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49화 (349/917)

#349

1.

사랑하는 딸.

힘없는 디아나를 위한 예소드 백작의 의욕 증진 및 근면 생활 습관 형성 프로젝트.

프로젝트 이름이야거창하다만 사실 루시 백작은 이미 디아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보았다 자부한다.

눈물을 머금고 집에서 쫓아냈던 것은 약과이고, 몸에 좋다는 약을 찾아보기도 했었지.

디아나가 즐거워할 만한 취미 활동을 찾기 위해 지불한 돈만 해도 레노먼드 타운의 근사한 별장을 몇 개나 사들일 수 있을 것이다.

결과는 보시다시피 같았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일주일가량은 관심을 보이거나 굼벵이 생활에서 탈피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원점 회귀.

예소드 백작의 한숨을 보태기나 했을 뿐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변수’로 인해 디아나는 전에 없는 열의와 열정을 보여주며 은둔 생활에서 탈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 변수라 함은 디아나가 호스트바에서 만났다는 남자 마녀.

더군다나 그 마녀를 만날 수 없게 되자마자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꽤 앞뒤가 맞는다.

따라서 예소드 백작은 디아나를 위해 선물 겸 갱생 비책을 준비하고자 했다.

바로 남자 마녀를 디아나의 가정교사로 삼을 생각인 것이다.

“흐음….”

그리하여 오전에 제머나이 백작에게 언질을 놓고 직접 저택을 방문했다.

요새 게헨나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는 남자 마녀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동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디아나 옆에 아무 남자나 붙여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눈도 높고 콧대는 더 높은 디아나가 남자에게 혹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 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디아나를 본 그 남자 마녀가 홀라당 넘어가 질척거리는 경우다.

“이쪽 연구실이던가…?”

저택의 12번째 연구실.

백작은 숨을 죽이고 조용히 문을 열어 들어섰다.

자성마법과는 별개로 각종 마도구 사업에서 특출난 성과를 보여주는 제머나이 가문답게 연구실에 비치된 실험기구 역시 급이 높았다.

언뜻 보기엔 골동품점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리타분한 물건의 향연 속에서 한 남자의 등이 보였다.

분석 대상에 자극을 최소화한 채로 관찰할 수 있게끔 하는 테이블.

그 위에는 검은 리본 같은 것에 돌돌 말린 기둥이 떠다닌다.

하지만 이 순간 루시 백작의 시선이 절로 향한 곳은 그 정체불명의 실험체 따위가 아니었다.

“어머나…?”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목에 타올을 걸고 손에 들린 전마지를 살피는 넓디넓은 남자의 등.

체지방의 방해 없이 날카롭게 커팅된 근육은 사소한 움직임도 반영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보디빌더의 것처럼 과시하는 듯한 느낌은 없다.

오히려 근육이 안으로 꼭꼭 뭉쳐 압축된 듯한 느낌이 강하다.

한동안 멍하니 굳어 있던 루시 백작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주책도 이런 주책이 없다.

물론 무척 볼 맛이나는 등이었고 바라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는 등이었지만, 오늘 여기 온 목적은 눈 호강이나 하자고 온 것이 아니다.

“실례합니다.”

목청을 가다듬고 백작의 품위에 걸맞은, 우아하고 기품있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한참 집중이던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루시 백작은 잠시 숨을 죽였다.

남자 마녀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자연히 영체인 남자를 보는 것도 처음이다.

영체가 되는 순간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꼽자면 아름다워진다는 것이다.

환골탈태하듯 흉터나 잡티는 사라지고 해당 신체가 자연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적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용모는 과연 영체의 효능을 엿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의 등과 마찬가지로 살짝 땀에 젖은 흑발, 우수에 젖은 눈동자와 샤프한 턱선.

여기까지만 본다면 루시 백작이 가장 싫어하는 예쁘장한 남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볼록하게 도드라진 목울대와 등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는 체조 선수 같은 근육.

거기에 꽤 여러 고난을 거쳐 간 듯한 가죽 안대까지 더해지자 남성미까지 물씬 풍겼다.

놀란 듯이 백작을 바라보던 남자는 싱긋 미소를 짓고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분을 뵙습니다.”

