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59화 (359/917)

#359

1.

디아나를 낚은 연어는 괘씸죄로 저택 주방의 쉐프에게 연행되고 제 몸을 풀코스로 헌납하며 그 죄를 치렀다.

처음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받아 루시 백작과 디아나와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시우가 조미료를 친 우당탕탕 디아나의 연어 포획기에 연신 웃음을 짓던 백작.

화기애애한 식사 끝에 마지막 일과.

백작과의 오붓한 개인과외 시간이 찾아왔다.

“시우 씨, 에스코트 부탁드릴게요.”

함께 식당을 나와 개인 서고로 향하는 길 백작은 흰 장갑을 낀 손을 손등이 보이도록 건넸다.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백작과의 해프닝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불미스러운 사고는 다시 없게 하려고 다짐했는데 꼭 손을 잡아야 할지 고민된다.

하지만 모처럼 관대히 넘어가 준 백작에게 그 일을 의식하는 모습을 내비치는 것만으로 실례다.

그렇게 판단한 시우는 그녀의 손을 손바닥에 얹듯 붙잡고 개인 서고로 향했다.

“영광입니다.”

꽤 예스러운 복도 때문인지.

아니면 적당히 술이 올라 발개진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차분한 백작의 걸음걸이 때문인지.

정말로 귀족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시우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기사님 같네요. 시우 씨는.”

“그런가요?”

“네, 정말 듬직한 기사님에게 에스코트 받는 느낌이에요.”

“아마 키가 커서 그런가 봅니다.”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도착한 백작의 개인서고.

해가 저물며 식어있던 공기가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길에 의해 데워진다.

항상 공부하던 소파에 앉자 그 맞은 편에 백작이 앉았다.

“디아나를 잘 데리고 놀아줬으니 저도 보상해야겠죠.”

“오늘 수업도 잘 부탁드릴게요.”

혹시 어젯밤의 일로 놀리려나 했지만, 다행히 별 태클 없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냐…라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다.

“흐음, 그림자 쪽보다는 리본을 매개로 붉은가지를 통제하실 예정인 거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그림자 쪽은 부정형 마법이라 역장의 영향을 크게 받아서요.”

태연하게 답변하는 한편.

시우의 시선이 힐끗 백작을 향한다.

어제 루시 백작은 등이 훤하게 파여있는 파티 드레스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등이 조신하게 가려진 드레스는 대신 가슴골을 훤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냥저냥 조금 파였다 수준이 아니었다.

명치까지 내려온 과감한 슬릿은 백작의 볼륨 있는 윗가슴, 옆가슴은 물론 밑가슴도 일부 드러내고 있었다.

옷깃을 잡고 살짝만 넘기면 훌러덩 벗길 수 있을 정도로 가드가 낮은 옷인 것이다.

식사 시간에는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구대 3개는 이어 붙인 듯한 길이의 테이블 탓에 시우와 백작은 멀찍이 마주 보고 있었다.

조명도 환했고 옆에는 디아나까지 있었다.

새삼 그녀의 의상을 의식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산만한 분위기였는데….

“어디 볼까요? 흐으음….”

백작은 귀 뒤로 잔머리를 쓱 넘기며 시우의 앞에 놓여있던 종이에 손을 뻗었다.

무거워진 꽃망울처럼 기울어지는 상체와 자연스럽게 시선을 잡아끄는 풍요와 모성의 골짜기.

생크림처럼 달달한 체취가 산뜻한 향수 향기와 함께 풍겼다.

이곳은 단둘이다.

게다가 촛불과 벽난로라는 특성상 괜스레 로맨틱한 분위기.

거기에 공연히 입술을 핥는 백작의 혀가 선명히 보이는 가까운 거리.

의식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극한의 상황이었다.

“발상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실전성이 있는지는 직접 왜곡장에 대입을 해봐야 알 수 있겠네요.”

조금만 옷이 흐트러지면 보이면 안 될 곳이 보일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평소에도 가볍고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다니는 것은 알겠는데.

이 정도면 일부러 보여주는 수준이다.

혹시 정말로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것은 아닐까?

