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
1.
마녀의 도시 게헨나.
선택받은 특권 계층 마녀를 떠받기 위해 창조된 이 도시에 풍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다.
화학연료에서 유발되는 대기오염과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쓰레기에 파묻히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전쟁과 파괴에 휘말리지 않고 수 대를 이어 보존되어 온 건물은 고작 여관에 불과할지라도 나름의 운치와 여운을 주기 마련이다.
게헨나의 마녀들은 물론이오 봉사하는 시민까지 게헨나의 평화를 즐겼다.
수백 년간이나 말이다.
그러나 모든 풍요로움에는 대가가 따른다.
따스하게만 보이는 게헨나의 풍요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아름다움만이 그윽할 것 같은 이 게헨나에서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착취당하는 무리가 있다.
시청 소속에 속하지 못한 사노예.
귀족과 협약을 맺은 각국 수뇌부들이 지원하는 사형수들이다.
보더 타운의 밀수꾼들이 구매한 사노예는 대부분 하역장에서 갈려 나간다.
하루 12시간이 넘어가는 중노동과 채찍질, 부실한 식사, 보장받지 못한 휴일과 무리한 노역 속에서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것이 보통이다.
게헨나의 모두가 이것을 당연시했다.
어차피 저들은 죽을죄를 지은 죄수이고, 자신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게헨나에 팔려 온 것이니 말이다.
이러한 형태의 처벌이 옳고 그름을 논하기 전에 적어도 불합리한 처사라고 목청을 높이는 일은 드물었다.
당사자들 이외에는 말이다.
보더 타운의 항만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
시설이 너무 오래되었고 새로운 창고 시설이 들어섰다는 이유로 수십 년 넘게 방치되어 온 탓에 폐허나 다름없다.
온종일 안개비가 내리는 보더타운의 특성 탓에 눅눅하고 어둡고 허름한 창고는 마치 하수구를 연상시켰다.
그렇다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시궁쥐의 찍찍거림이겠지.
“적당히 하고 비켜. 나도 즐겨야지.”
“이 씨발 새끼가 아까부터 더럽게 재촉하네. 저리 비켜있어 돼지 새끼야.”
짚 더미 위에 다리를 벌리고 힘없이 누워있는 여자.
그 뒤로 줄을 선 남자 다섯과 다투는 둘.
창고 한가운데 나무 상자를 땔감으로 삼은 모닥불과 나뒹구는 술병.
여기에 모인 20명 안팎의 남자들은 모두 밀수꾼이 사들인 사노예 즉, 사형수였다.
“돼지 새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이번에 창관에 팔려 가게 될 노예를 먼저 즐기니 마니 싸우던 뚱뚱한 남자는 발끈한 듯 턱살을 떨었다.
여자를 눕혀놓고 찍어눌러 가던 근육질 남자도 바지춤을 추스르며 앞에 선다.
체중은 돼지 쪽이 앞섰지만 기세는 근육질 남자 쪽이 훨씬 살벌했다.
“불만 있나? 소아성애자 돼지 새끼? 난 빵에서 너 같은 새끼들 보면 다 때려죽였어. 여기가 감옥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
“씨발 놈이 전 부터 사람 하나둘 죽인 거로 유세 떠는데. 사람은 너만 죽여 봤어?”
예전부터 은근한 무시를 적당히 넘어왔던 돼지남이지만 오늘은 술이 들어간 만큼 같잖은 객기가 머리에 돌았다.
오동통한 손으로 근처에 나뒹구는 맥주병을 들고 깨뜨린다.
동시에 집중되는 이목과 울려 퍼지는 조소.
분위기는 험악했지만 그 누구도 이 싸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크하하! 야 저 새끼 꼴에 병 깬 거 봐라.”
“찌르려나 본데?”
근육남도 피식 웃으면서 품 안에 칼을 꺼내 들었다.
“돼지야, 잘됐네. 나도 너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오늘 저녁은 돼지 내장탕이다.”
“좆만한 풍선 근육 새끼가 유세 떨기는.”
일반적인 노예가 개별행동을 하거나, 여자를 안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가 용납될 리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자들은 ‘십인장’, 하잘것없는 노예 중에서도 조금 특별한 자들이다.
