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345화 (345/917)

#345

1.

제머나이 저택의 부지로 향하는 동산길에는 졸참나무와 너도밤나무가 우거진 숲이 있다.

겨울을 맞아 동면 준비에 들어간 나무가 떨어뜨린 낙엽 가운데서 검은 창이 파공성과 함께 공중을 갈랐다.

그림자로 직조된 2.45m의 장창.

그 모양새와 길이는 정확히 붉은 가지와 동일하다.

“훅…!”

마주한 상대는 엘로아.

벚꽃색 머리를 활동성 좋게 뒤로 묶은 그녀는 턱 끝까지 올라온 창끝을 어렵지 않게 빗겨냈다.

동시에 핑그르르 회전하는 시우.

그 회전 속에서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찌르기의 삼연격.

-창! 창! 창!

엘로아는 상단과 하단을 번갈아 찔러오던 창격을 피하고는 그대로 간격을 좁혔다.

미끄러지듯 상대를 타고 기어 오던 엘로아의 검날이 시우의 목 바로 앞에서 멈춰선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고생했네.”

“하아, 스승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못 당하겠네요.”

“아무렴, 벌써 따라잡힐까?”

두 사람은 정답게 물을 나눠 마신 뒤 근처 나무밑동을 벤치 삼아 앉았다.

시우는 엘로아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본래 방패와 롱소드를 활용해 전투를 벌이던 시우였지만 이번 기회에 무구를 변경했다.

언젠가 붉은가지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주무장으로 삼을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비록 만병지왕의 계약이 모든 병장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해준다지만 역시 몸에 익고 와 익지 않고는 차이가 컸다.

롱소드로 겨루던 때보다 손쉽게 패배한다는 점이 그랬다.

“뭐가 문제일까요?”

“간격의 문제일세. 일전부터 익숙했던 간격이 낯설어지니 물러서야 할 때 들어오고, 들어와야 할 때 물러서게 되는 게지. 하지만 시간문제일 게야. 익숙해지기만 하면 될 걸세.”

살짝 옆에 떨어져 앉은 엘로아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저렇게 가느다란 목덜미와 톡 치면 풀썩 쓰러질 것 같은 체구에서 어떻게 이런 강함이 나올 수 있는 건지.

아무리 마법 덕택이라지만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대와 이렇게 대련하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그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양 생글생글 웃던 엘로아.

“잠시 나 좀 보게.”

문득 시우를 바라보더니 몸을 기울였다.

갑자기 확 좁혀지는 두 사람의 간격.

마치 뽀뽀라도 해오는 듯한 상황에 시우가 어정쩡하게 굳어있을 무렵.

엘로아는 제 손수건으로 시우의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마 새하얀 바탕에 그녀가 자수를 놓은 듯한 꽃문양이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제, 제가 할 수 있는데요.”

“됐네, 뭐 어려운 일이라고.”

엘로아가 땀을 닦던 쪽과는 반대면이라지만 묘하게 달콤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향수라도 듬뿍 뿌린 것 같았다.

뭔가 멋쩍어하는 와중에 손수건을 다시 품에 넣는 엘로아.

“그동안 얼굴 보기가 어찌나 힘들었는지…. 많이 바빴는가?”

“네, 근데 이제 일도 끝났고 당분간은 수련에 열중하고 싶어서요. 앞으로도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그대의 부탁이라면 없는 시간이라도 시간을 내야지. 얼마든지 말만 하게나.”

“네, 스승님. 감사합니다.”

“이 뒤로도 계획이 있는가?”

“아마 마법 연구를 진행하게 될 것 같아요. 이게 도통 쉽게 풀리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나름대로 마법엔 자신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근본 없는 자만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았다.

우선 여러 가지 샘플 마법식을 만들어 시험해보고 있는데 결과는 처참하다.

달걀 들고 바위 치기 하는 심정이다.

“그대라면 금방 잘 해낼 수 있을걸세.”