시우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시선을 가까스로 돌렸다.

“그럼, 어제 시우 씨가 봤던 것을 바탕으로 재구성해보는 거예요.”

그런 시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백작은 태연하게 수업을 이어 나갔다.

2.

“혹시 한 번 본 걸로는 부족한가요?”

“네?”

“심상 풍경 말이에요.”

“아니,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몇 번 정도는 더 해드릴 수 있는데. 어제 사고 때문에 신경 쓰시는 거라면 괜찮답니다.”

사실 루시 백작은 은근히 시우를 떠보는 중이었다.

백작은 스스로의 외모가 빼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완숙하고도 굴곡진 몸매도 기품있는 얼굴도 자신 있게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준이다.

하지만 그저 혼자 알고 있는 것과 상대의 반응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달랐다.

백작이 은근슬쩍 노출한 가슴 골을 힐끗거리는 시우의 시선.

꿀꺽꿀꺽 침을 삼키는 볼록 튀어나온 목울대.

멋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이는 순진하고 귀여운 모습은.

마녀나 귀족 또는 디아나의 어머니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루시 예소드의 자존감을 채워주었다.

은근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뒤따른 건 당연한 일이다.

“어머나, 그런데 오늘은 복장이 좀 부적절하네요. 이 옷은 등이 전혀 파여 있지 않으니까….”

백작은 쓱 미소를 지으며 드레스의 어깨끈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살짝만 옆으로 밀어주면 훌러덩 벗겨지며 윗옷이 벗겨지겠지.

“…이렇게 해야겠는걸요? 그렇죠?”

정말 할 생각은 없었다.

외간 남자에게 함부로 몸을 보이는 것은 정숙지 못한 행동이며 귀족의 소양에도 어긋난다.

다만 어제처럼 극적인 그의 반응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 괜찮습니다! 백작님! 진정하시고 천천히 손 떼세요.”

무릎에 펄펄 끓는 차라도 끼얹어진 것처럼 벌떡 일어서며 만류하는 시우.

어쩜 예상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반응에 백작은 꾸욱 웃음을 삼켰다.

“굳이 심상 공유가 필요 없다면 수업은 여기서 끝이네요. 아쉬운걸요?”

“후우….”

“시우 씨는 아쉽지 않나요?”

“조금 더 배우고 싶은 건 아쉽지만 백작님이 그… 벗지 않으셔서 아쉬운 건 아닙니다.”

이제는 백작이 놀릴 꼬투리까지 원천 차단하며 말을 하는 모습에 체통도 잊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을 뻔했다.

백작은 대규모 사업을 이끄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만나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오다 보면 사람의 눈빛이나 말투만으로도 어느 정도 인성을 판가름할 수 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흘 넘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한 이상 얼추 견적이 나왔다.

백작이 판단하길 그는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디아나가 은근히 잘 따르는 것도 그렇고 말투나 행동거지 그리고 눈빛에서 특유의 질척한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음심을 품을 법도 한데 말이다.

“시우 씨.”

“네.”

“수업 끝나고 일정이나 약속이 있나요?”

흔들리는 동공.

딱 봐도 동요하는 티가 나는 게 이 남자를 놀리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괜스레 옷을 만지작거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그, 혹시 바쁘신 게 아니라면…. 시간을 조금 내어줄 수 있을까요?”

“우선 들어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예상대로 신중한 응대에 루시는 말했다.

“저도 낚시에 데려가 줄래요?”

“…지금요?”

“네, 오늘 저녁 시우 씨 말을 들어보니 퍽 즐거운 것 같아서요.”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3.

디아나는 잠자리를 뒤척이고 있었다.

시우에게 끌려가 밖에서 돌아다닌 탓에 심신이 무척 고단한데도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와 함께 낚시를 갔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흠….”

전체적으로만 보자면 그저 귀찮고 힘들었다.

굳이 포탈을 타고 이런 숲길까지 거치면서 낚시를 해야 하나 싶었다.

갑작스러운 사고가 발생해 이 추운 겨울날에 강물에 다이빙하는 느닷없는 경험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쁜 기억만 남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신선했고 새로웠다.

