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55화 (355/917)

#355

1.

“애들아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시간 괜찮니?”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난 뒤.

샤론은 쌍둥이에게 말했다.

“네, 시간은 있어요.”

“무슨 이야기요?”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샤론을 진정한 라이벌로 인정하게 된, 그리고 조수님에게 앞으로 밀어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받은 쌍둥이는 샤론과 그럭저럭 평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전처럼 수업 중에 쓸데없는 기 싸움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샤론의 독대 요청을 듣자마자 오딜과 오데트의 직감이 번뜩였다.

샤론 언니가 말하는 ‘이야기’가 조수님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따라서 반짝 긴장된 모습으로 샤론을 바라본다.

“자리를 옮길까?”

예상대로 마차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보면 상당히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오가겠지.

최근 잠잠하다고는 생각했다.

아직 결단이 나지 않은 형태로 싸움을 유보하고 있었을 뿐이니.

“언니….”

“괜찮아 오데트. 별일 없을 거야. 내가 있잖아.”

앞서가는 샤론을 보며 오데트는 불안하다는 듯 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조수님 쟁탈전에 경과를 살피자면 명백히 선두를 달리는 것은 샤론이다.

적어도 쌍둥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본받고 싶은 점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조수님의 입을 빌어 ‘밀어내지 않겠다’,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어도 먼저 자리를 꿰차고 있던 샤론에게는 약간이나마 꿀리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오딜은 마차의 소파에 앉자마자 오히려 기개를 보이며 샤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쌍둥이가 절대로 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풍만한 가슴.

단정하게 앉아있는 모습에서 품어져 나오는 청초함.

쌍둥이의 견습마녀 인생 역사상 최고의 난적이자 강적.

샤론 에버그린을 쏘아본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따로 불러내기까지 하시고.”

“말했잖아, 너희랑 대화하고 싶다고.”

“…….”

일전에 쌍둥이가 불러왔을 때와는 달리 차분한 샤론의 모습.

무표정이 되며 얼음 동상처럼 느껴질 고고한 모습에서 오데트마저도 확신했다.

지금의 샤론 언니는 뭔가 다르다.

물렁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각오를 했고, 확실한 우위를 손에 쥐었다.

쌍둥이가 불면 부는 대로 허둥거리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리를 전쟁 협상의 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일말의 동요도 없는 샤론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위협이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긴데요?”

“우리끼리 싸우는 거 그만하자.”

오딜도 오데트도 입을 다물었다.

싸우는 거 그만하자.

언뜻 보기엔 좋게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휴전 협정이 언제나 공평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샤론 언니가 그동안 전쟁을 끝낼 초강수를 준비해뒀다면 쌍둥이는 굴욕적인 휴전 합의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싫어요, 저희는 조수님 포기 안 할 거에요!”

“마, 맞아요! 아무리 샤론 언니라도 저희의 사랑을 무작정 방해할 수는 없어요!”

처음부터 그런 마음가짐으로 임해왔다.

조수님은 단순히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함께 있고 싶은 사람.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도 함께하는 순간 네다섯 배는 즐거워지는 특별한 사람.

결코 뺏기고 싶지 않았다.

“샤론 언니는 비겁해요! 매일 조수님을 저희한테 빼앗으려고 하고….”

“맞아요! 거짓말하고! 그 흉악한 가슴으로 유혹이나 하고!”

“사랑은 한결같은 게 아니 랬어요!”

“지금은 조수님과 더 가까운 사람이 언니일지 몰라도 영원한 건 아니에요!”

우다다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쌍둥이.

실은 그저 모종의 불안감을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혹시 모르는 사이에 ‘승부’ 자체가 끝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말이다.

쌍둥이의 말을 듣던 샤론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뭔가 오해가 있나 보네. 너희랑 싸우자고 여기에 부른 거 아니거든?”

“거짓말!”

“매일 먼저 시비 걸었으면서!”

샤론은 앞에서 땍땍거리는 쌍둥이를 보며 테이블을 탕 내리쳤다.

