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50화 (350/917)

#350

1.

“어디 한번 살펴볼까요?”

“네, 풀겠습니다.”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쌓인 역장 속에서 시우는 조심스레 리본을 해제했다.

그와 동시에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활용도 못 하고 썩여왔던 붉은가지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걸 손에 넣게 된 뒤로 이렇게 리본을 전부 해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칫 왜곡장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 항상 부식된 리본 위에 리본을 덧대는 식으로 봉인해왔기 때문이다.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창날부터 창대까지 어떠한 이음매도 없이 이루어진 병기.

‘붉은가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금 흐른 선혈처럼 불길한 적색이다.

-파직!

그리고 모든 리본이 벗겨져 나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파형이 퍼진다.

동시에 식물의 잔뿌리처럼 가느다란 결계가 흉흉한 기세로 백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자신을 항아리에 가둬 둔 조련사에게 달려드는 독사처럼 말이다.

-챙!

하지만 그에 대한 예소드 백작의 반응은 그야말로 능숙한 조련사처럼 여유가 넘쳤다.

시우가 놀라기도 전에 연구실을 감싸던 역장이 순식간에 반경을 좁히며 적창의 주위를 감쌌다.

같은 일이 몇 번 더 일어나며 붉은가지가 19개의 얇은 역장에 감싸이자 폭주 또한 저지되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무작정 차폐만 한 탓에 안에 있던 상시 방출되며 축적되던 왜곡장이 확산한 거에요. 병 안의 샴페인을 마구 흔든 뒤 열면 거품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는 백작이지만 시우는 섬뜩함을 느꼈다.

백작이 너무나도 여유롭게 막아서 그렇지 방금 그 왜곡장과 결계의 농도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시우가 별 생각 없이 혼자 리본을 풀었다면 적잖은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피해간 위기상황을 곱씹을 무렵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기본의 차폐 방식만으로 어떻게든 되었습니다. 만약 왜곡장이 축적되고 있던 것이라면 이미 제 억제식으로 막을 수 없던 것 아닌가요?”

“기다리고 있었겠죠. 조금이라도 경계가 느슨해지면 한꺼번에 튀어 보내려고요.”

“…….”

하지만 백작의 대답은 오히려 시우를 어리둥절하게 만들 뿐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가지는 예장에 불과하다.

도구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뉘앙스에 따르면 마치 이 ‘붉은가지’에 자아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시우의 의문에도 루시 백작은 찬찬히 가지를 훑어볼 뿐이었다.

심지어 역장 안으로 손을 뻗어 직접 만져보기까지도 한다.

“이건…. 이미 아티펙트나 예장이라고 분류해야 할 범주를 넘었네요. 대단해요. 하나의 예장이 이렇게 시시각각 다른 패턴의 역장을 품어낼 수 있다니…. 제 구속을 풀어내려고 몸부림치고 있어요. 재질은 뭘까요? 아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은 아니겠죠?”

고아한 목소리에는 마녀 특유의 탐구심과 더불어 경탄이 섞여 있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신가요?”

“일반적인 ‘예장’은 결국엔 도구에 불과해요. 사용자가 미리 입력 또는 설계해 놓은 프로세스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일 뿐이죠.”

예소드가 역장에서 손을 뺐을 때 시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손가락 하나가 복합 골절이 된 것처럼 잔뜩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체의 구성이 ‘왜곡’되면서 변이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조금 다르네요. 면역체계에 반응하는 바이러스 같달까? 별도의 명령이 없이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주위를 오염시키려 들고 있어요. 저주를 받아 창으로 변해버린 마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요.”

“어? 그러고 보니….”

그렇게까지 듣고 나니 시우도 무언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비겁의 마녀는 이 붉은가지의 성능을 최고로 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영혼과 연을 바쳤다.

아는 한도 내에서 백작에게 성심성의껏 설명을 해주었다.

“…그 결과 으시시한 악령 같은 것이 깃든 것은 아닐는지….”

“후후 설마요, 악령 따위는 없답니다. 하지만 특별한 예장이라는 것은 알겠어요.”

백작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 한번 마법을 일으켰다.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졌던 그녀의 손가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붉은가지는 이후에도 역장 내부에서 가끔 결계를 토해내고 몸부림쳤지만, 백작은 무리 없이 그 모든 것을 방어해냈다.

“좋아요, 모처럼 저 역시 의욕이 생기는 연구 대상이네요.”

“다행입니다.”

“그럼 시간에 대해서 조율해 볼까요? 휴일과 그 전날을 제외한 주 5일.

하루 최소 4시간 디아나의 가정교사 역할을 해주세요.

디아나의 교육이 끝나면 저와 두 시간씩 개인 과외 공부, 휴일에는 시간을 내서 신시우 씨의 연구에 협조할게요.”

주 24시간 근무로 예소드 백작의 수업+연구 보조라.

이렇게 싸게 먹혀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방금 잠깐의 장면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역장 마법에 조예가 깊은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는 시우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쓱 내민다.

“저희 가문에서 계약이 성사되면 이렇게 축하하거든요.”

“악수인가요?”

“그렇죠.”

시우는 백작의 뻗은 손을 마주 잡았다.

굉장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치 은어 같은 손이었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 그리고 붉은가지는 제가 대신 봉인해 드릴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백작은 선뜻 붉은가지의 봉인까지 도와주고는 저택을 나섰다.

2.

