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
1.
루시 예소드 백작은 디아나와는 별개의 인종이었다.
현세의 사업으로 처리해야 할 산더미 같은 안건을 일필휘지로 처리하면서도 마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마법 연구에 몰두한다.
마녀들과 적당한 교분을 쌓으며 취미생활을 즐기고 틈만 나면 게헨나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6시에 일어나 2시에 잠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부지런한 마녀인 것이다.
심지어 최근은 정기적으로 취해주는 수면까지 없애 버렸다.
디아나의 가정교사인 신시우를 지도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도 시간 맞춰 오려나….”
백작은 턱을 괴고 노크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게헨나 최초의 남자 마녀.
그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루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확실히 ‘최초’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은 매혹적이다.
관측되지 않은.
미지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숨김.
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최초의 남자 마녀라함은 그 성취가 고작 ‘일 대’에 불과하는 것 또한 내포하고 있다.
지난 수천 년 간 대를 이어 쌓아온 예소드의 자성마법에는 하등 도움이 될 것 없다고 여겼다.
20 위계 이상의 대마녀들이 그의 ‘마법적 가치’에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흐음, 참 대단하단 말이지….”
백작은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인 종이 다발을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나흘간의 함께 공부한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학습일지였다.
‘그를 마법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느냐?’라는 질문에 백작의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여실히 부족하다’ 이다.
그에게 이런저런 실험을 하는 것은 자성마법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다.
이미 예소드 가는 그 정도 고지에 올라가 있다.
그와는 별개로 루시 백작이 그에게 주목하는 것은 그의 학습 능력 자체였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부한 기간을 여쭤도 괜찮을까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한두 달쯤 되었을 겁니다.’
‘한두 달…?’
그는 제 입을 빌어 본격적인 역장 마법 공부를 시작한 것이 한 두 달 정도라 말했다.
그것도 여느 마녀가 폐관 수련 하듯 연구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일을 돕고 적당히 놀며 말이다.
처음에는 반쯤 허풍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과 연산 능력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리고 테스트에 훌륭한 답변을 제출했더라도.
뭐든 한계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신동이라 치켜 세워지는 꼬마 음악가들도 오랜 경험을 쌓은 거장의 앞에서는 재롱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니 말이다.
그를 가르치는 사흘 동안 백작이 느꼈다.
경험조차 거스르는 재능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는 무서운 속도로 게걸스럽게 루시가 제시하는 문제를 풀어나갔다.
길을 잃고 헤맬 때 아주 사소한 힌트만 준다면 즉각 방향을 잡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파한다.
난해하기 짝이 없는 역장 마법이라는 미로를 요리조리, 때로는 벽을 부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 결과 붉은가지를 통제하기 위한 ‘애드온’.
거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역장 이론들을 그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체화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문득 호기심이 든다.
“시우 씨라면… 어떤 역장 마법을 보여줄까요?”
자성마법과 자성마법이 융합되면 변모하는 것은 필연.
아마도 기존 예소드의 역장 마법과는 사뭇 다른 결과물이 나오겠지.
또 거기까지에 다다르는 과정에서 어쩌면 마법적 영감을 선물해 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백작이 그와의 개인 과외를 내심 기다리게 된 이유였다.
“또 그 외에도….”
“실례하겠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들어오세요.”
백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거울로 재빠르게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시우를 들였다.
동시에 문이 열리며 마음에 쏙 드는 옷차림을 한 시우가 들어온다.
첫날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새 친근함을 느끼는 것인지 요새는 표정이 퍽 밝았다.
시우의 표정을 보는 백작의 얼굴에도 살풋한 미소가 서린다.
이것이 백작이 과외 시간을 기다리는 두 번째 이유.
미남을 옆에 두고 보는 일은 절대 지겨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간질간질한 감각을 느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그를 보고 있으면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다시 떠오른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디아나는 어땠나요?”
“내일부터는 조금 본격적으로 야외에 모셔 볼 예정입니다. 어떻게 잘 성사돼서요.”
“벌써요? 꽤나 진도가 빠르네요.”
“이런 걸 진도…라고 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쓴웃음을 짓고 착석한 시우를 상대로 백작은 수업을 이어 나갔다.