깜짝 놀라며 잠잠해지는 오딜과 오데트.

사실 샤론도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와 계속 미묘한 적대감을 유지하는 것도 내키지 않고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마련한 이 자리다.

하지만 먼저 싸움을 시작했다는 거짓말을 듣고 태연하게 넘길 정도로 무른 성격은 아니었다.

“너희가 먼저 했잖아!”

“아니죠! 언니가 먼저…”

“너희가 먼저 백작님께 부탁해서 수업을 대가로 시우와 거리를 둬달라고 한 거잖아! 날 바보로 아니?”

그렇다.

알비레오 백작이 제안한 계약.

시우와 거리를 둬야한다는 잔혹한 조약은 다름 아닌 쌍둥이 쪽에서 나온 것이다.

굳이 누가 선공이냐를 묻느냐라면 말할 것도 없이 오딜 오데트다.

“앞에서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하겠냐는 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서 반칙을 쓴 게 누군데!”

결국 진흙탕 싸움처럼 변해버린 싸움에 빽 소리를 지른 샤론이 앞을 보았을 때.

“…?”

“…?”

쌍둥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같은 방향 같은 모양새로 말이다.

“무슨 소리에요 그게?”

“대가? 반칙?”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네가 했어?’라고 묻는 듯하다.

그리고 다시 샤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눈빛이었다.

“응…?”

“설명해주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쌍둥이와 샤론 간의 중대한 오해.

백작을 이용해 시우 쟁탈전에서 샤론을 밀어 내려 했다는 것.

샤론은 그 부분을 착실하게 설명해주었다.

“저, 저희는 그런 부탁드린 적 없어요!”

“스승님이 쓸데없는 짓 하신 거예요!”

“저, 정말이야?”

사실 쌍둥이의 반응을 보고서 의아함을 느꼈던 샤론이다.

물론 오딜과 오데트가 장난꾸러기들이고 호시탐탐 샤론을 골탕 먹이려 들긴 했지만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샤론은 그저 알비레오 백작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계약의 대가를 보고 쌍둥이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뭔가 부끄러웠다.

혼자 쌍둥이를 철천지원수로 대하며 열 내고 있던 꼴이 아닌가?

“미, 미안해…. 나는 영락없이 너희가 한 줄 알고….”

“스승님이 쓸데없는 짓을 하셨네요. 우리도 충분히 실력으로 조수님을 사로잡을 수 있는데.”

“맞아요! 그렇게 얻은 승리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구요!”

“스승님께 확실히 따질 거에요!”

“맞아요, 맞아요!”

그렇게 벌떡 일어나 열을 내던 쌍둥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지금까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저희는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샤론 언니와 승부 볼 생각이었어요.”

“나도 괜한 오해를 했던 것 같네….”

응어리가 풀려나간다.

샤론으로서는 쌍둥이의 괘씸하고 뻔뻔한 뒷공작이 지레짐작임으로 밝혀졌으니 더 이상 열을 낼 필요가 없었고.

쌍둥이로서는 샤론 언니의 도발과 행동이 선제공격을 당한 측의 자위행위였음을 깨닫게 된 이상 예전처럼 화나지 않았다.

“크흠.”

“그런 거였네요.”

“그러게… 오해였나 봐.”

세 사람 다 어쩐지 머쓱한 상태가 되었다.

2.

디아나의 가정교사가 된 지도 어언 삼 일째.

그동안 뭔가 특별한 것을 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색해질 정도로 별로 한 게 없다.

“흠….”

거듭되는 위치보드 게임의 반복.

디아나는 하루에 4~5판 정도씩 침실에서 잠깐 나와 시우와 대결을 벌여주었다.

물론 전력을 다해 임했다.

이미 한 번 접대 게임이 들통났던 상황에서 어쭙잖게 봐주었다간 디아나가 펄펄 열을 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졌네요. 이번에도.”

“운이 좋았습니다.”