노예들이란 하나 같이 사회 부적응자, 정신이상자, 범죄자, 살인범 혹은 강간범.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폐기처분이 확정된 사회의 찌꺼기들을 밀수꾼이 일일이 컨트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단합되지 않는 게으른 시궁쥐를 일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같은 시궁쥐 사이에서도 특히나 난폭하고 흉악한 놈들을 대장으로 삼는 것.
그 대장들에게는 아주 조금이나마 나은 처우를 약속하고 편의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가라는 것은 쥐꼬리만 한 우대이다.
하지만 인간은 극한에 상황에 몰리게 된다면 빵 한 조각을 더 먹기 위해 동족상잔을 서슴지 않는 이기적인 족속이었고, 밀수꾼들의 전략은 훌륭했다.
십인장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노예들을 휘어잡고 중간 관리자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관리해 주었으니 말이다.
“그만.”
막 칼부림이 벌어지려던 때.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끼어들었다.
방금까지 모닥불 앞에 멀거니 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던 남자였다.
“아니 대장! 대장도 봤잖아! 저 새끼가 나보고 돼지 새끼라고…!”
스킨헤드에 번들거리는 사백안.
얼굴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
칼잡이 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무리의 우두머리다.
“꾸웩!”
그는 가차 없이 돼지남의 목덜미를 잡고 무릎으로 코를 으깨버렸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릴 정도로 험악하고 사정없이 무릎을 올려 친다.
꾸웩거리며 비명을 지르던 돼지남은 털썩 쓰러졌고, 잭은 무릎에 박힌 조각난 이빨을 툭툭 털어내며 병나발을 불었다.
“꼬우면 살을 빼야지. 뭘 어떻게 처먹길래 너 혼자 돼지마냥 살이 뒤룩뒤룩 찌냐.”
“크으…크으… 미,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래, 우리끼리 싸워서 뭐 해. 다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했잖아. 너도 가서 마저 따먹어.”
“어, 어….”
시답잖은 싸움을 중재하고 코피를 줄줄 흘리며 사과하는 돼지남의 어깨를 두드린 잭은 털썩 자리에 앉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무리 역시 어느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병신 머저리 새끼들.
이런 놈들과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 진저리가 난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최초 1년 정도는 건방진 마녀를 강간하고 이 지긋지긋한 도시를 탈출하는 것도 꿈꿨다.
하지만 마녀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챈 지금에 와서는 이 병신들 사이에서 대장 놀이나 하는 것이 고작이다.
복수에 대한 희망도, 미래도 없다.
죽을 때까지 이 비참한 생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삶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뾰족한 수가 없으므로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지겹구나?”
맥주를 들이켜던 잭은 갑작스레 등장한 불청객의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나른한 목소리.
놀란 눈으로 옆을 보자 한 마녀가 있었다.
우아하게 컬이 들어간 상앗빛 백금발과 비취색의 눈동자.
허름한 상자에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깔고 마치 동료인 것처럼 자연스레 앉아있다.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존재했던 것처럼.
“뭐, 뭐야….”
“왜 마녀가 갑자기 여기에….”
이들이 딱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던 것은 아니다.
여자를 탐하는 것도, 이따금 술을 마시는 것도 모두 십부장이라는 이유로 주어진 작은 편의.
하지만 이런 허름한 아지트에 갑작스레 마녀가 등장했다는 것은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술렁임과 동요가 순식간에 곳곳에 퍼져나간다.
“무슨 일입니까? 이런 누추한 곳까지.”
“그걸 설명하려면 내 소개를 해야겠네.”
갑자기 등장한 매력적인 마녀는 방긋 웃음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욕망을 실현해주는 착한 요정. 욕망의 마녀라고도 불리는 비앙카 베릴리야. 비앙카 님이라고 부르면 돼.”
어이없을 만큼 산뜻한 자기소개에 당황하고 있던 사이.
근처에서 어물쩍거리던 십인장 한 명이 그녀의 발치에 넙죽 엎드렸다.
“안녕하십니까! 고귀한 마녀님! 저는 하비라고 합니다! 만약 절 데려가 주신다면 성심성의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절 사주십시오!”
마녀에게 사노예로 팔려 간다.
이것은 이후를 짐작할 수 없는 모험이다.
어떤 마녀는 그저 몸종이나 성노예 정도로 쓰겠지만 혹자는 잔혹하고 합법적인 마법 실험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비는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 역시 왜 먼저 선수를 쳐 부탁하지 않았는지를 아쉬워하고 있다.