이 시점에서 백작은 조금 더 놀랐다.

정중한 말씨와 몸에 익어있는 듯한 예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출난 외모에 신사적인 태도가 더해지자 백작은 가슴이 꼬옥 조이는 것을 느꼈다.

남자를 보고 설레다니.

굉장히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익숙했으나 어느새 낯설어진 감각이었다.

“루시 예소드 백작님이시군요.”

그가 정체를 파악하고 이름까지 불러주었을 때.

백작은 흐뭇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꽉 억눌러야 했다.

자신이 갓 마녀가 된 남자조차 알아볼 정도로 유명하다는 점에서 흡족 1 스택.

“저를 아시나요?”

“예, 백작님이 집필하신 예소드 마력장 제 1 법칙을 공부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면서도 비굴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게.

잘 절제된 몸동작으로 마법 연구 결과를 칭찬받았다는 점에서 흡족 2 스택.

백작은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입꼬리를 가다듬고 슬며시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아니.

사실 시선을 피하고 싶은데 자꾸 자꾸만 눈이 갔다.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몸인데….

만져보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솟았다.

“그나저나… 항상 그런 차림으로 연구하나요?”

“죄송합니다. 방금 대련을 끝낸 직후라서요.”

백작의 지적에 전혀 서두르지 않고 하얀 셔츠를 걸쳐 입는 남자.

새하얀 옷자락이 펄럭이며 야성미 넘치는 땀 냄새가 훅 번져왔다.

이 역시 무척이나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

셔츠의 커프를 정돈하는 모습이 아주 그냥 정신 나갈 것 같았기에 백작은 볼 안쪽 살을 잘근 씹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별 생각 없이 왔는데 너무 잘 생겨서, 그리고 너무 몸이 좋아 동요가 생겼지만 거기까지다.

아무리 긴 세월동안 외로웠다지만 이 정도의 자극에 정신팔릴 정도였더라면 진작 다른 남자를 만났을 것이다.

따라서 순간의 충동에 휘말릴 생각도 그에게 추태를 보일 생각도 없었다.

적당히 이쯤에서 테스트를 해보자.

“혹시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루시 백작은 주책없이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그를 마주 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굉장하다.

이건 사심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테스트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뇌며 그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단추가 잘못 끼워졌네요.”

조금 전부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하나하나 셔츠의 단추를 풀어나갔다.

아쉽게도 셔츠에 감춰져 있던 흉근과 복근이 다시 모습을 보였다.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가슴에 손을 슬며시 얹고 손끝으로 살살 쓰다듬는다.

완벽히 탄탄하다.

그리고 아직도 운동 후의 열기가 남아있는지 뜨겁다.

“이 연구실…. 사람들의 방문이 잦나요?”

만약 그가 유혹에 약한 남자라면 여기서 넘어와 버리겠지.

저 핏줄이 불뚝거리는 팔뚝으로 허리를 휘감고 ‘더 조용한 곳으로 가실까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아쉽지만….

아쉽지만?

아무튼 아쉽지만 디아나의 가정교사로는 자격이 없어진다.

이런 가벼운 유혹에도 절제가 안 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종종 제머나이 백작님이 찾아오시곤 한답니다. 그리고 저는 백작님이 왜 저를 찾아 오셨는지에 대한 답변도 듣지 못했고요.”

칼 같은 거절의 의사와 함께 백작의 손을 떨쳐내는 그의 모습에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테스트는 통과.

일전에 데네브에게 들었던 대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그런데 먹음직스럽게 설탕코팅이 된 도넛을 겉만 살짝 핥고 내려놔야 하는 이 심정은 무엇인지….

이렇게 됐으니 슬슬 본론을 늘어놓을 때이다.

“제가 이곳에 온 까닭은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2.

예소드 백작은 연극에서 툭 튀어나온 여왕님처럼 굉장히 예스러운 말씨를 구사하는 마녀였다.

짐작하기로 모종의 테스트가 끝난 이후.

시우는 얌전히 의자에 앉아 백작의 제안을 들었다.

“가정교사요? 제가요?”

“네, 앞서 설명해 드렸던 대로 우리 디아나의 음…. 게으름을 치료하기 위한 가정교사죠.”

