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1.
레바나 대욕장은 ‘대욕장에 가기 전까지는 게헨나의 풍요를 절반만 즐기는 것이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호화롭기로 유명하다.
시우가 가봤던 기억을 되짚어봐도 마치 전설 속 휴양지에 온 것처럼 화려했고 말이다.
예소드 백작에게 가정교사 제안받은 다음 날 아침.
이른 아침부터 예소드 백작가에 들른 시우는 감탄했다.
대욕장 옆에 바로 붙어있는 만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빼어난 시설을 구비한 것은 둘째치고 쌍둥이네 저택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제머나이 저택의 고상한 분위기는 명암의 대비에서 온다.
먼저 저택 곳곳에 깔린 붉은 융단과 채도가 짙은 벽지를 활용해 실내를 어둡게 만든다.
이후엔 사치스러운 촛대와 샹들리에로 화려한 불빛을 대비시켜 문자그대로 휘황하고 찬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반면 예소드 가의 저택은 전반적인 분위기가 굉장히 밝았다.
돔형과 아치형의 건축구조물을 특징으로 둥그런 기둥과 전혀 촌스럽지 않은 화려한 벽화들이 줄짓는다.
게헨나 자체가 워낙에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채용하는지라 딱 잘라 말하긴 힘들지만….
제머나이 백작가가 영국 혹은 프랑스의 양식에 뿌리를 뒀다면 이쪽은 로마 혹은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달까?
좀 더 개방감이 강하고 그 와중에 화려함도 빼놓지 않아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 이웃 나라 궁궐에 놀러 온 왕자님이 된 기분이었다.
뭐 현실은 계약직 가정교사지만 말이다.
“그럼 디아나,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네.”
“당분간은 하루 종일 재밌게 놀렴.”
“…네.”
“선생님도 저희 디아나 잘 부탁드릴게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저녁에 뵐게요~”
예소드 백작은 그 말을 끝으로 멀리 사라졌다.
무슨 신종 괴롭힘인지 억지로 무테안경을 씌우려는 것만 간신히 만류했지만, 백작의 요구로 인해 입고 있는 단정한 집사복과 느끼한 올백 머리만으로 시우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구 좋아하라고 이렇게 입으라는 건지….
옆을 보니 벌써 격렬한 혼란을 느끼는 것 같은 디아나가 멀뚱히 서 있다.
첫 만남부터 반응을 보아하니 가정교사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듣지 못한 것 같다.
뭔가 폭탄 돌리기를 당한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반갑네.”
어쨌거나 저쨌거나 목표가 있다.
백작의 입을 빌리자면 월동 중인 토끼만큼이나 행동력 없는 디아나를 근면 성실하게 놀게 하는 것.
자금은 아낌없이 지원해 줄 테니 뭐가 됐건 ‘의욕을 갖고 놀게 하여라!’라는 것이 지령이었다.
그 대가로 마법 공부와 연구 보조를 약조 받은 이상, 다음 주의 재계약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성과를 내놔야 할 것이다.
“저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안 반가운데요. 그리고 존댓말 하세요.”
모처럼 텐션을 올려 인사했건만 퉁명스러운 말이 돌아왔다.
보드라워 보이는 입술은 저만치 앞으로 나와 있고 건강해 보이는 두 뺨은 불만으로 퉁퉁 불어있다.
예상했던 바이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지금은 내가 네 가정교사니까. 예소드 백작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
디아나는 천성이 고집이 세다.
게다가 백작가의 금지옥엽으로 오냐오냐만 받으며 살아왔으며 실제로도 마녀로서 창창한 앞날이 보장되어 있다.
그런 디아나의 고삐를 조금이라도 쥐기 위해서는 교사와 제자라는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고, 그걸 가시적으로 보이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상호 호칭이었다.
물론 호칭뿐만이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적당히 혼을 내는 권한까지 확인받았다.
백작은 나름대로 교통정리를 해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엄마는 나갔고 저희 둘이 있으니까 상관없는 일이죠. 그리고 친한 척하지 말아줄래요?”