오늘은 이론 정리를 마무리하고 들어간 실전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론적인 정립은 거의 완료되었다고 봐요. 시우 씨가 하려는 건 가장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피라미드를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블록만을 사용해 ‘애드온’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수업이 한 시간 정도 경과했을 때.
시우는 처음으로 난색을 표했다.
“여전히 감을 잘 못 잡겠네요….”
확실히 이론과 실전은 달랐다.
어떤 것이든 손쉽게 해결하던 시우조차 주춤할 정도로 말이다.
“조바심 가질 필요 없어요. 이제 겨우 나흘째인걸요. 시우 씨는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답니다.”
역장은 특히나 관념적이고 두루뭉술한 마법이다.
머릿속으로 구체화한 역장의 이미지와 현실에서 계산상으로 만들어 낸 마법식.
이 둘의 부조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일렁이는 수면 아래의 물건을 보고 정물화를 정확하게 그려내야 하는 느낌이랄까?
“역장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이론과 실전을 연결하는 부분이 가장 어려워요.”
백작은 빤히 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루시 역시 한번은 거쳐온 길이었기에 그의 고충을 이해하고 있다.
이를 가장 빠르게 타파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고 말이다.
“그러지 말고… 흠….”
문제는 이걸 해도 되느냐인데….
아주 오랜 옛날 사랑하던 연인을 먼저 떠나보낸 뒤 백작은 마법과 사업에 몰두했다.
피할 수 없는 이별에 괴로워하는 것보다 남은 삶을 행복하게 보내는 것에 주력했다.
주저앉아 울기만 해서야 무엇이 해결되겠는가?
그저 소중한 추억으로 품고 살아가면 될 뿐.
다만 마음속 한 구석에는 그이에 대한 추모 공간을 만들어 둔 채 그 어떤 남자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학계를 발칵 뒤집은 논문도 완성했다.
갓난아기였던 디아나 역시 보란 듯 훌륭한 견습마녀로 키워냈다.
이 정도면 의리를 지켰다고 생각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오던 삶도 막바지에 이르고.
떠오르는 것은 아주 작은 외로움.
이미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백작은 홀로 관능 소설을 집필하는 것으로 그 욕구를 지워갔다.
그것도 십수 년 동안 말이다.
그렇다면 아주 조금.
욕심을 부리는 것 정도는 상관없지 않을까?
아주 조금의 사심만을 채우는 거라면 말이다.
“신시우 씨.”
2.
루시 예소드 백작이 말하기를.
역장의 구체화는 원체 상당히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좋은 방법이 있답니다. 바로 심상의 풍경을 공유하는 것이죠.”
“아.”
일전에도 경험이 있었다.
샤론에게 처음 원소계통에 대한 수업을 들을 때 깍지 손을 끼고 샤론이 보는 풍경을 바라보았던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이후로 원소 마법을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는 건 두말할 것 없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보겠어요?”
“네? 일어나야 하는 건가요?”
“네, 가만히 있어 보세요.”
손을 잡기만 하면 될 텐데 굳이 일어날 것까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일어난 백작은 시우의 셔츠 단추 하나하나를 풀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풀려나간 앞섶.
훤하게 벌어진 셔츠 사이로 찬바람이 술술 들어왔다.
“백작님?”
“괜찮아요,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요.”
조금 당황해 백작의 얼굴을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다.
굉장히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이것은 마법 공부의 일환.
뭐, 심상 공유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보장은 없다.
“잠깐 이쪽으로 나와 보겠어요?”
단추를 전부 푼 백작은 시우를 소파 옆에 세웠다.
그리고 우아한 백조처럼 사뿐사뿐 앞으로 걸어와 뒤를 돈다.
시우는 헉소리가 나오려는 것을 꾹 억눌러야 했다.
방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얼굴만 마주해서 몰랐는데, 예소드 백작이 입고 있는 드레스는 훤하게 드러난 오픈백 드레스였던 것이다.
그냥저냥 슬쩍 비치는 그런 부류의 옷이 아니다.
조금만 어깨끈이 느슨해져도 엉덩이골이 보일 것 같은 파격적인 노출이었다.