아주 오랜 기다림과 시행착오 끝에 왔던 손맛.

입질 순간에 느껴졌던 강인한 생명력과 퍼덕임은 아직까지 손끝에 걸려 있는 듯했다.

비록 그 끝은 낚싯대를 너무 꽉 잡은 바람에 연어에게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는 우스꽝스러운 엔딩이었지만 말이다.

남자는 모두 늑대다.

마녀가 되지 못하는, 필멸이 예정된 열등한 존재이다.

남자를 대할 때는 이용당하지 않게 항상 조심해야 한다.

어머니가 항상 강조해 가르쳤던 말들.

그렇게 생겨난 색안경은 시우를 바라볼 때도 디아나의 눈 위에 씌어 있었다.

마법을 쓸 수 있다고 해도, 역사상 최초의 남자 마녀라고 해도, 위치보드를 열받을 정도로 잘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자리 바꿔요. 그쪽이 자리가 좋아서 잘 잡히는 것 같으니까.’

‘제가 외부 활동하기로 해서 나온 거잖아요. 저도 신경 써주세요.’

‘이제 돌아가요. 두 시간 넘게 지났어요.’

돌이켜 보자면 그는 심술부리기만 하는 디아나에게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분명히 빈정 상해서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 대사도 자주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디아나는 백작가의 견습마녀이고 그는 일개 마녀이다.

더군다나 디아나의 가정교사를 맡는 것을 대가로 어머니의 수업까지 약속받은 상황.

그걸 당연시하진 않지만, 디아나가 투정 부려도 찍소리 못할 상대이긴 했다.

하지만 입장 차이를 고려해도 사람이 감정을 감출 때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그는 진심으로 디아나의 태도를 문제 삼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 좋아 보이는 쓴웃음이나 지으며 넘길 뿐.

분명히 홧김에 저지른 버릇 없던 행동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가서 자랑하셔야죠.’

화를 내기는 커녕 자신이 잡은 고기를 선뜻 내어주고 디아나가 자랑하게 해주었다.

그때 느꼈다.

그는 별것 아닐지라도 남의 사정을 헤아려주는 섬세함이 몸에 배듯이 나오는 사람이라고.

이것이 디아나가 새삼스레 자신의 색안경을 다시 점검하게 된 계기였다.

“어쩌면 그때도….”

당시에는 그저 열이 뻗치기만 했던.

그리고 아직까지 그 남자를 곱게만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그 접대 게임도.

나름 그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물론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굴욕스러운 배려였지만 말이다.

“휴우….”

복잡했다.

알고 있던 것들이 마구 뒤틀려 나가는 기분이다.

남자란 위험하고 미천한 존재라고 강요하길 거듭했던 어머니는 실은 그런 남자에게 정복당하는 마녀가 나오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디아나가 흰 눈으로만 흘겨봤던 남자 마녀 신시우는 어머니께 듣던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음….”

남의 사정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근질거렸다.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고 혼자 뇌까렸을 뿐인데도 눈에 빤히 보이는 아부를 할 때처럼 오돌토돌 닭살이 돋았다.

“으으….”

디아나는 휘휘 고개를 저어 잡념을 떨쳐냈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비밀 서고에 발을 들이지 않은 것도 며칠이 지났다.

집필된 마지막 부분까지 보았으니 이제 뒷이야기도 나왔겠지.

견습마녀가 잠든 틈을 타 바로 옆에서 천인공노한 행위를 하는 배달부와 마녀.

견습마녀가 뒤척이는 장면에서 끝이 났었는데 과연 어떻게 스토리가 진행됐을지.

“…….”

디아나는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교양과는 동떨어진 음란 서적이니 멀리해야 옳다.

더군다나 어머니의 비밀스러운 취미를 파헤치는 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막장드라마처럼 다음이 궁금해지는 대환장 스토리와 처음으로 알게 된 남녀관계에 대한 호기심은 디아나를 충동하기 충분했다.

지금쯤이면 어머니도 잠들었을 시간이다.

디아나는 슬리퍼와 담요를 챙겨 들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EP.362 #78_야외활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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