디아나의 반응을 보면 그닥 쓸모는 없었던 것 같다.
전에 없이 날이 선 반응을 보인 디아나는 어슬렁어슬렁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
“낮잠 자러요. 따라오지 마세요.”
“죄송한데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모양새를 보아하니 백작의 말만 믿고 반말로 틱틱거리다가는 본전도 못 뽑을 상황이다.
최대한 디아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우선 존대로 변경하고 뒤를 따랐다.
“우선 저도 성과를 보여야 하는 처지여서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따라와도 전 자러 갈 거에요.”
“그래도 끝까지 따라갈 겁니다.”
“그러던가요.”
좀 한심하긴 하지만 방법이 없다.
붉은가지의 통제를 위해 예소드 백작의 도움은 필수 불가결.
그것을 위해서는 쌍둥이 이상으로 종잡기 힘든 이 아가씨의 협조가 필요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차라리 수학 과외처럼 딱딱 정해진 활동이 있으면 모를까.
뭐든 하기 싫은 것처럼 보이는 아가씨를 데리고 ‘뭐든 하라’는 지령은 상당히 머리 아픈 것이었다.
-타박타박타박
-뚜벅뚜벅뚜벅
그 뒤로는 조금 웃긴 장면이 연출되었다.
복도를 이리저리 누비며 시우를 따돌리겠다는 듯 걷는 디아나.
그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시우.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낚시나 할까요?”
“…….”
“말쿠트 갤러리에서 쇼핑이라도?”
“…….”
“마법 사격이라도 해보실래요? 저도 해 본 적은 없는데 꽤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
생전 처음 맡는 곤란한 과외를 위해서 시우도 나름 사전 조사를 했다.
게헨나의 놀거리들과 여가거리를 꼼꼼히 조사해 컨시어지처럼 코스도 마련해 두었다.
문제는 당사자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호화코스를 준비해 둬도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라면 백작도 일주일 뒤엔 미련 없이 시우를 자르겠지.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다.
“아니면 극장에 공연이라도 보러 가실래요?”
“…….”
낮잠을 잘 장소를 물색하는데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거는 시우.
디아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사코 그를 무시하며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벌써 부글부글 머리가 끓는 것이 뒤통수 너머로 보였다.
사실 이건 반쯤 도박이었다.
밥 먹기 싫다는 사람 앞에 억지로 스푼을 들이미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우는 이미 디아나의 특징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예소드 백작의 고문에 따르면 만성 의욕 부족과 나태한 천성.
이 두 가지가 맞물려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게으름만 피운다고 한다.
그러나 시우는 그런 디아나의 면모 말고도 다른 부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런 게으름뱅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매일 아침 위치보드를 두러 왔던 디아나.
패배하자 열이 뻗쳐 길길이 날뛰던 디아나.
승리하자 만연의 미소를 지으며 시우를 놀리던 디아나.
그렇다.
분명 디아나는 게으름뱅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승부사의 기질과 도발을 당하면 배로 갚아주려는 불같은 성질이 게으른 천성 아래 잠들어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귀찮은 걸 싫어하는 사람은 계속 귀찮게 하며 따라오는 사람을 무시하지 못하는 법이다.
“아 쫌!”
가정교사 업무 시작 후 30분 만에 디아나는 처음으로 시우를 돌아보았다.
나른해 보이는 눈꼬리가 힘껏 올라가 있고, 불만스럽게 비틀린 입꼬리는 ‘나 좀 내버려 둬!’라고 소리치는 듯했다.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심지어 키도 백작과 비슷한데 이렇게 분위기가 다를 수 있을 줄이야.
시우는 새삼 놀라면서도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야 대답을 해주시네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나는 그쪽이랑 놀아줄 마음이 요만큼도 없다니까요? 요만큼도?”
시우의 계속되는 짤짤이에 거북이 전략으로 대응하던 디아나지만 결국엔 임계 값을 넘겼다.
결국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거리면서 울분을 토하는 디아나.
