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1.
승패가 갈린 직후.
테이블 위에는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
디아나는 길길이 날뛰지 않았다.
하물며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결판이 난 게임판을 특유의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시우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너무 도발했나?
디아나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도록 그냥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이겨야 했었나?
어차피 선택지가 없긴 했다.
디아나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몰라도 이 게임에서 졌다면 내일 아침에 잘려버릴 테니 말이다.
심지어 디아나의 자존심을 살살 긁어가며 어렵사리 따낸 경기이기에 더욱 그럴 확률이 높았겠지.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는 것도 여러 방식이 있다.
시우가 한 행동은 한 대 맞으면 죽을 때까지 맞아주다가 게임 종반에 풀콤보를 때려 박아 관광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디아나는 이 게임에 무척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도리어 자존심을 긁다 못해 박살 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저기요.”
“네, 디아나 님.”
“당신 이 게임 처음 아니죠?”
디아나의 목소리는 작고 낮았다.
방금까지 경악에 잠겼던 얼굴도 지금은 가면 같은 무표정.
그래서 안에 들어 있는 감정을 엿보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솔직하게 ‘디아나 님이 처음 가르쳐주신 겁니다’라고 답해야 할지.
아니면 조금 거짓말을 하더라도 ‘사실 속여서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해 디아나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세워줄지.
“그게….”
“후우….”
디아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위치보드의 리셋버튼을 눌러 게임을 초기화했다.
과연 디아나의 판결은 무엇일까.
게임에서 지면 조건 없이 자진사퇴하겠다는 약속이 오갔지만, 이겼다고 해서 가정교사 자격을 유지해준다는 말은 없었다.
디아나의 변덕과 짜증이면 모처럼 좋은 조건의 가정교사직도 하룻밤 꿈이 되는 것이다.
은근히 긴장하며 기다리던 와중 디아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됐어요. 그게 뭐가 중요해요.”
어느새 갈아신은 슬리퍼를 직직 끌며 침실 문고리에 손을 얹는다.
“이제 진짜 잘 거니까 알아서 정리하고 나가요.”
디아나는 문을 쾅 닫고 방에 틀어박혀 버렸다.
이건 조졌군.
계획이 좀 많이 어긋났다.
조금 더 아슬아슬하게 승리하고 힘겨운 승리를 연출하는 편이 좋았었다.
“하아….”
한숨을 쉬고 입맛을 쓰게 다셨다.
저런 반응이라면 굳이 뒷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라고 생각했을 때.
굳게 닫혔던 침실 문이 빼꼼 열렸다.
표정이 썩 좋지 않은 디아나의 얼굴 반쪽이 슬며시 보였다.
“내일은… 낮잠 먼저 잘 거예요.”
제 할 말 만하고 재빨리 닫히는 문
.
잠깐 멍해 있던 시우는 뒤늦게 그것이 쑥스러움이 듬뿍 묻은 재대결 신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즉, 하루 만에 잘릴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2.
디아나가 방으로 들어가 버린 시각은 오후 2시.
예소드 백작과 약속된 개인과외 시각은 오후 10시였기에 시우는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좌표이동식으로 쉬다 올 수 있겠지만 구태여 그러지 않았다.
레바나 대욕장은 욕장 외에도 온갖 놀거리와 구경거리들이 가득했기에 그것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것만으로 시간을 보내기 충분했다.
온갖 화려한 마법 작물이 전시된 온실이라던가.
현세에서 작품 한 점에 부르는 게 값인 명장의 작품을 전시한 박물관이라던가.
건물만 봐도 아름다운데 저런 볼거리까지 풍성하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관람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리하여 하얗게 보름달이 떠오른 달밤.
시우는 미리 장소를 안내받았던 예소드 백작의 개인서고로 향했다.
노크 이후 문을 열자 좋은 향기가 났다.
무르익은 과실처럼 달콤하면서도 크림처럼 부드러운 향기였다.
정면 테이블에는 잉크가 소매에 묻지 않도록 팔을 걷어 올린 루시 백작이 앉아있다.
