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
1.
걱정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벼운 염려였다.
호스트바 근무 당시 먼저 와서 위치보드를 하자고 조르던 것은 디아나였다.
예소드 백작이 디아나가 상당한 게으름뱅이라는 것을 귀띔해주었을 때도 적당히 게임이나 같이 하자고 하면 넘어오겠거니 했다.
승부욕을 자극해주면서 승부를 대가로 이것저것 시킨다면 꽤 잘 듣지 않을까? 싶은 얄팍한 수.
실제로 같은 마녀인 견습마녀인 쌍둥이만 봐도 비슷한 수준의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니 이번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막상 디아나가 보인 모습은 철벽 그 자체였다.
시우에게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고 도망치기 바빴다.
내심 철렁했다.
유일한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누가 겁먹었다는 건지. 하…! 허…! 참…! 어이가 없어서….”
마지막 살짝 선을 넘을 듯 말 듯 한 방법은 디아나에게 즉효였던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시우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갈 것 같았던 디아나는 쪼르르 달려와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위치보드를 가져오더니 툴툴거리면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세팅을 끝냈다.
지금만은 ‘게으름뱅이 디아나’라는 별명이 무색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를 끝낸 디아나는 적의가 흉흉히 빛나는 눈으로 시우를 쏘아보았다.
“당신.”
“네.”
“각오는 되어 있겠죠?”
“각오라뇨?”
디아나의 등 뒤에는 이미 아우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귀찮아 죽겠는데 자꾸 쫓아다니던 상대가 주제넘은 도발까지 해야 완성할 수 있는 희귀템.
분노의 아우라였다.
“당신은 절 도발했어요. 그것도 도망치는 거냐는 어불성설의 흑색 비방으로 말이죠.”
여전히 조곤조곤한 목소리긴 했지만 빠르게 속삭이는 것처럼 굉장히 말이 많아졌다.
“저는 자고 싶었어요. 따뜻하고 폭신한 깃털 베개에 머리를 뉘고 편안한 파자마 차림으로 뒹굴뒹굴하고 싶었다고요. 아니, 사실 당신 때문에 모든 것이 일그러졌어요.
원래 제 계획은 볕이 잘 드는 곳에서 모포를 둘러싸고 잘 계획이었으니까.
이제 곧 완연한 겨울이 오면 그런 거 못 해요.
즉, 당신 때문에 모든 게 다 망한 가운데 당신은 제가 무시하면 곧장 명예가 실추되는 시시한 도발로 절 이 자리에 앉혔죠.”
이 많은 단어와 문장을 한 호흡에 소화해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저렇게 말하는 것만으로 운동이 될 것 같은 대사량이었다.
“만약 저한테 진다면 곱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요. 그에 합당한 벌을….”
그렇게 펄펄 열을 내던 디아나의 말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갑작스레 끊겼다.
이하 디아나의 사고 흐름.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린다.
벌?
손바닥 맞기?
귀축배달부.
깃털 간질간질.
배달부는 간지러움과 쾌락에 비틀리는 마녀의 몸을 찍어 누르고 단단한 음경으로….
“아, 아, 아, 아무튼…!”
봇물 터진 듯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다가 퐁하고 얼굴이 붉게 변한 디아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우.
디아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뒤의 말을 얼버무려야 했다.
“아무튼 덤벼요. 콧대를 바싹 눌러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싱긋 웃음을 짓는 시우를 보고 디아나는 이를 꽉 물었다.
왜 하필 거기서 그런 장면이 생각나버려서….
제대로 할 말도 다 하지 못하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마지막 대전은 제대로 마무리 지어지지 못했다.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공부하고 다시 갔을 땐 제머나이 가의 견습마녀 쌍둥이가 정신 공격을 하는 통에 져버렸고.
재도전하는 시점에선 태연하게 뽀뽀를 나누는 세 사람의 모습에 도망쳐 버렸으니.
차라리 이렇게라도 재 승부의 장이 마련된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디아나는 끊는 기름에 찬물을 부은 듯 부글거리는 심정을 가라앉히고 푸욱 심호흡했다.
“함께 게임하는 건 오랜만이네요.”
재수 없게 실실 웃는 저 남자는 이러나저러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의 호의로 고용한 가정교사이다.