시우가 마법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가진 마녀도 아니고 갑자기 가정교사라길래 무슨 의미인가 했다.

그리고 그녀의 제안은 시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한 것이었다.

“그, 게으름을 제가 어떻게 치료하는 건가요?”

“디아나의 여가에 어울려주면서 이것저것 놀거리를 찾아보는 것… 이랄까요?”

“그게 정말 다 인가요?”

“네.”

예소드 백작은 자신의 견습마녀 디아나 예소드의 게으름병 치료를 위해 가정교사를 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제껏 봐왔던 디아나의 모습은 씩씩거리며 게임하자고 달려들던 모습뿐이어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원래는 그런 천성을 지닌 모양이다.

“물론 맨입으로 부려 먹을 생각은 없어요.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세요. 저희 예소드 가는 주고 받는 것이 확실하니까요.”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듯하여지자 또다시 제안을 건네는 백작.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예소드가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시우 혼자 끙끙거리고 있는 붉은가지의 통제 문제도 철로 위에 오르리라.

지금처럼 달구지 맨몸으로 끌듯 울퉁불퉁한 시행착오를 거칠 필요도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고작 견습마녀의 놀이 선생이 되어주는 것뿐인데 자성마법이 활용되는 마법 연구에 어울려줄까?

따라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역장에 관련된 것을 공부중인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연구를 도와주는 거면 되나요? 좋아요. 그렇게 하죠.”

다행히 예소드 백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 위의 붉은가지를 바라보았다.

“이걸 다루고 싶다는 얘기죠?”

“네, 그렇습니다.”

“흐음, 부탁하는 처지에 이런 말 하면 섭섭할지도 모르지만…. 이 계약관계는 영구지속이 아닌 매주 새로이 연장하는 것으로 보겠어요. 디아나가 그….”

“신시우입니다.”

“고마워요, 하여간 신시우 씨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저도 굳이 시간을 내서 도와줄 필요가 없으니까요.”

“인지하고 있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상정 내이다.

명예 직책이나 다름없는 남작에 비해 백작은 실제로 게헨나 관리에 크게 관여하는 경우가 잦고, 제머나이 백작만 봐도 마법 연구하랴 사업 챙기랴 무지하게 바쁘니 말이다.

애초에 놀이 선생이라는 간단한 일을 대가로 백작급 마녀에게 연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부터가 착취 수준의 교환이었다.

“바로 봐볼까요? 이게 그 적기사가 들고 있다는 붉은가지로군요.”

“지금 바로요?”

“네, 저도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고요. 밀봉을 풀어주시겠어요?”

아까부터 시우의 생각보다 적극적인 백작님이다.

한창 막혀있는 스테이지를 고인물이 대신 나서 도와주겠다고 단언한 상황.

꺼릴 것이 없었지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

“예소드 백작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이곳에는 각종 마도구가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밀봉을 풀었다간….”

걱정스러워하는 시우의 모습에 예소드 백작은 간지러운 듯 웃었다.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귀엽다는 듯 시우를 향한다.

“어머나? 보기보다 굉장히 신중하시네요. 그 정도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답니다. 정 걱정된다면야….”

예소드 백작은 하얀 부채를 촥 펼쳤다.

깨끗한 월광을 연상시키는 은빛의 마력 반사광을 품은 채 고운 목소리가 노래하듯 시동어를 읊는다.

“순수한 지성이여.”

그와 동시에 몇 겹이나 되는 역장이 연구실 안을 감쌌다.

역장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빛 탓에 실험실이 몇 배는 밝아진 듯하다.

동시에 역장 내부의 마력이 확실하게 안정된다.

그 어떤 변수도 일어나지 않게 고정된, 무균실 같은 장소로 변한 것이다.

시우라면 하나를 흉내 내기도 어려운 역장을 이렇게 수십 겹씩 숨 쉬듯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다니.

역장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시우라도 왜 그녀가 백작 위로서 위명을 떨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자, 이제 풀어 보세요, 신시우 씨.”

백작은 놀란 듯 눈을 반짝이는 시우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재촉했다.

EP.352 #77_가정교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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