복장은 당장 무도회에 나갈 예정인 양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하다.
어쩐지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은은한 촛불로 빛나는 방 안에서 나긋한 손짓으로 깃펜을 내려놓는다.
“제가 선물한 옷이지만 정말 잘 어울리는걸요?”
“감사합니다.”
앉아있는 자세, 말씨 행동 하나 하나에서 기품이 흐르는 것은 루시 백작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
태생이 고귀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 시우는 아무리 노력해도 저 자연스러운 귀족성(性)을 따라 하지 못하겠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근처가 너무 아름다워서 둘러보느라.”
“어머, 그건 기쁜 말이네요. 백작의 저택에 머물면서 눈이 높아졌을 텐데.”
“서로 다른 특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곳 역시 무척이나 마음에 드네요.”
“그래요?”
백작은 사근사근한 웃음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을 돌아 나온 루시 백작.
그녀의 옷차림을 본 시우는 깜짝 놀란 기색을 숨겼다.
정갈한 복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폭이 좁은 드레스 한쪽이 시원하게 트여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팬티가 보일락말락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슬릿인지라 하얀 허벅지가 고스란히 보였다.
남자의 본능인지라 절로 눈이 갔다가 재빨리 시선을 관리한다.
그나저나 저렇게 백색 일색의 복장을 해도 하얗게 보이는 피부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같은 생각을 하며 괜히 이상하나 생각이 들려는 것도 방지했다.
“편히 앉으세요.”
“넵.”
테이블 앞 소파에 앉은 시우에게 백작은 두꺼운 책을 여러 권 턱턱 올려놓으며 물었다.
“저희 딸은 어떻던가요?”
“전에도 느꼈지만 아주 총명하고 재기 넘치십니다.”
“그렇죠? 제가 많은 견습마녀를 만나봤지만, 저희 디아나처럼 똑똑하고 귀여운 견습마녀는 못 봤거든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수업 내용은 어땠나요? 디아나가 말은 잘 듣던가요?”
갑자기 눈을 빛내며 적극적으로 디아나를 칭찬하는 백작의 모습에 시우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뭔가요?”
“사실 오늘 2시간 정도밖에 가정교사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위치보드 한 판 둔 것이 고작이라….”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울여 시우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던 백작은 손을 휘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디아나가 워낙에 고집불통이서요. 첫날에 위치보드라도 했다면 가공할만한 성과죠.”
“그런 건가요?”
“부끄러운 사실이지만요, 저도 20년 넘게 디아나를 기르고 가르쳐 왔지만, 가끔 디아나가 어려울 때가 있답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뭘 이 정도로. 아무튼….”
드디어 고대하던 백작과의 개인과외 시간.
디아나 놀아주기 업무가 끝나면 매일 2시간 정도씩 역장 마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
새로운 마법에 대해 알아가는 건 그 자체만으로 꽤 재미난 일이었기 때문에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가르쳐드릴지를 차분히 설명해 드릴게요.”
“넵.”
백작은 종이 한 장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조금 전까지 써 내려가던 것인 듯 잉크가 말라 있지 않다.
“시우 씨의 목표는 예장 ‘붉은가지’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죠?”
“그렇습니다.”
“역장 마법을 아예 처음부터 시작해서 그 수준에 오르려면 10년이 있어도 모자랄 거에요. 그러니까 기존에 존재하는 자성마법에 역장 마법을 슬쩍 애드온하는 형식으로 연구 방향을 잡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그림자의 법칙에 다양한 원소마법을 응용해 배합해 더욱 튼튼하고 강한 갑옷을 만든 것처럼, 왜곡장도 같은 방식으로 통제하겠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자성마법을 만드는 것보다 유연성이나 응용력이 떨어지겠지만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희보다.
“물론 아무리 기존 자성마법을 개축한다고 해도 기본기는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 개인과외 2시간 동안은 역장 마법의 기초에 대해 가르칠 거에요. 먼저 이 책을 볼까요?”
백작은 조금 전 책상에 올려둔 책.