막대하기도 그래서 좀 봐주고 있었다.
내일 당장 일러서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적당히 선만 지켜준다면 내버려 둘 생각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선을 넘었고 이렇게 명분이 생겨버렸으니 디아나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요.”
“네.”
“만약 제가 이긴다면 두말할 거 없이 자진해서 사퇴하세요. 그 가정교사니 뭐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직책에서요.”
“음, 그건 곤란한데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디아나 님의 가정교사가 되는 대가로 연구 협조를 약조 받은 것이어서요. 하루 만에 쫓겨났다간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철면피를 깔고 졸졸 쫓아다니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란한 기색이 서렸다.
그저 예소드 가에서 떨어지는 푼돈이나 벌어보겠다고 온 줄 알았더니 마법 연구라니.
그래도 마녀다운 구석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알 바 아니다.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 오는 곤경은 오히려 디아나의 기쁨.
도발 받아치기를 선사해주었다.
“하…! 쫄으셨겠다?”
“디아나 님이 상대라면 승리를 점칠 수 없을 테니까요.”
“당신도 싫다는 날 30분이나 쫓아다니며 괴롭혔잖아요. 조건 바꿀 생각일랑 말아요.”
그리하여 듀얼 개시.
디아나는 습관처럼 마력원 세 개를 점했다.
대부분의 추상 전략게임이 그렇듯 첫수는 특별한 이변이 없기 마련이다.
저 남자 빼고.
“이건 또 무슨….”
시우의 마력원 배치를 본 디아나의 눈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독특한 전법이라고해도 몇 번 상대하다 보면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에게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헌납한 마지막 경기는 쌍둥이의 방해가 있기 전까지 디아나가 우세했다.
“또 이상한 짓을 하네요.”
하지만 지금 시우의 마력원은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그렇다고 정석적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정삼각형을 그리되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다.
똘똘 뭉쳐 배치했을 때와는 정반대로 노른자 땅에 알박기하듯 널찍하게 펼쳐놓은 것이다.
처음 보는 전략에 대한 낯섦과 일전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플레이에 휘둘렸던 기억이 더해지며 괜스레 불길함을 감지한 디아나.
그 불길함을 떨쳐내듯 짓씹어 말한다.
“그런 조잡한 수작엔 더 안 넘어가요.”
“조잡하다니요. 제가 고심해서 준비한 전략인데요.”
상대는 깜짝 전략 원툴이다.
기발한 전략이면 훌륭한 전략이겠지? 라는 초보적인 사고에 약간의 실력을 더한 것에 불과하다.
디아나는 불안을 잠식시키며 차분히 생각했다.
마력원을 뭉치면 마법식의 확장에는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비효율적일 뿐이라면 디아나가 같은 전략에 패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밀집된 마력원에서 나오는 찰나의 한두 타이밍, 일점돌파력.
뭐 그런 장점도 있다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건?
서로 아슬아슬하게 공명할 수 있는 거리이긴 하나 마력원 자체의 방어도 출력도 떨어진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장점이라곤 없는 것이다.
하지만 디아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해괴한 전략을 바탕으로 하는 플레이 방식은 이미 경험한 바다.
당황하거나 말리지 않고 신중하게 대처하기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패배의 굴욕을 되갚아줄 수 있을뿐더러 이 성가시기 짝이 없는 남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릴 수 있다.
그리고 디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큭…!”
항상 그랬지만 디아나의 스타일은 정석 그 자체.
소규모 교전을 통해 유용한 룬을 점거하며 마력식의 내실을 다진 뒤 자연스러운 힘 싸움으로 깔아뭉개는 교과서적인 플레이를 선호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지지 않는 게임’, 살짝만 보태자면 ‘알면 안 지는 게임’에 능한 것이다.
그에 대해 오늘 이 남자가 준비한 전략은 난전.
정신없는 게릴라전이었다.
사방에 놓인 마력원으로부터 정신없이 뻗어오는 견제와 소규모 격전을 벌이는 것이다.
마력원이 밀집되어 있지 않은 이상 미는 힘 자체는 약했지만 대신 훨씬 난잡하고 지저분한 견제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건 디아나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그리고 굉장히 도전적인 전략이었다.
