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
1.
재력으로도, 마법으로도 역대 예소드 중 누구보다도 빼어난 업적을 이룩했다 평가받는 루시 예소드 백작.
백작은 근래 고민이 많았다.
모든 것이 완벽한 그녀의 유일한 고민거리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딸.
디아나 예소드의 고질적인 게으름병이다.
그래도 최근은 꽤 괜찮았다.
눈물을 머금고 디아나를 집 밖으로 쫓아낸 이후.
디아나는 일주일도 넘게 성실하게 밖을 돌아다녔을 뿐 아니라 방에 홀로 틀어박혀 공부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하지만.
“딸….”
“저 오늘 저녁 안 먹을래요….”
“요즘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아니요…. 죄송해요. 먼저 잘게요.”
디아나는 침대에 누워 등을 돌린 채 루시를 바라보지도 않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깨라도 다독여 줄까 하다 결국 조용히 방을 나서는 루시.
한동안 누구보다 성실히 각종 활동에 매진하던 디아나의 은둔 병이 극심하게 도진 것.
이것이 바로 최근 부상한 고민의 정체였다.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것은 물론 밥도 거르고 티 타임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는다.
흡사 제2의 사춘기 혹은 반항기라도 온 듯이 루시를 피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이다.
“하아….”
요새 너무 몰아붙였던 것이 폐단이었을까.
백작은 작게 한숨쉬며 자책했다.
물론 모두 디아나 잘되라고 강행했던 것이다.
마녀의 인생은 길다.
길고 괴롭다.
평생을 매달려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마법에 매진해야 한다.
두터운 벽이 좌절과 실패를 선사해도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일념으로 투쟁하는 것이야 말로 마녀의 인생이다.
따라서 뛰어난 마법적 재능 혹은 직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방면에서 경험을 쌓고, 지치고 힘들 때 쉬어줄 수 있는 여가 생활은 필수적인 것이다.
좀 더 이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운지.
그 방탕한 즐거움 안에도 현묘한 묘리의 실마리가 숨어있음을 사색하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지녀도 의미가 없다.
만약 디아나가 이대로 마녀가 된다면 길어야 몇 년도 지나지 않아 견습마녀부터 찾을 것이 자명했으니….
“어쩜 좋니 정말….”
루시 백작은 울적한 마음으로 개인 서고로 향했다.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마녀를 만났을 때 디아나가 전에 없이 활기찼었지?”
그때의 디아나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통에서 전해 듣기론 하루가 멀다 하고 그 남자를 찾아가 위치보드를 겨뤘다고 한다.
실력은 꽤나 박빙으로 승패가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조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백작은 나름대로 그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었다.
디아나가 먼저 얼빠진 남자에게 빠지는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가 있으니 이런저런 소문을 전해 듣는 정도였다.
“혹시…?”
그러고 보니 그 남자마녀가 호스트를 그만두었더랬지.
생각해보면 그의 은퇴 시기와 디아나가 집에서 잠적하며 의욕을 잃은 시기가 정확하게 겹친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아나의 의욕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백작은 기꺼이 그를 선물상자에 포장해 선물할 의향이 가득했다.
“뭐, 이 문제는 조금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모처럼 바쁜 업무 끝에 시간이 남는 날이다.
백작은 개인 서고의 장식품을 조작해 비밀의 방을 열었다.
기분 좋은 잉크 냄새가 간질간질한 좁은 집필실이야말로 루시 백작이 가진 은밀한 취미생활의 놀이터이다.
“후후후… 이게 얼마만일까?”
백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여 앉고 펜을 들었다.
고민과 걱정도 잊은 채 활짝 펴진 얼굴이 그녀가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는지를 방증했다.
관능 소설 집필은 루시가 약 십여 년 전부터 남몰래 즐겨왔던 취미였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귀축배달부 시리즈, 나비 부인 시리즈, 위험한 장난 시리즈, 실낙원 시리즈 및 수십 권에 달하는 단행본까지.
‘남자에게 굴복하는 마녀’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만큼 일부 마녀 사이에선 곱지 못한 시선을 받고 있긴 했지만, 막상 새로운 책이 나오면 가장 먼저 손에 넣는 것들은 겉으로 점잔빼는 마녀들이다.
게헨나 내 평민들에게도 극찬과 호평을 받으며 새로운 책이 발행될 때마다 큰 파란을 일으켰다.
물론 집필부터 출판까지 굉장히 비밀리에 진행되는지라 누구도 이 책이 예소드 백작의 작품이라 짐작하지 못했다.
예소드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고 말이다.
백작의 펜은 거침없이 빈 지면 위를 춤추며 여백을 채워나갔다.
“그러면 오늘은…. 이 장면이네~”
그렇다면 백작이 어째서 관능소설 집필 같은 저속한 취미활동에 매진하는가.
루시는 과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도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콧대 높은 루시의 얼어붙은 마음을 불처럼 뜨거운 사랑으로 녹였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을 선물해 주었다.
