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57화 (357/917)

#357

1.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이론으로 접하고 설명을 듣는 것도 새로운 지식을 간접 흡수하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눈과 감각에 직접 때려 박는 직관적인 경험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있었다.

백작이 심상을 공유해주자마자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두루뭉술한 개념으로 그쳤던 요소가 새로이 재정립된다.

“아….”

모호했던 개념을 명료하게.

불분명한 체계를 분명하게.

흐릿했던 기준을 선명하게.

부족했던 퍼즐 한 조각이 손에 쥐어졌다.

그저 ‘인지’하는 것만으로 폭발하는 마법관의 확장.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루시 예소드가 바라보는 세상과 시우의 풍경이 겹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뇌가 진동하는 기분이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오른 ‘깨달음’의 전율이 사지의 감각마저 뿌옇게 변모시켰다.

“흐읏….”

뿌리가 뻗어나가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팽창하는 시우의 사고를 제지한 것은.

다름 아닌 품에 안겨있는 백작의 야릇한 한숨이었다.

그것을 기점으로 사고의 채널이 전환되는 것처럼 의식이 뒤바뀌었다.

백작의 맨살과 맞닿지 않은 부분에서 겨울밤 벽난로에 데워지지 못한 찬 공기가.

발밑에서 체중을 지탱해주는 딱딱한 바닥이 느껴진다.

그와는 정반대로 가슴에 맞닿은 백작의 따뜻한 온기가.

저도 모르게 와락 움켜쥔 가녀리고도 달콤해 보이는 여체에서 황홀한 부드러움도 느껴진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전율과 그로 인한 현기증 탓이었을까?

그저 위로 껴안는 수준이던 두 팔이 와락 루시 백작의 허리와 가슴 위를 휘감고 있다.

“…어.”

그리고 가장 곤란하게도.

어느새 혈액이 몰려 단단해진 물건이 더욱 확실하게 엉덩이 사이에 파묻혀 있다.

물론 시우가 아무리 연구자 체질이라고 해도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해서 성적흥분을 느끼는 변태는 아니었다.

이건 어느새 입으로 호흡하는 것을 잊은 시우가 한두 번인가 백작의 체취를 들이마시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식었다.

아무래도 이건 선을 넘은 것 같다.

백작이 시우와 밀착을 허가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심상을 보여주기 위함.

그렇다면 이 파렴치한 하반신과 두 팔에 대해 어떤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죄, 죄송합니다!”

시우는 불타는 죽부인이라도 끌어안고 있던 것처럼 다급히 백작의 몸을 놓아주었다.

다행히 충격이 큰 탓인지 체취를 깊게 들이마시지 않은 건지 성적 충동은 크지 않다.

크게 두어 걸음 물러서 허둥지둥거리고 있자니 백작이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빨갛네요.”

“그, 믿기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의도한 건 결단코 아닙니다. 더군다나 백작님의….”

“괜찮아요. 저희가 어린아이도 아니잖아요.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인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피식 웃음을 지은 백작은 시우가 거칠게 끌어안은 통에 흐트러진 어깨끈을 고쳐매었다.

그 작은 몸동작조차 요염하기 그지없다.

“시우 씨는 아주 잘생겨서 여자 경험이 풍부할 줄 알았는데. 순박하시네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단순한 해프닝 취급해주니 이보다 감사할 수 없다.

“어머, 희롱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입으로 손을 가리며 가볍게 놀라는 시늉을 하는 루시 백작.

그 뒤로는 살짝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니지, 시우 씨도 저한테 나쁜 장난을 치려고 했으니 쌤쌤이네요. 사과는 없던 것으로 칠게요.”

“정말,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모솔아다 시절도 아니고 백허그 정도로 이렇게 절절맬 건 없다.

문제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자에게.

그것도 백작에게.

그것도 시우에게 도움을 주려고 다소 남사스러운 행위까지 허가한 사람에게 불방망이를 들이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뭘 느꼈나요?”

그런 시우의 곤란함을 덜어주겠다는 듯 백작은 소파에 다시 앉으며 물었다.