일전 이 남자와 붙었던 제5국.
그때도 지금처럼 정신없는 난타극을 주고받았다.
중반전의 결과만 놓고 본다면 승패는 뚜렷했다.
서로 머리채 쥐어 잡고 흔드는 숨 가쁜 속도전이 끝나고 정신을 차려 보니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져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우는 그 순간부터 돌을 던져 디아나에게 승리를 양보해주었다.
결코 승리라고 부를 수 없는.
모멸과 자만이 뒷면에 새까맣게 피어있는 승리를.
그걸 좋다고 받아들여 방방 날뛰었던 과거는 디아나가 절치부심한 채 마법 공부에 매진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똑같은 수법으로 절 꺾으려 했다면…. 오만이라고 말해둘게요.”
“설마요.”
디아나의 눈이 빛났다.
혼자 복기하던 중 접대 게임이었음을 깨달았던 그때의 굴욕을 잊지 못한다.
디아나는 그 어떤 경우보다 난전이 벌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집중적으로 공부했었다.
그 뒤로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게임의 수준은 디아나의 공부 전보다 월등하게 올라 있었다.
소규모 접전지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치열함도.
접전지 개수 자체도 2배 아니, 3배는 족히 된다.
어느새 디아나는 말도 잊고 승부에 몰입해 있었다.
지금만은 분노도 짜증도 귀축배달부도 머리에 없다.
순수한 사고력과 연산력의 싸움.
온갖 함정과 블러프가 난무하는 이 정십이면체의 전장 안에서 수 싸움을 거듭할 뿐이다.
서로에게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고 눈빛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100여 수를 주고받았을 무렵.
디아나의 집중이 깨졌다.
“아….”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온다.
강하다.
분하지만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남자는 결코 디아나에게 뒤지지 않는 빼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승리하는 것은 디아나 자신이었지만.
“제가 이겼네요.”
총 27회의 교전이 일어났고 근소한 차이로 디아나가 교전지에서 승리를 챙겼다.
바둑으로 치면 반집 차이라는 아슬아슬한 차이였지만 총 27개의 룬 중 25개의 룬을 디아나가 차지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의 난전은 필요 없다.
“당신의 실력은 인정할게요. 이건 진심이에요.”
이미 이렇게 많은 룬을 점거한 이상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에 어울려 줄 필요도 없다.
등에 창이 꽂혀도 달려가는 황소처럼 우직하게 마력원을 파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요.”
디아나가 마음속으로 승리를 확정지은 순간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슬며시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디아나 님은 조금 더 판을 넓게 보실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탁!
그리고 보드 위로 모든 전황을 뒤집을 한 수가 펼쳐진다.
디아나라면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정석에서 완벽하게 어긋난 신의 한 수.
“아….”
비로소 보였다.
그 격렬한 난전 속에서도 그가 준비했던 그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것이.
그 한 수로 그가 점거하고 있던 2개의 룬이 빛난다.
그 한 수로 빛나던 룬이 하나의 날카로운 단검의 형상을 이룬다.
그 한 수로 단검을 이룬 형상에 마력 패스가 연결된다.
그 한 수로 무의미하게 흩어졌던 버려진 수가 하나의 유도 터널이 된다.
그 한 수로 날아간 단검이 격렬한 전투 이후 소진된 디아나의 마력원을 모조리 깨부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쌓여있던 도미노를 무너뜨린 것처럼.
일제히 완성된 마법의 연쇄작용에 의해 디아나는 순식간에 패배했다.
“…….”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졌는지.
어떻게 진 것인지를 이해하는데도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해야 했다.
도대체 그는 이 커다란 그림을 언제부터 그리고 있었던 걸까?
압도적인 재능과 그 결과물 앞에 저도 모르게 경외를 느꼈기 때문일까.
디아나는 어느새 자신의 팔에 소름이 돋아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거대한 재능의 벽이 거기서 뻗은 그림자에 잠식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음…. 백작님께 자르라고 말하는 건 봐주시는 겁니다?”
제 딴에는 애교 있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모아 부탁하는 마녀 역사상 최초의 남자 마녀.
이름은 신시우.
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EP.355 #77_가정교사(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