또 침대 위에서 느낄 수 있는 뜨거운 정열도 말이다.
“우…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야할 것 같은데….”
그러나 시간은 야속하고 무정하게 그를 뺏어갔다.
그는 백작이 모르던 세상을 알려 준 뒤 덧없이 떠났고 백작은 홀로 남아 외로움에 몸서리쳤다.
그렇다고 아무 남자와 함께하는 것은 그에 대한 배신이자 마녀의 수치.
결국 이런 관능 소설을 쓰면서 숨길 수밖에 없는 미망인의 욕정을 채우는 것이다.
한참 책을 써 내려가던 백작의 손이 슬그머니 옷 안을 파고들고.
그녀는 오늘도 굶주린 밤을 잊기 위해 집필활동에 매진했다.
2.
오늘 오전.
엘로아와 수련을 끝낸 시우는 연구실로 돌아왔다.
제머나이 백작가에는 20개가 넘는 마법 연구실이 있었고 알비레오 백작은 손님인 시우를 위해 기꺼이 연구실 하나를 빌려주었다.
그 덕에 일주일 정도만 게헨나에 머물려 했던 계획을 전면 수정하고 풍족한 실험기구를 바탕으로 붉은가지 해석에 전념 중이다.
“하아, 거 더럽게 덥네.”
게헨나도 슬슬 겨울이다.
노예시절 시우가 학을 뗐던 계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승님과 몸의 대화를 나누고 오면 항상 윗옷이 축축할 정도로 땀에 젖었다.
샤워하러 가기엔 너무 귀찮고 윗옷을 벗은 뒤 물수건으로 대충 이곳저곳 닦았다.
열이 올랐던 피부에 따뜻한 물이 닿자 팔문둔갑이라도 개방한 것처럼 김이 풀풀 올라왔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수분 보충까지 끝내고 어슬렁어슬렁 고정장치에 매여있는 붉은가지로 향했다.
억제식이 새겨진 검은 리본에 칭칭 감겨 두둥실 떠 있는 적색창.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365일 24시간 무분별하게 방출되는 왜곡장에 의해 이것저것 트러블이 생긴다.
영체라면 아마 구성이 무너질 것이고, 마법 용품이라면 망가지겠지.
얼마 전에 확인하게 된 사실인데 오딜이 선물로 주었던 오르골도 망가져 버렸다.
아티펙트 자체가 정교한 전자 장비와 마찬가지인 만큼 아마도 과거 적기사와 대치하던 과정에서 너무 큰 부하가 걸렸던 것은 아닌지 예상 중이다.
“그럼 오늘도 샘플이나 확인해 볼까?”
하루 동안 축적된 역장 패턴도 확인할 겸 공중 부양 중인 붉은가지 아래 전마지를 꺼내 들었다.
단순히 전마지가 아니라 이중으로 연금 약품 처리를 거쳐 미세한 마법 파형도 새겨질 수 있게 변형한 것이었다.
“흠….”
하얀 전마지 위에 나이테처럼 퍼져 있는 왜곡장의 흔적.
지금까지 수집한 표본과 비교해봤지만, 딱히 나아진 건 없다.
“역시 모르겠네….”
전혀 짐작이 가거나 발견한 단서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아무리 마법적으로 뛰어나다 한들 전공 분야가 아닌 마법을 독자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이 ‘예장’ 급의 아티펙트를 분석하는 일임에야 말할 것도 없다.
“실례합니다.”
시우가 수건을 목에 건 채 전마지를 들고 고민하고 있을 때.
별안간 낯선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사실 이따금 엘로아도, 심심한 샤론도, 발랄한 쌍둥이도 심지어 근처를 지나가던 알비레오 데네브 백작도 들르는 마당이다.
연구실이라고 해도 말이 연구실이지 반쯤은 만남의 광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본 시우의 눈에 보이는 사람은 초대면의, 그러면서도 굉장히 귀족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마녀였다.
그 간의 호스트바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상대의 신분을 유추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하얗다’이다.
고래수염으로 만든 코르셋과 살결이 슬며시 비치는 보빈 레이스 드레스.
얼룩 하나 없이 하얀 스타킹과 얇은 옷감 너머로 보이는 가터벨트.
백조의 깃털로 된 부채까지 당장 결혼식을 벌여도 될 것 같은 순백의 옷차림이었다.
“고귀한 분을 뵙습니다.”
고지식한 마녀로 가득한 게헨나 속에서도 저런 복장을 고수하는 마녀는 대게 정통파 마녀이다.
또한 옷감의 재질이나 몸치장의 상태로 유추하자면 최소 남작급의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위로 올려묶어 새하얀 오렌지꽃으로 장식된 잿빛의 머리카락은 애쉬 톤임에도 불구하고 첨단까지 생명력이 깃든 것처럼 반들거린다.