방금 봤던 풍경.

그 장엄함을 표현하려 했는데….

“제 엉덩이의 감촉 말고요.”

“…죄송합니다.”

그녀의 장난은 끝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당황한 시우와 그 모습을 보고 놀리는 백작.

역장 마법에 대한 감상을 털어놓고 수업이 끝나기까지 평소의 2배나 되는 시간이 걸렸음은 당연한 일이다.

2.

“오늘도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있던 불미스러운 일은…. 잊어주십사 하고….”

“글쎄요? 하는 행동 봐서 그렇게 하겠어요.”

마지막까지 놀림을 받고 떠난 시우.

실로 정중하게 허리를 90도로 숙인 뒤 방문을 나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본 백작은.

“푸후우….”

기나긴 한숨을 쉬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무색하게 변하는 뜨거운 한숨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네.”

백작은 반쯤은 자조 섞인 쓴웃음을 지었다.

심심하기 짝이 없는 마녀들의 최고의 친구, 브랜디와 온더록스 잔을 찬장에서 꺼냈다.

사실 심상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손을 꽉 잡는 수준의 신체 접촉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예소드는 구태여 그의 상의를 벗기고 그 품에 등을 맞대었다.

이유라면 구질구질하게 변명할 것도 없다.

전에 만졌던 그 단단한 근육과 복근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다 큰 어른끼리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뜨거운 고동이었다.

아직도 맞닿았던 등짝이 쿵쾅거리는 심박과 체온으로 불타는 듯하다.

“게다가….”

루시가 팔을 잡아당겨 밀착했을 때 그녀의 엉덩이 사이에 턱 하니 놓이던 그건….

드레스, 팬티, 다시 팬티, 양복바지라는 차폐막이 있긴 했지만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순간 백작도 깜짝 놀랄 정도로 묵직함을 자랑하는 페니스였다.

언제나 정중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주위를 매료시키는 주제에 그런 흉악한 걸 숨기고 있었다니.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고에 불과했고, 반쯤은 백작이 유도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진짜 탄탄하네’, ‘진짜 크네’ 같은 단락적인 감상의 나열일 뿐.

그러나 해프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백작이 심상을 공유해 줄 때, 그러니까 공유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별안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양 두꺼운 팔로 허리를 꽉 껴안는다.

다른 한쪽 팔을 가슴 아래 떠받치듯 끼워 넣으며 더더욱 도망칠 수 없게 백작의 몸을 더듬는다.

그리고 시작된 엉덩이를 꾹꾹 누르는 압박감.

그건 페니스라 하기엔 너무나 컸다.

엄청나게 크고, 두껍고, 무겁고, 그리고 딱딱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철괴였다.

말랑할 때도 예상은 했었지만 그 영롱한 실체를 실감한 백작은 저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옷을 벗는다면 곧장 유사성행위가 되는 음란한 접촉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그가 재빨리 떨어져 주지 않았다면….

“아니지.”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가볍게 일선을 넘진 않았을 것이다.

루시 백작은 서고 한편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안에 있는 것은 여신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완벽한 미모의 마녀다.

시우는 떨어지자마자 백작에게 사과했다.

그렇다면 그 일련의 행위는 시우가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행했다는 일.

예소드 백작이 놀리자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다시 한번 미소가 나왔다.

“훗, 귀엽기는.”

선입견이지만 워낙에 반반한 얼굴 탓에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니는 남자인 줄이나 알았는데.

보기와는 달리 숙맥인 모양이다.

그런 숙맥조차 저도 모르게 팔을 뻗게 하는 것이 이 몸의 매력이라는 것 아닌가?

“나도 참. 너무 치명적이어서 탈이라니까.”

벌크업 된 자신감을 뽐내며 예소드 백작은 다시 한번 그녀의 몸을 옭아맸던 탄탄하고 건강한 육체를 회상했다.

백작은 책장 위의 조각상을 만져 비밀의 방으로 향하는 통로를 열었다.

오늘은 영감이 충만한 날이다.