디아나의 은둔생활을 어언 일주일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햇볕이 닿으면 VP가 감소해버리는 흡혈귀인 양 어둡게 커튼을 친 뒤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중이다.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남녀의 생식 과정이 실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단순히 쾌락을 위해 마녀가 어디까지 저속해질 수 있는지.

어머니가 저술한 귀축배달부를 통해 알게 된 성 지식은 디아나에게 천지개벽 급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처음엔 그저 경악했으며 불쾌했다.

천박하고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내용에 어머니에게 짙은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마도의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선택받은 마녀, 그중에서도 귀족이라면 정절과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하던 어머니가…. 실은 그런 책을 수십 권이나 쓰고 있었다니!

매스꺼움 수준의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그저 거부감과 역겨움만을 느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

최초 비밀의 방에 숨어든 이후에도 디아나는 몇 번이고 어머니의 서재에 숨어들었다.

귀축배달부의 나머지 부분을 읽기 위해서 말이다.

더럽고 거부감을 느낀다면 눈을 돌리고 피하면 될 일이다.

구태여 심연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궁금했다.

매일 ‘내일부터는 그냥 안가야겠어요’라고 침대에 머리를 붙여도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도대체 어떤 막장스럽고 적나라한 내용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이번에는 소설 속의 마녀와 배달부가 어떤 상스러운 말을 주고받을지 호기심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결국 귀축배달부 3권의 현재 작성된 부분까지 전부 읽어버렸다.

“이 세상은…. 아름답지 않아요….”

디아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

텍스트로 읽었을 뿐이지만 뛰어난 상상력으로 거의 영상화 된 장면이 머릿속에 흘러간다.

마녀가 배달부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천인공노하게도 그 마녀의 견습마녀가 자는 바로 옆에서.

‘아, 아이가 자고 있어요…. 장소를 옮겨주세요….’

‘위 입으로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아래 입은 솔직하시네요. 이렇게 빡빡하게 조여오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이렇듯 소설 속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을 때면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가슴이 쿵쿵 뛴다.

가만히 누워 있을 뿐인데 한겨울 밖을 나다니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은 것처럼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그 저릿저릿한 감각이 온몸을 개미처럼 기어 다닌다.

소설 속의 묘사에 따르면….

이것은 흥분 또는 성욕.

사실 그런 감각은 디아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미지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비단벌레의 색처럼 애매모호한 경계의 걸쳐 있는 그 감각을 정의할 수 없었다.

“으으….”

디아나는 베개 안에 고개를 더욱 깊게 파묻었다.

“그럴 리가 없죠.”

우선은 부정했다.

디아나가 살면서 쌓아온 가치관, 그리고 예소드 백작의 교육관으로 인해 주입된 고정관념이 새로운 지식과 만나며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의 내용에 대해 떠올리고, 잊으려고 발버둥치고, 또 궁금해하고, 그런 저속한 내용에 호기심을 품는 자신에게 실망하는 와중에.

오늘도 디아나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전속 하녀에게도 축객령을 내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문밖의 상대는 당연히 루시 백작일 것이다.

“딸, 들어가도 되겠니?”

“…네.”

마음이 무겁다.

소설을 읽게 된 이후 도저히 엄마를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며칠째 함께하는 저녁 식사도 피하는 것 아닌가?

“오늘 아침 햇살이 얼마나 좋은데.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해놓고 지내니?”

“…이게 편해서요.”

루시 백작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디아나의 침대에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옆에 의자를 꺼내 머리맡에 앉는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사륵사륵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루시.

“디아나, 요새 엄마가 너무 몰아붙여서 힘들었지?”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엄마가 지금까지 너무 고집만 부렸던 것 같아. 사랑하는 예쁜 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랬던 건데…. 디아나에겐 부담이 됐을 수도 있겠더라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가 미안해.”

그 상냥함은 언제나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것이다.

사실 전혀 헛다리를 짚은 셈이다.

그러나 저렇게 따뜻한 말을 하며 괜히 사과하는 엄마를 보자 효녀 디아나도 마냥 등을 돌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조금 망설여졌지만, 슬며시 몸을 돌려 백작을 마주 보는 디아나.

백작의 입가에는 자상한 어머니의 미소가, 눈가에는 글썽거리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이구,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너무 좋네. 이리 오렴.”

“네.”

백작이 팔을 뻗자 품에 폭 안기는 디아나.

“어휴! 누굴 닮아서 이렇게 귀여울까! 이 녀석! 이 녀석!”

“어, 엄마! 간지러워요….”

뺨에 쏟아지는 뽀뽀 세례에 부끄러워하는 디아나와 헤벌쭉한 미소를 짓는 백작의 촌극이 끝나고.

백작은 헛기침한 뒤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의기소침한 우리 딸 위해서 엄마가 깜짝 선물을 준비했어.”

“선물이요?”

갑자기 선물?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좋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응, 지금까지는 못 받았던 선물인데. 아마 디아나도 좋아할 거야. 들어오세요.”

“네.”

-뚜벅 뚜벅 뚜벅

굵직한 남자의 대답에 이어 울리는 구둣발 소리.

백작의 품에 안겨있던 디아나의 눈이 땡그랗게 변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디아나 예소드 님. 새로 가정교사를 맡게 된 신시우입니다.”

말끔한 집사 복과 올백으로 넘긴 머리.

짜증이 날 정도로 깔끔한 복장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남자.

거기에는 디아나 인생 최고의 숙적이자 난적.

호스트바에서 굴욕스러운 패배와 접대 승리를 안겨주었던 남자 마녀가 서 있었다.

EP.353 #77_가정교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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