“어차피 당신이랑 아무것도 할 생각 없고! 오늘 저녁에 당장 엄마한테 말해서 자를 거예요! 진짜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
디아나는 한바탕 열을 낸 뒤 숨을 거칠게 헐떡였다.
타고난 에너지가 적은 데다가 요 며칠 밤잠을 설친 디아나에게 고함지르기란 극심한 체력소모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오늘만큼이라도 성실하게 일하는 수밖에요.”
“성실하게 괴롭히기겠죠…. 맘대로 하세요. 난 무시할 거니까.”
사실 디아나는 이 상황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대이다.
게다가 요즘은 디아나는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상태.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미 ‘깜짝 놀이 가정교사’라는 새로운 이벤트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신시우는 ‘남자’가 아닌가?
소설 속에서 짐승 같은, 불결한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디아나의 마음엔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감이 뭉실뭉실 커지고 있다.
또 그 마이너스한 감정을 시우에게 투사하고 있었다.
소설 속 배달부가 그랫듯 ‘이 남자도 날 그런 더러운 눈으로 보는 거 아니야?’ 같은 생각을 하며 말이다.
다른 때에 봤을 때도 불편했을 상대가 하필 어머니의 명을 받든 가정교사가 되어 졸졸 쫓아오니 인내심에도 한계가 차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온 곳은 디아나의 방이었다.
따뜻한 햇볕을 받거나 유수풀 위에 동동 떠다니며 잘까 했는데.
이 남자 때문에 모든 것이 헛것이 되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쫓아올 수 없겠지.
“…? 지금 뭐하는 거에요?”
“네?”
“여기 제 방인데요?”
그런 디아나의 상상을 가뿐히 무시하고 시우는 디아나의 거실에 발을 들였다.
엄청 태연하게.
“그렇군요.”
제집 드나들 듯 말이다.
“숙녀의 방에 함부로 따라 들어오다니 도대체 예절교육을 어디서 받았길래….”
“송구한 말씀이지만 예소드 백작님의 지시를 우선시하겠습니다.”
상상을 초월한 시우의 만행에 디아나는 도리어 황망해졌다.
그리고 뒤늦게 짜증과 분노가 솟는다.
“제 말이 우습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화내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에겐 일이니까요.”
“네, 됐어요. 어차피 내일이면 잃을 일자리니까. 알아서 하시고. 제 침실까지는 절대로 따라 들어오지 마세요. 그땐 진짜 못 참아요.”
기가 차서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문고리를 잡는 디아나.
그 뒤로 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제가 성가시시다면 앉아서 할 수 있는 활동으로 어떨까요? 비록 하루짜리 가정교사라고는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서야 백작님을 볼 면목이 없어서요.”
“후우, 그건 그쪽 사정이겠죠.”
“아쉽네요, 이거라면 디아나 님도 구미가 당기리라 생각했는데.”
“이거?”
슬며시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모양의 구체가 보였다.
지금 와서는 워낙에 강렬한 충격에 잊고 있었지만, 귀축배달부를 보기 전 디아나를 공부에 열중하게 했던 위치보드의 수정구였다.
“아마 종합 스코어 4대 2로 제가 리드 중이었죠?”
“그게 어쨌다고요.”
하지만 시우의 도발에도 디아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원래 사소한 사건에서 오는 감정은 더욱 커다란 사건에서 오는 감정에 희석되어 버리기 마련이다.
만일 귀축배달부로 인해 또 다른 고민을 품기 전이었더라면 당장 열을 냈겠지.
종합스코어 4대2 같은 말을 운운하는 도발에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누가 그런 뻔한 도발에 속을 것 같아요? 안 놀아 줄 거니까, 가세요. 멀리 안 나가요.”
“정말 안 하실 겁니까?”
“…흥.”
위치보드 따위 어차피 게임에 불과하다.
당장 마법으로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비리비리한 남자에게 게임 하나 졌다고 씩씩거리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코웃음 치며 문고리를 잡은 디아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시….”
그 뒤에 건방진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쫄...?”
“당장 하죠.”
EP.354 #77_가정교사(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