다들 노예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자칫 건방지다고 곧장 목이 날아갈 행동을 하며 도박을 건 하비를 부러워할 만큼.
모두 숨을 죽이며 비앙카의 반응을 살폈다.
갑자기 나타난 이 마녀가 대화 중에 멋대로 끼어든 노예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조용히 지켜본다.
“이름이 하비?”
“네? 그, 그렇습니다! 신체 건강하고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씩씩해 보이네.”
비앙카는 손을 뻗어 하비의 뺨을 어루만졌다.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에는 그 어떤 분노나 언짢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널 사는 것까지는 무리인 것 같지만…. 대신에 네 욕망을 실현해줄게. 내 눈을 볼래?”
비앙카는 하비의 턱을 이끌어 눈을 마주치게 만들었다.
얇은 혓바닥이 몹시 음란하게 윗입술을 핥았다.
욕망의 실현이라.
달콤한 말이다.
혹시 몸이 달아오른 마녀가 하룻밤을 보낼 노예를 물색하고 있던 것은 아닐지.
하비는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흐음, 지금 굉장히 배고프구나?”
“그, 그렇습니다.”
하비는 멍하니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마녀를 이렇게 똑바로,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자격이 일절 박탈당한 것처럼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만을 바라보게 된다.
“흠, 지금은 이것밖에 없는데. 일단 이거라도 먹을래?”
비앙카가 품에서 꺼내 든 것은 어떻게 들고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통 바비큐였다.
두툼한 껍질에 그물 모양의 칼집을 내고, 겉은 바삭하게 안은 촉촉하게 익은 고깃덩어리.
보더 타운에서 먹을 수 있는 일반적인 고기와는 크기도 상태도 차원이 다르다.
“정말… 먹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내가 말했잖아. 네 욕망을 실현해주겠노라고.”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보고 하비를 입을 쩍 벌려 그것을 물었다.
이 고기.
대단하다.
크리스피한 표면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버터의 풍미와 로즈마리의 향기.
이보다 완벽할 수 없는 돼지고기였다.
수 년 만에 혀를 즐겁게하는 황홀한 진미에 하비는 허겁지겁 고기를 물어뜯었다.
“우걱…! 우걱…! 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야…. 최고… 최고….”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어 치우는 하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비앙카는 다시 잭 쪽으로 돌려 앉았다.
“이 정도면 자기소개는 대충 끝난 것 같은데. 아직 부족하려나?”
-쫘악! 쫘악! 쫘악!
“미…미쳤어….”
“누, 누가 말려봐….”
“저걸 어떻게 말려…! 니가 가…!”
“우웩…!”
곧이어 들려왔다.
질긴 생살을 씹고, 뼈를 박살 내는 소리.
안에 있는 축축하고 뜨거운 선혈을 삼키는 소리.
그 불길한 배경음 속에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더러는 구역질을 하는 자도 있었다.
마녀와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하비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제 왼팔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단단한 뼈에 이가 부러져도, 고무줄처럼 질긴 동맥이 몇 번의 되새김 끝에 끊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비는 그렇게 한참이나 식사를 계속하다가 스스로 만든 피 웅덩이 한가운데 털썩 쓰려졌다.
비앙카의 발치로 흘러든 피가 하얀 구두 코에 꽃을 피운다.
“이제 내가 누군지 감이 잡히려나?”
아무리 마녀라도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게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이런 행동이 가능한 마녀가 있다면 짐작이 가는 것은 하나뿐이다.
“…추방자….”
“그래, 그중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는 공적이지. 너희와 마찬가지로 게헨나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마녀들에게 원한이 깊어.”
비앙카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잭에게 속삭였다.
“분하지? 화나지? 지금까지 계속 당해만 왔잖아. 별것도 아닌 죄 때문에 죽는 그 순간까지 벌레처럼 살아갈 생각이야?”
잭은 마녀를 보았다.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분명히 느끼고 있다.
이 무기력함과 신물 날 정도로 지겨운 생활을 변화시켜줄 장본인이 바로 앞에 있다고.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어렵지 않아. 내가 너희에게 힘을 줄게. 너희를 깔보고 우습게 여기던 마녀에게 복수할 힘을. 너희도 내 조건을 들어보면… 구미가 당길걸?”
비앙카는 덜덜 떠는 노예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EP.357 #77_가정교사(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