“그럼 너무 늦기 전에 가보겠습니다. 이따 저녁 때 뵐게요.”

“그러세나.”

고개를 꾸벅 숙인 시우가 숙소로 향하고.

엘로아는 그 뒷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입가에 새겨졌던 행복감이 애달픈 미소로 바뀌면서 어쩐지 모를 아쉬움과 야속함이 남는다.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조용히 읊조렸다.

“…이거면 된 걸세.”

시우와 마차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기억을 지운 뒤.

엘로아는 제 나름대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연인인 샤론을 찾아가 사과를 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어찌 보면 이제야 제대로 된 사제관계로 돌아갔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당연하다시피 함께해 왔기 때문일까?

엘로아는 시우의 기억을 지우고 난 뒤에야 과거 그가 빗물터널에서의 일을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오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눈치 보듯 힐끗거리는 시선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고.

괜스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 일도 없었다.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한편.

마음 한쪽으로는 새삼 야속함이 남는다.

“웃차.”

엘로아는 잡념이 찾아오기 전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아직 남은 계약의 대가를 치르고는 있다.

하지만 전처럼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잡념을 지우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엘로아는 한동안 너울거리는 검무를 추며 제 마음을 추슬렀다.

2.

여전히 살생부를 이행하기 위해 오지를 떠도는 아멜리아와.

그 옆에서 길잡이 겸 자질구레한 케어를 떠맡는 클라라.

두 사람은 오늘의 사냥을 끝내고 엉성하게 만든 캠프 앞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오늘 아멜리아가 사냥한 상대는 21 위계의 악명 높은 공적이었다.

정면승부를 한다면 클라라조차 승패를 가늠하지 못할 강적.

변형된 원소계통의 마법을 사용해 차가운 불과 뜨거운 얼음을 쏟아내는 잔혹무비한 공적이었으나.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간의 전투로 갈고 닦아진 아멜리아는 강했다.

여태 그녀의 전투를 옆에서 지켜봐 왔던 클라라도 그토록 압도적인 전력 차가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메마른 사막 위로 내리던 이슬비.

모든 마법을 무효로 하며 피어나는 이름 모를 야생화의 향연.

과연 그 앞에 대적할 상대가 존재하기는 할까? 라는 의문을 절로 떠올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오늘도 고생 많았어.”

“…….”

“어려워 보이면 조금은 도와주려고 했었는데.”

“…….”

클라라는 고생한 아멜리아를 위해 차를 끓이며 연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요한 작업이었다.

아멜리아가 부서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기 위해서 주기적인 검진은 필수요소이다.

저렇게 애처롭게 빛나면서도 잠시만 한눈팔아도 바스러질 황금 같다니.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연이은 아멜리아의 침묵.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라고 넘겨짚었던 클라라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포착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너….”

클라라는 아멜리아는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입술.

길고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식은땀이 쉼 없이 흘러 피부가 끈끈해 보일 지경이다.

클라라는 한눈에 아멜리아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마력 결핍.

낙인에 저장된 마력을 한계치 이상으로 억지로 쥐어짜 내 사용했을 때 벌어지는 증상이다.

“상태가 이 지경이면 말을 했어야지!”

“괜찮…아요…. 조금만 쉬면….”

아멜리아는 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며 내뱉는 그녀의 날숨에는 뜨거운 열기가 섞여 있다.

본디 마력 결핍은 그다지 심각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격렬한 운동 뒤 탈진하는 것처럼 굳이 따지자면 자연 회복이 가능한 종류이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여태껏 몇 번이고 자신의 마력을 소진해왔다.

그렇게 무리한 몸을 닦달해 전장으로 향한 결과 마침내 자연 회복이 가능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이리 와 봐!”

클라라는 아멜리아를 위해 끓이던 찻주전자를 내던지고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옷 너머임에도 전신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진땀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이 뺨 위를 가로지르고, 아멜리아는 초점이 멍한 시선으로 클라라를 올려보았다.