이 기분을 남김없이 하얀 지면 위에 쏟아내고 싶었다.

3.

예정대로 디아나는 시우와의 약속을 지켰다.

어제 하루 약 4시간가량 위치보드 피드백을 받고 오늘은 야외활동을 위해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

행여 고집을 부릴 때를 대비해서 여러가지 수단을 마련해 나왔는데 의외로 순순히 쫄레쫄레 따라오기에 놀랐다.

“아직 멀었어요?”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이쯤이면 좋겠네요.”

흰 양산을 들고 외출 채비를 갖춘 디아나는 영애라는 말이 무척 어울릴 정도로 화사했다.

11월에 무슨 양산이냐 싶긴 한데 그게 모녀의 뽀얀 피부의 비결일지도 모르지.

시우가 피크닉 장소로 꼽은 곳은 레노먼드 타운과 보더 타운을 길게 가로지르는 래빗 강 하류.

우거진 단풍나무 구릉 사이로 도도히 흐르는 예쁜 강이었다.

카펫처럼 깔린 낙엽,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산들바람, 쾌청한 하늘과 햇볕 아래 비늘처럼 부서지는 연옥빛 수면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쾌한 기분이 들건만 디아나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가시죠.”

여기는 어떤 타운에도 속하지 않은 무인지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길인만큼 험하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강가로 에스코트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휘휘 젓고 경사진 구릉 면을 통통 튀어내려 갔다.

달팽이처럼 커다란 배낭과 그 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긴 낚싯대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늘 여기까지 디아나를 데려온 것을 낚시를 하기 위함이었다.

디아나를 데리고 다짜고짜 스포티한 야외활동을 하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낚시를 하는 편이 좀 더 활동을 유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어젯밤 보더 타운의 접선소에서 낚시 장비도 사 오고 장소도 세심하게 고려했다.

비단 예소드 백작에게 가르침을 계속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어진 일은 꼼꼼히 처리하는 편이 좋지 않은가?

디아나가 멀뚱히 서 있는 동안 간이 의자를 설치한 시우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여기가 그렇게 물 반 고기 반이라네요. 오늘은 예상하셨겠지만 즐거운 낚시 시간입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데 45분이나 걸렸어요. 돌아가는 시간까지 고려해서 딱 삼십 분만 할 거예요.”

“네, 그럼 우선 후딱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할 낚시는 루어 낚시.

시우가 한창 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친구를 따라가 서너 번 해봤던 경험이 있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디아나에게 나름대로 설명을 해주었다.

“추 무게는 제가 맞춰 놨습니다. 이렇게 이 부분을 잡고 낚싯바늘을 던진 다음에 물살에 맞춰서 흘리다가 마지막에 챔질하는 거죠.”

하류인 만큼 중심부로 가지 않으면 물이 얕아서 종아리가 잠길 때까지 물 안까지 걸어 들어간다.

낚싯대의 구조를 비롯해 잡는 법까지 성실히 설명을 듣던 디아나는 바지를 걷고 첨벙첨벙 물에 들어가는 시우를 보고 기겁했다.

“잠깐, 안까지 들어가야 해요?”

“네, 생각보다 주변 수심이 얕아서 강바닥에 계속 걸릴 것 같네요.”

디아나는 정말 싫은 표정으로 강물을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차갑다.

신발까지 벗고 안에 들어간다면 더 차가울 것이다.

“안 해요. 이런 말 없었잖아요.”

“원래 돌 같은 거라도 있으면 그걸 딛고 올라서서 하는데…. 여긴 하나도 없네요.”

“이 날씨에 강물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전 구경만 할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말한 디아나는 시우가 설치해준 간이 의자에 털썩 앉고 팔짱을 꼈다.

어지간하면 설득을 해보려 했지만 제한 시간은 고작 30분.

사전 조사가 부족했던 것은 시우이니 마땅히 할 말도 없었다.

“흠…. 아쉽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우는 내심 낙담하며 흐르는 강물 위로 찌를 던졌다.

EP.360 #78_야외활동(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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