어째 익숙하다 싶었는데 토파즈처럼 주홍빛으로 반짝이는 시선까지 보자 단숨에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동안 뻔질나게 시우에게 승부를 걸었던 디아나 예소드와 무척 흡사했다.
“루시 예소드 백작님이시군요.”
두 가지 의미에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 예소드 백작이 자신의 견습마녀가 호스트바에 드나들던 것을 문제 삼아 질책하려 온 건 아닐까? 라는 불안감.
어쩌면 한참 정체된 마법 연구에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탓이다.
예소드 가는 역장 마법이라면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는 선두 주자이니 말이다.
따라서 슬쩍 간을 보기로 했다.
“저를 아시나요?”
“예, 백작님이 집필하신 예소드 마력장 제 1 법칙을 공부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연구에 틈틈이 참고 중이고요.”
이게 바로 호스트 업무로 갈고 닦여진 사탕발림이다.
중요한 것은 아부를 듣는 사람이 아부라고 느껴지지 않게 진심을 섞어 말하는 것!
다행히도 청산유수로 쏟아지는 시우의 아부에 예소드는 흡족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호? 요즘엔 이 마녀나 저 마녀나 응용마법에나 정신 팔려 순수마법을 소홀히 하는 마녀가 많은데…. 보기 드문 건실한 마녀네요. 남자이면서도.”
“과찬이십니다.”
이 정도로 넘어간 것을 보면 호스트바에서의 일로 추궁하러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항상 그런 차림으로 연구하나요?”
“네? 아, 죄송합니다. 방금 대련을 끝낸 직후라서요.”
힐끗 향해오는 시선에 여전히 상의 탈의 상태임을 깨달은 시우.
영체가 된 이후 체조선수처럼 몸이 좋아졌다.
본격적으로 엘로아와 수련에 들어간 이후로는 빼곡하게 잔근육까지 생기며 거울을 봐도 ‘고놈 잘생기고 몸 좋네’라는 생각이 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래도 초면인 상대 앞에서 이런 복장으로 있기엔 좀 그래서 재빨리 근처에 대충 벗어놨던 옷을 걸치고 손목의 단추까지 확실히 채웠다.
옷을 입을 때까지 슬며시 시선을 돌리던 예소드 백작은 차분한 발걸음으로 시우의 옆에 섰다.
“흐음….”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괜히 옆에서 알짱거리며 붉은가지를 바라본다.
“혹시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
시우의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던 예소드 백작은 돌연 몸을 돌려 마주 섰다.
여성치고는 키가 꽤 크다.
하이힐을 벗으면 대충 168쯤으로 디아나와 비슷할 것 같았다.
자칫하면 체취를 들이 마실까 뒤로 물러서는 시우.
그리고 그런 그의 옷깃을 단단히 붙잡은 백작.
그녀의 돌발행동에 놀란 시우가 아연해 하고 있을 무렵.
백작은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끈적한 목소리로 달싹였다.
피부부터 복장까지 순백의 빛을 띠는 것과는 정반대로 새빨간 립스틱으로 빛나는 입술을 핥으며 말이다.
“단추가 잘못 끼워졌네요.”
그리고는 하나하나 시우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출근 전 넥타이 다시 매주는 새댁도 아니고 뜬금없는 전개에 당황한 사이.
어느새 훌러덩 벌어진 셔츠 사이로 백작의 하얀 손이 얹혔다.
“이 연구실…. 사람들의 방문이 잦나요?”
그렇게 잘 정돈된 손끝으로 가슴을 할퀴듯 긁어내리며 노골적인 추파를 던졌다.
만약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면 즐거운 일을 하자….
대충 이런 의미인 것 같다.
갑작스러운 대쉬라면 익숙하다.
호스트바에서 하루에도 10명 정도는 시우를 잠자리로 끌어들이려 했었다.
떡이 맛있긴 해도 남이 주는 떡을 홀라당 먹지는 말자… 라는 마인드로 거절해 왔었는데.
설마 백작이나 되는 마녀가 이렇게 경솔하게 행동할 줄이야.
무척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얼마전 알비레오 백작이 제안했던 것과 굉장히 유사한 상황이다.
마침 전후 사정도 비슷하다.
알비레오가 그때 시우를 유혹했던 것은 쌍둥이를 두고 얼마나 쉽게 다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판단한 것이었으니….
아마 예소드 백작은 시우가 디아나에게 애먼 짓을 늘어놓진 않았는지 모종의 테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종종 제머나이 백작님이 찾아오시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백작님이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에 대한 답변도 듣지 못했고요.”
“그런가요? 미안했어요.”
예상대로 예소드는 시원스레 물러나며 언제 그런 속 보이는 질문을 했냐는 듯 몸가짐을 정갈히 했다.
남자가 그리워 밤새 끙끙 앓는 미망인 같던 분위기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큼.”
잠깐의 헛기침 이후.
예소드 백작은 여기 온 본래 목적을 말해주었다.
“제가 이곳에 온 까닭은 당신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EP.351 #77_가정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