“아멜리아. 부탁 하나 할게.”

“…….”

“내가 너를 도와주려면 자율 방어를 해제해 줘야 해.”

“…….”

“내 마력을 넘겨줄게.”

클라라가 하려는 것은 자신의 마력을 아멜리아에게 나눠주려는 행위였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마녀들 사이에서 금기시된다.

매우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육신이 영체로 이뤄진 마녀에게 마력이란 곧 혈액이나 다름없다.

저마다 다른 자성마법을 사용하는 마녀인 만큼 각기 상이한 성질의 마력을 지닌다.

따라 타인의 마력을 무방비하게 체내로 받아들였다간 자칫 다른 혈액형의 혈액을 전혈수혈하는 만큼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을뿐더러, 만약 마력을 전달하는 측이 아주 조금의 악의라도 품게 된다면 곧장 목숨이 위태롭다.

“날 믿어줄래?”

“…….”

몸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섬뜩하리만치 아무런 변화가 없던 아멜리아의 눈동자에 자그마한 파문이 일었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하늘빛의 파문이었다.

아멜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클라라는 즉시 응급처치를 시행했다.

클라라는 자신의 낙인에 저장된 마력을 외부로 끄집어냈다.

붉은 불길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새빨간 자기화된 마력.

이 상태 그대로 아멜리아에게 넘길 수는 없다.

자기화 이전의, 최대한 중립 상태의 마력으로 되돌리고 주입해주어야 한다.

클라라의 마력 저장량은 동 위계 마녀의 수배를 훌쩍 넘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나 이 마력의 정제과정은 무척 비효율적인 낭비를 발생시켰다.

마력수 한 병 분량을 통째로 증류시켜도 고작 몇 방울의 순수한 마력을 남길 수 있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편해질 거야.”

클라라의 이마에도 땀이 흐르고.

곧이어 그녀의 손에는 하얗고 투명한 마력이 남았다.

이 정도라면 아주 중립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럭저럭 순수할 것이다.

“하아….”

클라라가 아멜리아에게 마력을 넘겨주자 아멜리아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

그리고 곧장 긴장이 풀린 듯 잠에 빠져버린 아멜리아를 보며 클라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위험했네.”

지금까지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멜리아는 여전히 클라라에게 벽을 치고 있었다.

그 점이 아쉬우면서도 참으로 그녀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23 위계라는 드높은 경지에 비해 아멜리아 메리골드는 턱없이 미숙하고, 연약하고, 서툴렀으니까.

제 상처를 남에게 보이는 것조차 마음 편하게 하지 못하는 바보인 것이다.

클라라는 자기 무릎에 기대 누운 아멜리아의 탐스러운 금발을 쓸어주었다.

천사들의 베틀에 황금을 녹여 짜낸 것 같은 얇고 부슬부슬한 금발이 손끝 사이로 기분 좋게 흐른다.

초췌하고 땀에 젖은 뺨.

살짝 벌어진 채 달뜬 숨을 내뱉는 고운 입술까지.

난리통에서 뒹굴고 이런 몰골이 되어도 아멜리아에게선 묘한 색기가 품어져 나왔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클라라의 시선이 아멜리아 품에 있는 살생부를 향한다.

케테르 공작이 남긴 죽여야 할 공적의 목록.

원래 이런 것은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들춰볼 수 있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일단 아멜리아의 뒷바라지를 자처하고 있는 만큼 최소한 다음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아보는 편이 좋을 성싶었다.

클라라는 살생부를 펼쳤다.

오늘 처치한 공적 부분을 넘기고 케테르가 지정한 다음 상대는.

“이건…. 쉽지 않겠는데?”

클리포트 소속.

22 위계의 대마녀.

욕망의 마녀라는 이명으로 불리며 수없이 많은 마녀를 안식에 들게 한.

비앙카 벨릴리였다.

EP.348 #76_마녀의 관능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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