기억과 상상력에 기댈 때와는 또 달랐다.

정말 이 일이 있었던 것처럼 그저 글을 쓰고 있을 뿐임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하아….”

장갑을 벗은 백작의 하얀 손이 드레스 사이를 파고들고.

백작은 움찔거리는 몸을 앞으로 웅크린 채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다.

2.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각이었다.

디아나는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 비밀의 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일탈이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여전하다.

그 심정을 비유하자면….

어렸을 적 잠을 자는 척하다가 어머니 몰래 숨겨두었던 사탕 단지로 향할 때의 기분이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 같고, 아주 자그마한 죄책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기대가 앞서는.

그래서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인 문제로 넘어가는 은은한 긴장감이었다.

-끼이익!

조용히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책상 위에는 붉은 망토처럼 디아나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귀축배달부의 표지가 보였다.

“후우….”

어머니는 기억력이 굉장히 좋기 때문에 아주 조금의 방심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

책을 잘못 넘기면 생기는 구겨짐은 물론 책이 놓여있는 미묘한 각도 차이로도 이 비밀스러운 엿보기가 들킬 가능성이 있었다.

잠깐 벽에 붙어 주변 기척을 살피다 슬며시 책을 폈다.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눈으로 이전 줄거리를 훑고 최신장을 편 순간.

“어…?”

백지였다.

디아나가 소설을 묵히는 동안 어머니는 단 하루도 연재하지 않은 것이다.

디아나는 솜사탕을 물에 씻은 라쿤의 심정으로 멍하니 텅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하아….”

격렬한 하이킹과 다이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건만 아주 공치게 되다니.

그간의 기다림이 이렇게 끝날 줄이야.

허탈함에 의자에 몸을 기댄 디아나.

그런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살짝 열려있는 테이블의 서랍이었다.

비밀의 방을 꼼꼼히 뒤져보았을 때 이 서랍은 텅 비어있었는데 오늘따라 책 한 권이 보인다.

“…….”

내심 철렁했다.

지금까지는 당연하다시피 몰래 비밀의 방에 들어와서 몰랐는데.

새삼 어머니가 이 장소에 계속 드나든다는 것이 실감 났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서랍 안의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제목을 짓지 않은 것인지 아직 책장에는 어떤 금박 장식도 없었다.

-촤르륵!

책을 펼쳐보자 대략 30페이지 정도의 소설이 적혀 있었다.

특이하게도 1장과 2장이 없이 곧장 3장부터 넘어간다.

1장과 2장을 적을 여백은 비어있었고 말이다.

“언제 적으신 거지?”

3장의 제목은 ‘오리온자리 아래에서’.

아쉬운 대로 이것이라도 보려고 초장부터 읽기 시작한 디아나.

그녀의 눈이 띠용 커졌다.

심박수가 순식간에 200 언저리까지 치솟는다.

왜냐하면 책의 초반부에 묘사된 장소가 다름 아닌 오늘 낮 시우와 함께 낚시를 갔던 곳과 완벽하게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이게 뭐, 뭐, 뭐, 뭔일…?”

훌륭한 비브라토 발성으로 혼잣말을 뇌까린 디아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책을 읽어나갔다.

어찌나 커다란 충격을 받았는지 입술과 속눈썹도 바르르 떨린다.

일단 전체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견습마녀를 재워둔 마녀와 가정교사는 단둘이 밀회에 나선다.

어쩐지 벌써 누가 여자 주인공이고 누가 남자 주인공인지 알 것 같은 와중에 디아나의 독서는 쉼 없었다.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찰싹 달라붙은 남녀는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함께 낚시를 한다.

그 과정에서 마녀는 끝없이 남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마치 사랑받고 싶어 아양을 떠는 것처럼 말이다.

거듭되는 유혹의 손길에 마침내 극구 거부만을 거듭했던 가정교사가 움직인다.

마녀의 손 위로 겹쳐 잡았던 가정교사의 손이 은근슬쩍 몸을 파고들고,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될 비밀스러운 곳까지 침투한다.

숨겨왔던 욕정을 더는 참을 수 없던 두 남녀는 낚싯대를 내팽개치고 키스하며 춤추듯 근처 풀밭으로 향한다.

옷을 벗기고, 숨이 가빠질 때까지 입을 맞추고 알몸을 포갠다.

강물이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배경 삼아 몽환적으로 또 열정적으로 서로를 탐하고.

뜨거운 사정과 함께 마무리되는 정사.

디아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책을 덮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입가에 경련이 일어난 것은 확실했다.

“…….”

견습마녀의 가정교사.

완벽히 묘사된 밤의 래빗 강.

연어 낚시를 설명하는 과정과 남자의 성격.

바보 천치를 이 자리에 앉혀놔도 이 소설이 어떤 것을 모티브로 삼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게 정말 ‘소설’이긴 한 걸까?

상상력이 가미 되었다기에 가정교사가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디아나의 이미지와 합치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거기에서 드문드문 묘사되는 자홍빛 눈동자라던가, 잿빛 은발이라던가 하는 묘사도 빼도 박도 못하고 어머니 그 자체였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억측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글 속에 묘사된 세밀한 포인트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야 지어내기 힘든 디테일이 숨어 있었다.

엄마가 집필한 귀축배달부나 여타 관능소설에 나오는 마녀도 어느 정도는 본인을 투영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엄연히 어머니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창조된 캐릭터였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엄마는 평소 대사를 적게 넣고 심리묘사에 치중한 집필 스타일이다.

하지만 이번 글은 마치 대화록을 작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대사 분량이 많다.

더군다나 말투, 말버릇, 이해하기 어려운 농담까지 서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이어 디아나는 합당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은 절대로 소설이 아니다.

수업이 끝난 이후 시우는 어머니에게 개인교습을 받는다.

이후 어머니가 먼저 시우에게 밤낚시를 제안했고 함께 밀회를 나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유혹한 끝에 풀밭 위에 옷을 깔고 질펀한 사랑을 나눴다.

그것도.

바로.

오늘 밤에.

지금은 새벽 2시 정도.

신시우의 개인교습이 9시쯤 시작하니 시간적으로도 얼추 들어맞는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랑을 나눈 뒤 이 비밀 서고로 돌아와 그것을 기록한 것.

이 책에 적힌 글은 소설 따위가 아니라 오늘 있던 일을 그대로 기록한 자전적 수필이었던 것이다.

“아….”

설마 이런 관계였을 줄이야.

그제야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항상 남자를 피하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뜬금없이 남자 가정교사를 디아나에게 붙여준 이유.

마음에 드는 남자라 옆에 두고 싶었기 때문.

하필이면 매일 밤 개인 서고에서 수업을 진행한 이유.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

단순히 소설 속 인물 간의 성교와 실제 성교는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달랐다.

얼굴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짐승처럼 박아대고 박히는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매스꺼울 지경이었다.

배신감, 실망감.

그런 와중에 어머니를 이해하려는 마음.

불결함.

위험한 호기심.

그리고….

단순히 소설일 때보다 훨씬 확연하게 떠오르는 남자의 몸.

즉, 신시우의 몸.

그 모든 것이 곤죽처럼 머릿속에 맴도는 탓에 디아나는 비틀비틀 비밀의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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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도시 응애시절

EP.364 #78_야외활동(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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