얌전하게 돌을 던지는 디아나의 모습은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한 게임만 져도 뺨을 얻어맞은 듯이 이를 드러내던 디아나는 첫날 이후엔 겸허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게 썩 좋은 상황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시우가 백작에게 받은 미션은 어떻게든 디아나의 외부 활동을 유도하는 것.

지금은 과외 초창기이니 방에 앉아서 보드게임이나 하는 것을 눈감아 줄지 모르지만, 계약이 틀어지면 언제 가정교사에서 잘릴지 모른다.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예소드 백작의 강의와 조력은 혼자서 낑낑거릴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증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디아나가 분에 가득 차서 재대결을 요구하면 그걸 미끼로 사냥이건 뭐건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달관해 버리니 끌고 나갈 건덕지가 없는 것이다.

“…….”

디아나는 빤히 위치보드를 바라보았다.

원래 ‘한 번 더 하죠’라고 하거나 ‘이제 쉴게요. 수고했어요’라고 하고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렇게 긴 침묵이 내려앉은 건 처음이다.

“…당신.”

“네, 아가씨.”

“그….”

항상 툴툴거리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요구를 말하던 디아나.

어머니와 쏙 빼닮은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괜스레 장갑을 매만지며 시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 그…험험… 별 건 아니고. 하나만… 음, 물어봐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시우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한참이나 시선을 요리조리 피하던 디아나는 쑥스럽게 손을 뻗어서 위치보드를 가리킨다.

“이, 이건 왜 이렇게 둔 건지. 알려줄 수 있나요? 172번째에 뒀던 수요….”

겨우 그 짧은 걸 물어보는 것이었지만 어찌나 드문드문 작게 말하는지 거의 30초 넘게 시간이 흘렀다.

창백하다는 감상이 들 정도로 하얀 뺨도 뜨끈뜨끈하게 더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이건 디아나가 아주 어렵게 결정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디아나의 마음에 시우의 이미지는 큰 변동이 없다.

남자 마녀이고, 마법은 그리 우수하지 않을 테지만, 게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사람.

오늘까지 총 20회전을 겨루었고 디아나는 단 한 번도 시우를 넘어서지 못했다.

나름 혼자서 공부도 해보고 연습도 해왔지만, 결과는 번번이 참패.

이쯤 되자 비결이 뭔지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껏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 왔던 상대에게 새삼 피드백을 청한다는 것은 꽤 부끄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디아나는 사흘 내내 고민하다 오늘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그냥 궁금해서….”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다문다.

이 한 수는 게임의 판도를 크게 뒤집었던 한 수이다.

디아나가 패배를 직감하게 한 수이기도 하다.

플레이의 핵심 비결을 호적수에게 묻는다는 것은 정진 정명한 게이머인 디아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뻔뻔하기까지 한 부탁이니 말이다.

“알려주세요. 당신은 제 가정교사잖아요? 뭔가 가르쳐 줘야죠.”

눈을 질끈 감고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결심한 디아나.

반응이 없어 슬며시 눈을 뜨자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짓는 시우가 보인다.

디아나는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눈싸움을 걸었다.

여기서 눈을 피하면 속내가 다 들켜버릴 것 같았다.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럼 빨리….”

“하지만 저도 입장이 입장이라서요. 그러지 말고 거래를 하는 건 어떨까요?”

“거래?”

“네, 아시다시피 저는 백작님께 마법을 배우는 대가로 아가씨와 이것저것 같이 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하루는 게임을 한 이후에 제 수를 알려드리면, 그다음 날은 잠깐이라도 외부 활동을 하는 겁니다. 어때요?”

디아나로선 숨이 턱 막히는 제안이었다.

외부 활동이라.

사실 어머니가 이 남자를 고용한 것도 그게 목적이긴 할 텐데.

막상 밖에 나가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 힘들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디아나는 어느 정도 시우에 대해 인정하고 있다.

적어도 위치보드에 한해서는 배울 것이 한가득한 상대라는 것을 말이다.

“하루 두 시간. 그 이상은 양보 못해요.”

“좋습니다.”

그렇게 시우와 디아나 사이에도 작은 계약이 체결되었다.

EP.358 #77_가정교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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