단정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그 탓에 드러난 가느다란 목덜미부터 완벽한 비율과 균형을 자랑하는 화사한 등과 허리.
찰싹 달라붙은 치맛자락 탓에 도드라지는 여성스러운 골반선.
그런 노출에도 그녀의 뒤태가 전혀 천박해 보이지 않는 것은 백작이 자연스레 두르고 있는 원숙한 아름다움 탓이겠지.
도리어 예술 작품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심상의 공유를 위해서는 신체의 밀착이 중요해요.”
이쪽의 셔츠 앞을 풀고 설원처럼 드러난 등을 보인다라….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뒤에서 껴안으라는 말이다.
“부끄럽나요? 마법을 위한 일인데?”
머뭇거리는 시우에게 어깨너머로 슬쩍 시선을 던진 백작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건 둘째치더라도 상당히 부담스럽다.
이런 야심한 밤에, 단둘이, 맨살끼리 접촉, 백허그.
뭔가 야리꾸리한 단어들이 소시지처럼 엮여있지 않은가?
“…접촉이 필요한 거라면 그냥 손만 잡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따라서 물었다.
괜히 덥썩 안았다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파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마녀처럼 유혹하는 건가? 라는 생각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희 가문에서는 이렇게 한답니다.”
“아하….”
당연하다는 듯 들려오는 대답에 마지막 의심이 희석될 무렵.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고민에 백작이 쐐기를 박았다.
“절 부끄럽게 할 셈인가요? 모처럼의 호의였는데.”
“그럴 리가요.”
정신 차리자.
여긴 호스트바가 아니다.
예소드 백작은 시우의 특이함에만 정신 팔려 동침을 요구하던 막무가내 마녀도 아니고 말이다.
그녀는 마녀 중에서도 최상위 계층.
단 일곱 명의 백작 위이다.
그런 백작이 심상 풍경을 보여준다는 것을 구실로 신체접촉을 유도한다고 억측하는 것부터가 자의식 과잉이었다.
아무래도 하도 시달리다 보니 이런 망상까지 하게 된 모양이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차라리 감사하다고 하셔요.”
뻣뻣하게 팔을 벌려 백작을 안았다.
그녀는 힐을 신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키 차이는 머리 반 개 정도.
행여 머리카락의 체취를 들이마시지 않기 위해 입으로만 숨을 쉬며 슬며시 끌어안았다.
“아….”
선선한 공기 속 휑한 셔츠 사이로 끌어안은 백작의 몸은 놀랄 만큼이나 따뜻했다.
밍크 숄보다도 부드러운 살결.
살짝 높게 느껴지는 체온과 가슴에서 선명하게 느껴지는 고동.
어쩐지 에로틱한 상황에 굳어있는 시우의 팔을 백작은 슬며시 앞으로 잡아당겼다.
“조금 더 붙어야죠.”
“억!”
가슴만 애매하게 붙어있던 시우의 몸이 백작의 등에 밀착한다.
팔뚝에서는 노브라임이 분명한 모성의 상징이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서 추가로 문제가 발생했다면 여자의 몸은 남자와는 달리 앞뒤로도 유연한 굴곡이 존재한다는 것.
시우의 복부와 백작의 등허리가 밀착하면서 그녀의 엉덩이골 사이에 시우의 구렁이가 주차되었다는 것이다.
“…….”
평상시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자랑하는 시우의 물건이 말랑하고 부드러운 엉덩이가 느껴질 정도로 밀착했다면 반대로 백작도 눈치를 챌 터.
“어머….”
분명히 들렸다.
깜짝 놀란 듯한 백작의 탄성이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재빨리 허리를 뒤로 빼고 그녀에게서 벗어나려던 때.
시우를 잡고 있던 루시의 손이 더욱 단단히 팔목을 붙잡아왔다.
“괜찮아요. 지금부터 집중하세요.”
결국 어떻게든 타협을 봐 엉덩이만 뒤로 슬쩍 빼는 꼴사나운 모습을 취한 시우는 백작에게 심상 풍경을 공유받았다.
EP.359 #78_야외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