전화번호부에 버금가는 두께와 크기를 가진 책을 시우에게 보여주었다.
표지에는 ‘역장 마법 개론’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이건 지금까지 예소드 가문에서 견습마녀에게 기본 가르치기 위해 전해져 내려오는 개론서를 제가 개편한 거랍니다. 디아나도 이것으로 배웠죠. 가져가세요.”
“이런 귀한 걸 주셔도 괜찮나요?”
“네, 어렸을 적 디아나가 하도 책을 숨겨대는 통에 10권 정도 마련해 뒀거든요. 내용 자체도 사실 특별할 건 없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우는 백작이 건네준 책을 쫘르륵 펼치며 훑어보았다.
상당히 두껍긴 하다.
가뜩이나 모서리를 활용하면 무기로도 쓸 수 있을 두께인데 글자가 정말 깨알 같다.
거의 전공서 두세 권 분량의 내용을 함축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뭐가 좀 많죠? 보통 견습마녀가 전부 배우는데 3년 정도 걸리는 책이에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우리 디아나는 무려 6개월 만에 끝냈답니다. 대단하죠?”
“대단하시네요.”
개론서의 글자만큼이나 깨알 같은 딸내미 자랑이 틈틈이 들어오고 시우는 열심히 맞장구쳐주었다.
전부터 느꼈던 건데 굉장한 딸바보인 모양이다.
“그런데 신시우 씨.”
“네, 백작님.”
“왜곡장 차폐에 성공했던 걸 보면 나름 역장 마법에 관해 공부했던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공부라고 해봐야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뒤적인 거지만요.”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실력을 볼까요? 그편이 시간도 아낄 수 있을 것 같고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백작은 펜을 잡더니 순식간에 문제를 써 내려갔다.
정석과 기본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본 문제부터, 간단한 응용문제까지 총 열 문제.
난이도 밸런스가 적당히 잡힌 문제였다.
“풀어 보시겠어요?”
먼저 눈으로 문제를 훑었다.
역장 마법의 개념이 아무리 어렵고 추상적이라고 해도 결국 그 뿌리는 마법식에 있다.
결국은 계산 문제라는 의미다.
시우는 펜을 잡고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갔다.
마법식의 추상화 및 관념화에 대한 개념 서술 문제.
상상계와 상징계에서의 마법식을 주고 유효 퍼텐셜과 실재계 구현 시 자연 소실되는 퍼텐셜의 계산 문제.
주어진 식을 실재계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마법식 문제.
마지막 문제까지 술술 풀어낸 시우는 입맛을 다셨다.
앞의 세 문제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출제자가 출제자이다 보니 부실한 곳을 쿡쿡 찔리는 기분이었다.
“풀 수 있는 문제는 다 푼 것 같습니다.”
“…….”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눈을 끔뻑이며 시험지를 확인하는 백작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지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는 예소드.
“백작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공부한 기간을 여쭤도 괜찮을까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한 두 달쯤 되었을 겁니다.”
“한 두달…?”
그녀는 잔뜩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시우에게 주었던 책을 도로 가져갔다.
어안이 벙벙해 바라보고 있자 답해주는 루시 백작.
“이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네…?”
“굳이 볼 필요 없어요. 다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
백작이 낸 10문제는 사실 한 두달 공부한 초심자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를 낸 것도 ‘정답’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해결하는 과정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애초에 마법에는 정답이 없고 특히 추상적인 면모가 부각되는 역장 마법에는 더욱이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10문제 모두 나름의 정답을 적어내었다.
부족한 부분도 있었고 논리적 비약이 발생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루시 예소드조차 시도해보지 않았던 접근 방식.
본디 측정할 수 없는 역장을 수치화하여 측정하려는 시도.
루시 예소드가 보기에 그가 제출한 답안은 이미 개론서로 공부할 내용을 훌쩍 뛰어넘어 있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하네요. 시우 씨는.”
“그, 그런가요?”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역사상 최초의 남자 마녀.
이름은 신시우.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호기심이 생겼다.
EP.356 #77_가정교사(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